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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양귀비)

양귀비의 고향은 어디인가?

by 중은우시 2010. 6. 8.

글: 수진당리(瘦盡棠梨)

 

양귀비의 출생지에 관하여는 역대이래로 3가지 견해가 있었다. 일설은 광서용현(廣西容縣)이라는 것이고, 일설은 섬서화음(陝西華陰)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일설은 산서포주(山西蒲州)라는 설이다. 이 세 가지 설은 모두 사료의 근거를 지니고 있다. 아래에서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용현설

 

원나라, 청나라의 <<용현지(容縣誌)>>에 따르면, "세상에 전해지기를 당나라때의 태진(太眞, 양귀비의 도명)의 고향이라고 한다. 양비정(楊妃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오래되어 이미 막혔다. 동네사람들은 양비묘(楊妃廟)를 건립했다" 양비묘는 지금까지도 보존되고 있다. 이외에 사료에 따르면 양귀비는 여지를 좋아했다는 것인데, 당시의 영남에는 여지가 나왔다. 그러므로, 양귀비를 영남 용현 사람으로 보는 것은 합당하다.

 

가장 유력한 증거는 <<용주보녕현양비비기(容州保寧縣楊妃碑記)>>이다. 거기에는 "양비는 용주 양충(楊沖) 사람인데, 성에서 십리가 떨어져 있고, 아명이 옥낭(玉娘)이다...개원24년, 당명황이 궁궐로 불러들여서 호를 태진이라 하고 크게 총애를 받는다. 천보년간에 귀비에 책봉된다" 이 내용을 보면, 비록 자료가 완비되어 있을 뿐아니라, 내용도 확실하다. 그리고 작자는 양귀비가 살았던 시대에 아주 가까운 때 살았으므로 신뢰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포주설

 

<<포주부지(蒲州府誌)>> 권3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양비촌(楊妃村)은 뇌수산(雷首山) 독두파(獨頭坡)에 있다. 당나라의 귀비 양씨는 원래 홍농(弘農) 사람이고, 부친 양현염(楊玄琰)은 집이 포주의 독두촌에 있었다. 귀비가 그 곳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입궁한 후, 그녀의 호를 따서 귀비촌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독두파 정당시촌(正唐時村)이 그곳이다"

 

양귀비의 부친은 양현염이다. 그는 비록 대대손손 관직에 있었고, 조상은 진국장군에 봉해진 적이 있지만, 그의 증조부가 죄를 지어 참형을 당하여, 죄인의 자손인 양현염은 겨우 관직이 촉주사호(蜀州司戶)라는 낮은 데 머물렀다. 사료에 따르면, "귀비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를 보면 양현염이 단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어려서 부친을 잃고 고아가 된 양옥환은 숙부인 하남부의 양현교(楊玄)에게 맡겨진다.

 

포주설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는 포주가 아마도 부친인 양현염이 젊어서 유랑하던 때 정착해서 살았던 적이 있는 곳일 수는 있다. 양귀비가 이 곳에서 태어났는지 여부는 좀더 고증이 필요하다.

 

셋째, 화음설

 

<<방지(方誌)>>에 이런 기록이 있다: "당나라 귀비 양씨는 원래 홍농 사람이다" 또 다른 곳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천하의 양씨는 화음에서 나왔다" 화음은 당나라때 홍농군에 속한다. 기원전 514년, 양씨가족의 선조인 양설계숙(羊舌季夙)일가가 기영의 난으로 비밀리에 도망쳐서 화음의 산곡으로 들어간다. 이들은 험난한 산골짜기에서 연명을 한다. 그들은 조상의 성을 버리고, 조상의 봉지인 "양(楊)"을 성으로 삼는다. 복성인 '양설"씨는 그들이 마음 속에 묻어두게 된다. 중국역사상의 양씨는 모두 이 협곡에서 목숨이 살아남은 일족의 후예이다. 지금은 번성하여 칠팔천만명에 이르렀고, 성씨들 중 6번째로 많은 성이 되었다. 이같은 전설적인 이야기는 이미 역사에 의하여 확인되었다.양옥환이 속한 양씨일족은 확실히 화음에서 나왔다. 그러나 화음이 양귀비의 출생지라는 말은 아니다. 기껏해야 조상의 관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