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계진(丁啓陣)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는 당현종의 양귀비에 대한 사랑을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양귀비 생전의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춘소고단일고기(春宵苦短日高起)
종차군왕부조기(從此君王不早期)
승환시연무한가(承歡侍宴無閑暇)
춘종춘유야전야(春從春遊夜專夜)
후궁가려삼천인(後宮佳麗三千人)
삼천총애재일신(三千寵愛在一身)
봄 밤은 왜 이렇게 짧은지 한탄하며, 해가 중천에 떠야 겨우 일어나고
이때부터 황제는 아침 조회(朝會)를 열지 않았네.
총애를 주고 연회를 열어주느라 한가할 틈이 없다
봄이면 봄놀이에, 밤이면 밤놀이에
후궁에 미인이 삼천이나 되지만
삼천에 나눠줄 총애를 한 사람에게만 내리네.
그리고, 양귀비가 죽은 이후에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재천원위비익조(在天願爲比翼鳥)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천장지구유시진(天長地久有時盡)
차한면면무절기(此恨綿綿無絶期)
다시 하늘에 태어난다면 비익조가 되기를
다시 땅에 태어난다면 연리지가 되기를
하늘과 땅이 오래간다고 해도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끝나지 않고 이어지리라.
이를 보면, 당현종은 양귀비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같다.
<<명황잡록>>, <<신당서>>, <<구당서>>등 사서의 기록을 보면, 백거이가 묘사한 내용은 기본적으로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문학적으로 과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구당서>>의 양귀비전에는 양귀비가 얼마나 총애를 받았는지를 별도로 묘사하고 있다: "개원(開元, 연호)이래로, 호족과 귀족들이 흥성했는데, 누구도 양씨와 비견할 수 없었다. 현종이 어디를 놀러가면, 귀비가 따르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말을 탈 때는 고력사가 고삐를 잡아주었다. 궁안에는 귀비원에서 비단을 짜고 수를 놓는 공인들이 있었는데, 700명이나 되었다. 조각하고 만드는 사람이 또 수백명이었다" <<신당서>>의 양귀비전에는 두목(杜牧)의 명구인 "일기홍진비자소, 무인지시여지래(一騎紅塵妃子笑, 無人知是荔枝來)"가 사실임을 입증해준다: "양귀비는 여지를 좋아했다. 반드시 싱싱한 것을 먹고자 했다. 그리하여 말을 타고 운반하여 수천리를 달렸고, 맛이 변하기 전에 이미 경사에 도착했다."
<<명황잡록>>의 기록에 따르면, 양귀비가 죽은 후, 장안에 돌아온 당현종이 하루는 깊은 밤에 근정루에 올라서 옛생각을 하면서 고력사에게 옛사람을 찾아보라고 시켰다. 고력사는 다음날 '홍도(紅桃)'라는 옛날 양귀비의 시녀를 찾아와서 양귀비가 생전에 만든 <<양주사(凉州詞)>>를 부르게 했다. 당현종은 친히 피리를 불어 반주해주었다. 노래가 끝난 후 당현종, 홍도, 고력사는 모두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한번은 화청지로 다시 놀러갔는데, 당현종은 다시 신풍 시장의 여배우 사아만(謝阿蠻)을 찾아오라고 시킨다. 그리고 그녀에게 <<능파곡>>을 춤추게 시킨다. 아만이 춤을 다 추고 나자, 금으로 만든 팔에 두르는 악세사리을 꺼내서는 "이것은 귀비가 나에게 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명황은 수시로 팔악세사리를 꺼내어 보면서 처연하게 눈물을 흘렸다. <<신당서>>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당현종이 성도에서 피난했다가 장안으로 되돌아온 후에, 마외파(馬嵔坡)를 지나갈 때, 환관을 시켜 양귀비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고, 개장(改葬)하도록 시킨다. 그러나, 예부시랑 이규의 반대에 부닥쳐서 그만두게 된다. 부득히 몰래 환관에게 분부하여, 관을 준비해서 양귀비를 이장시킨다. 묘를 파냈을 때, 양귀비가 생전에 사용하던 향주머니가 그대로 있었다. 환관은 그것을 당현종에게 바친다. 당현종은 향주머니를 보고서, 눈물을 비오듯 주룩주룩 흘렸다. 그는 화공을 시켜 궁전에 양귀비의 화상을 그리게 해서는 걸어놓고, 매일 가서 봤다. 매번 갈 때마다 가슴에 메어졌다.
이번에 얘기하고싶은 주제는 "당현종이 양귀비를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왜 그녀를 황후에 책봉하지 않았는가?"라는 것이다.
양귀비는 개원24년(736년)에 당현종의 비(妃)로 들어온 후 금방 총애를 독차지한다. 천보초년에는 귀비에 오른다. 천보15년(756년)에 양귀비는 마외파의 길가에 있는 한 사묘에서 사사된다. 향년38세이다. 계산해보면 양옥환이 당현종의 비로 있었던 기간이 이십여년이다. 귀비로 지냈던 시간만 15년가량이다. 이로써 보면, 당현종이 만일 양귀비를 황후로 삼고자 했다면, 시간은 충분했었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현종의 원래 황후인 왕씨가 폐위되어 서인으로 된 후, 황후의 자리는 계속 비어있었다는 점이다. 왕황후는 무귀비와 총애를 다투다가, 그녀의 오빠인 왕수일이 중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중 명오ㅡㄴ 그를 데리고 북극성에 제사를 지낸 후, "벼락맞은 나무에 천지문과 황제의 이름을 새기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고, 무측천처럼 존귀하게 될 것이라고 하다. 개원12년, 이 일이 발가괸다. 왕황후는 서인이 되고, 오래지 않아 우울하게 죽는다. 왕황후가 죽은 후, 당현종은 무귀비를 황후로 세우고자 했다. 다만, 어사대부 반호례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친다. 반대이유는 주로 일찌기 이당왕조를 시끄럽게 했던 무삼사와 무연수는 모두 무귀비의 먼 아저씨뻘이고, 당현종은 그들과 불공대천의 원수지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당시 태자는 무귀비의 소생이 아니었는데, 무귀비 본인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무귀비가 황후로 책봉되면, 태자의 자리를 다툴 것이 뻔하다. 결과적으로 무귀비는 황후에 오르지 못한다. 그녀가 사십여세로 죽은 이후에 황후라는 명호를 추존받는다. 실제로 양옥환이 양귀비가 되었을 때는 이미 무귀비가 죽은 후이다.
필자가 보기에, 역사문헌을 보면, 당현종이 양귀비를 황후에 책봉하려고 시도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융기(당현종)가 양옥환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은데에는 아마도 아래의 몇 가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첫째, 이융기는 양귀비가 일찌기 자신의 아들인 수왕의 비(壽王妃)였다는 점을 꺼렸을 지도 모른다. 양옥환이 수왕비에서 양귀비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무귀비가 죽은 후 삼천궁녀들 중에서, 이융기의 마음에 드는 여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하들은 당현종에게 이미 수왕비가 된 양옥환을 추천한다. 비록 양귀비는 '변신'을 위하여 억지춘향식으로 비구니가 잠시 되었지만, 그래도 '며느리'였다는 역사기록을 털어버릴 수는 없었다.
둘째, 이융기와 양옥환의 결합은 주로 문예취미측면에서의 의기투합이었다. 이융기는 그녀를 '모의천하(母儀天下)'의 자리에 앉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이융기는 문예애호가였다. 그는 문예공연을 좋아했을 뿐아니라, 여러가지 형식의 문화예술에 정통했다. 그는 음률을 잘 알았고, 작곡을 했고, 피리를 잘 불었다. 모두 프로수준이다. 그는 심지어 수백명의 궁녀들로 활실여자악단인 이원(梨園)을 만들어, 집중적으로 의춘북원에 거주하게 한다. 가무에 능통하고 음률에 밝았던 양귀비는 자주 이원에 가서 그녀의 장기인 비파를 연주했고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여러 왕과 귀족들은 모두 그녀를 스승으로 삼아 비파연주를 배우고자 했다. 당현종이 매번 연회를 베풀고, 온천에 갈 때 양귀비를 데려간 것은 주로 그들은 같은 문화예술취미와 조예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문화예술에서 공동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지음(知音)이라고 할만했다.
셋째, 양귀비가 비록 총명하고 영리하여 황제의 뜻을 잘 맞추었지만, 이융기는 그녀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천보5년과 천보9년, 양귀비는 두번에 걸쳐 당현종에 의하여 궁중에서 쫓겨난다. 축출된 원인은 사서에 명확히 기록하고 있지 않아, 상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당연히 매번 축출될 때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이 많고 사랑에 미친 당현종이 바로 후회하고 그리워한다. 그러면 고력사가 바로 궁중으로 다시 데리고 왔고, 이전과 같이 대우해주었으며, 예전과 마찬가지로 사랑했다. 양귀비는 당현종에게 있어서 그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하는 여인이다. 이런 여인은 연애에 적합하지 결혼에 적합하지는 않다. 귀비에 적합하지 황후에 적합하지는 않다.
넷째, 양귀비는 확실히 낭만적인 기질을 지닌 여인이다. 그녀는 권력에 대한 욕망은 크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는 당현종의 총애에 만족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문화예술에 취미가 있어서 나날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이외에 황후의 명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특별히 영향은 없었다.
다섯째, 당현종은 만년에 비록 여색과 오락에 탐닉했지만, 그래도 두뇌는 맑은 황제였다. 다른 것은 별론으로 하고, 최소한 그는 관직을 아무렇게나 선물로 주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부마, 공신인 장열의 아들인 장자는 재상의 지위를 아주 탐했다. 그러나, 당현종은 그를 가볍게 재상에 임명하지 않았다. 한번은 한 예인(藝人)이 공연을 아주 뛰어나게 잘 했다. 그리하여 당현종의 호감을 산다. 그러나 고력사를 통하여 관직을 얻고자 하자, 당현종은 그에게 관직을 주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죽여버린다. 이로써 추측해보면, 황후의 명분을 그는 상당히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귀비에 대하여 그는 아직 그녀가 해달라는 것은 다해줄 정도로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양귀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귀비와 안록산의 사통설 (0) | 2010.11.24 |
---|---|
양귀비의 고향은 어디인가? (0) | 2010.06.08 |
뚱뚱한 양귀비가 총애를 받은 이유는? (0) | 2008.06.23 |
양귀비(楊貴妃)의 죽음에 얽힌 몇 가지 의문점 (0) | 2006.12.12 |
양귀비(楊貴妃)를 황후(皇后)에 봉하지 않은 이유는? (0) | 2006.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