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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양귀비)

양귀비(楊貴妃)의 죽음에 얽힌 몇 가지 의문점

by 중은우시 2006. 12. 12.

756, 안사의 난의 폭발했다. 일대의 절세미인 양귀비는 마외파(馬嵬坡)에서 생을 마쳤다. 2년후 양귀비의 묘를 팠는데, 양귀비의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설마 양귀비가 마외파에서 죽었다가 살아났단 말인가?

 

미스터리 1 양귀비유체에 대한 신당서와 구당서의 기재가 다르다. 신당서에서는 향주머니만 남았다고 쓰고 있다.

 

756, 기세가 대단했던 안사의 난은 대당왕조의 멸망을 재촉했다. 반군이 장안을 공격하자, 당현종은 야반도주를 했다. 다음 날, 도망하는 인원들이 섬서성 경내의 마외파에 이르렀을 때, 따르던 장병들이 돌연 반기를 들고, 재상 양국충은 난중에 사망했다. 그 후, 그들은 창끝을 양국충의 누나 양귀비에게 겨누었다.

 

바로 이해 여름의 어느 밤에, 몇몇 신비인물이 마외파에 나타났다. 그들은 몰래 양귀비의 묘를 파헤쳤다. 그들은 도대체 뭘 찾고 있는 것일까?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당현종이 장안에 돌아온 후에 비밀리에 환관들에게 명하여 양귀비를 개장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개장하러간 사람들은 양귀비의 유체를 보지 못했다고 보고한다. 그저 양귀비가 생전에 가지고 다니던 향낭(香囊, 향주머니)만 가지고 왔다.

 

이 신비한 묘발굴사건에 대하여 신당서와 구당서는 서로 달리 기록하고 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살은 이미 썪고, 향주머니만 남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에는 향주머니만 남았다고 적고 있다. 신구당서는 왜 서로 다른가? 양귀비의 유체는 도굴범들이 도굴해 갔는가?

 

그러나, 이런 설이 성립되기는 아주 힘들다. 위급한 시기에 민간인들이 양귀비를 묻은 곳을 쉽게 발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도굴범이라면 향주머니를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구당서의 어느 기재가 정확할까? 구당서는 당나라때 이미 기록된 것이고, 신당서는 송나라때 사람들이 구당서에 근거하여 편찬한 것이다. 이치대로라면 구당서가 더욱 믿을만하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신당서에서 살은 이미 썩고라는 것과 같은 중요한 부분을 빠뜨릴 리는 없는 것이다.

 

중국인민대학 역사학과의 유후빈 교수는 당현종 본인의 각도에서 보면, 그는 대외적으로 양귀비가 이미 죽었다고 선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렇게 기록하면,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주게 된다. 송나라 사람들은 신당서를 편찬할 때, 아예 시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일을 회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스터리 2 : 사천 도강언에서 발굴된 여인의 관. 단 묘주인의 신분은 확정하기 어렵다.

 

1000여년후의 오늘날, 법문사 박물관 안에는 아주 전기적인 색채를 띈 향낭이 있다. 이 향낭을 고대에는 향구(香球)라고 불렀다. 박물관장은 향낭안에는 두 개의 지평환(持平環)이 있고, 안에는 작은 사발이 있어 어떻게 움직이던 사발은 항상 지면과 평행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리 하여 안에 있는 향료가 쏟아지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마외진에는 다시 쌓은 양귀비묘가 있을 뿐아니라 양귀비의 상까지 있다. 지금 묘는 3미터 정도인데, 외형은 푸른벽돌로 빡빡하게 둘러싸고 있다. 원래의 양귀비묘는 이렇게 벽돌로 둘러싼 모양이 아니었다. 이런 의문에 대하여 해답을 얻기도 전에, 사천의 도강언에 있는 홍매촌에서 천년고묘의 기이한 소문이 돌았다. 전설에 따르면, 이 마을의 뒷산 자락에는 천년고묘가 있는데 바로 양귀비의 묘라는 것이다.

 

촌민들의 말에 따르면, 일찍이 여기의 묘비에는 양()자가 새겨져 있었고, 이름은 새겨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천년역사를 지닌 암묘(暗墓, 몰래 매장한 묘)이다. 이 묘비는 문화대혁명때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 묘지에는 농사를 짓고 있는데, 파괴된 제단의 푸른 벽돌만 남아 있다.

 

1997, 시와 홍매촌은 공동으로 묘에 대하여 발굴을 진행하였다. 관목은 겨우 1.7미터였고, 넓이는 45센티미터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여인의 관목이다. 그러나, 묘주인의 신분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미스터리 3: 일본민간에는 양귀비가 일본으로 도망쳤다는 소문이 있다. <<장한가>>에도 암시되어 있다.

 

2002, 일본의 영화배우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惠)는 그녀가 양귀비의 후손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에 중국인들은 모두 놀라마지 않았다. 양귀비의 후예가 어찌 일본으로 가 있단 말인가? 사실 1920년대에 유명한 홍학가인 유평백 선생은 <<장한가>>의 글에서 양귀비가 아마도 마외파에서 죽지 않았을 수 있고, 일본으로 건너갔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지금의 일본연해에는 구진(久津)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는 양귀비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양귀비는 마외파의 병변시에 시녀를 대신 죽게 하고, 양귀비는 견당사의 도움으로 배를 타고 당나라를 떠나 기나긴 항해를 거쳐 일본 야마구치현의 구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구백혜는 바로 야마쿠치가족의 일원이다.

 

일본 남국박의 <<양귀비외전>>과 도변용책의 <<양귀비부활비사>>에도 양귀비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양귀비는 정말 일본으로 갔는가? 저명한 비교문학가인 엄숭도는 이것은 백거이의 <<장한가>>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백거이는 시의 후반부에서 양귀비에 대한 일종의 상상을 묘사했는데, 양귀비가 사변중에 사람은 이미 죽었으나, 그녀의 영혼은 신선이 사는 산 위에 있다고 하였으며, 나중에 당현종이 보낸 도사가 신선이 사는 산 위에서 서로 만났다고 적고 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장한가>>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사람들은 장한가의 싯구를 분석하면서, 마외파하니토중, 불견옥안공사처(馬嵔坡下泥土中 不見玉顔空死處)라는 싯구가 있다. 대체로 마외파 아래의 진흙 속에는 미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죽은 곳이 비어있다는 정도의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마외파에서는 양귀비의 사체를 찾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다. 그런데, 이후 당현종이 파견한 도사가 양귀비를 찾고,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황천에 가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도사가 신선이 사는 산위에서 양귀비를 찾는다. 만일 도사가 정말 신선이 사는 산 위에서 양귀비를 찾았다면 여기에서 쓰고 있는 신선이 사는 산 봉래선산은 어디란 말인가? 일본의 문학작품에서 그들은 일본을 자주 봉래산이라고 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