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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양귀비)

뚱뚱한 양귀비가 총애를 받은 이유는?

by 중은우시 2008. 6. 23.

글: 사천재선(四川在線)

 

당나라 사람은 "풍비농려, 열렬방자(豊肥濃麗, 熱烈放姿)"라고 하여 풍만함을 아름답게 여겼다는 것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다. 당나라의 최고미인인 양귀비의 몸매는 풍만했었다. 야사에 따라 고증한 바에 의하면, 양귀비는 키가 164센티미터 몸무게가 69킬로그램이라고 한다.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 양귀비의 키는 160센티미터이고 몸무게는 60킬로그램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대체 양귀비가 얼마나 풍만했는지는 지금단계로서는 더 이상 알 방법이 없다. 그저 당나라때의 시사, 서화, 조각, 도용등 각종 예술작품에서 약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당나라때 화가가 그린 "귀비출욕도(貴妃出浴圖)"에서 후세인들은 개략적인 이미지를 캐치할 수 있다.

 

"환비연수(環肥燕瘦)"라는 고사성어의 기원도 양귀비는 뚱뚱하고, 조비연은 날씬하다는 것으로, 양귀비와 관련된다. 당현종의 귀비인 양옥환은 몸매가 풍만했고, 한성제의 황후인 조비연은 몸매가 날씬했다는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두 미인을 뚱뚱함과 날씬함으로 비교한 것은 소동파에게서 비롯되는데, 그는 서예의 글씨가 굵고 가는 것이 각각의 장점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양옥환과 조비연을 비교한 것이다. 소동파의 <<손신로구묵묘언시(孫莘老求墨妙言詩)>>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두릉평서귀수경(杜陵評書貴瘦硬)

차론미공오불빙(此論未公吾不憑)

단장비수각유태(短長肥瘦各有態)

옥환비수수감증(玉環飛瘦誰敢憎)

 

두릉은 서예를 평하면서 가늘고 강한 것을 귀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공인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따를 수 없다.

길고 짧고 풍만하고 날씬한 것은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다.

옥환이 풍만하고 비연이 날씬했지만 누가 그녀들을 싫어하겠는가?

 

미인이 풍만하고 날씬한 것은 원래 서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지만, 소동파 선생은 이것을 함께 엮어서 설명하고 있으니, 무슨 목적에서 그러했는지는 모르겠다. 이후 "환비연수"라는 고사성어가 널리 퍼지게 된다. 그러나, 점점 서예와는 관련이 없고, 점점 변해가서 원래의 뜻 그대로 그저 미녀의 몸매를 평하는 말로만 남게 된다.

 

백거이의 <<장한가>>에서는 양귀비가 뚱뚱했는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는 문구는 없다. 다만, "운천수활세응지(溫泉水滑洗凝脂)"라는 문구를 보면, 날씬한 여자의 몸을 '응지(凝脂)'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 풍만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방(周昉)의 유명한 "잠화사녀(簪花仕女)"는 "당나라여자의 부호"라고 불리는데, 당나라여인의 튼튼함과 풍성함을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것은 마치 활짝 핀 꽃과도 같이, 선명하고 풍부하게 무수한 당나라사람들의 눈에 익게 하였다. 그리고, 당나라때는 여인뿐아니라, 남자들도 뚱뚱해야 했다. 양귀비의 양자인 안록산도 그 중의 한 명이다. <<구당서. 안록산전>>에 따르면, "녹산은 만년에 더욱 뚱뚱해졌다. 뱃살이 무릎아래까지 늘어졌고, 몸무게가 330근(165킬로그램)에 이르렀다....현종의 앞에서 호접무를 출 때는 빠르기가 바람과 같았다." 330근이나 나가면서도 호접무는 바람처럼 가볍게 추었다니 정말 불가사의하다. 더욱 의문인 것은, 당나라인들이 왜 뚱뚱한 것을 아름답게 생각했고, 양귀비는 뚱뚱하면서도 총애를 받았느냐는 점이다.

 

당나라는 부유한 시대였다. 두보의 시에 따르면, "쌀과 조가 풍성했고, 공사의 창고안이 모두 가득 찬" 시대였다. 국가는 번영하고 창성했으며, 사람들은 먹고 입을 것이 풍부했다. 대부분은 뱃살을 내놓고 맛있는 것을 마음것 먹어제꼈다. 그리하여 몸매가 뚱뚱하게 될 수 있는 외재적인 조건은 갖추어 졌다.

 

"환비"의 아름다움은 성당(盛唐)때 흥성하며, 북방에서 일어난다. 당나라의 개국황제인 이연의 외조부는 선비의 대귀족인 독고씨이다. 이당황실에는 선비족의 피가 흘렀다. 이당황실은 선비유목부락의 관농군사집단에서 일어나 중원의 주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유목생활의 일부 습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모란을 좋아하고, 엉덩이가 뚱뚱한 말을 좋아하여, 풍성하고 강건한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선비족의 유목생활에서 필요한 것은 강건하고 튼튼한 몸이었다. 풍만한 양귀비가 총애를 받은 것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나라사람들은 자신감이 넘쳤고, 걱정거리가 없었따. 당시의 당나라는 아주 개방적인 나라였다. 130여개 국가와 교류를 했다. 당나라의 장안성은 웅장한 도성이었고, 당시 세계최대의 도시였으며, 동방문명의 중심지였고, 수천수만의 세계각국의 상인과 여행가, 학자 그리고 서로 다른 종교인들을 불러들였다. 페르시아는 당나라와 관계가 밀접했는데, 당나라 장안성에는 페르시아인들이 대량으로 거주했다.

 

서역인들이 대량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장안성의 생활방식도 변화한다. '오랑캐'를 본받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예를 들어 옷에 있어서, 장안은 서역의 영향을 깊이 받는다. 멀리는 페르시아, Tohharistan(吐火羅, 지금의 아프간), 가까이는 투르크, 토곡혼(吐谷渾)과 토번이 모두 당나라가 모방하는 대상이었다. 서역인들은 덩치도 큰 것이 일반적이므로 당나라에서 '풍만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풍습이 나타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