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어느 익명의 블로거가 쓴 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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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중에 나치독일의 박해를 받아 유대민족이 거의 소멸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유대인에게는 문을 꼭 걸어잠그고 있을 때, 거의 유일하게 중국의 상해가 조그만 문을 열여주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순식간에 유대인 5만여명이 상해로 몰려왔다. 상해는 당시 히틀러가 누구인지도 잘 몰랐고, 그저 상해는 개방된 도시이고, 누구든지 비자없이도 상해를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2차대전후 대부분의 유대인은 중국을 떠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이스라엘로 가서 이스라엘 건국에 참여하였다.
상해가 일본군에 함락되었을 때, 일본군은 유대인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유대인이 밀집된 두개의 골목의 출입구에 철문을 만들고 거의 1년간 출입을 못하게 막았다. 그러자, 주변의 상해 사람들은 이들을 동정하여 먹을 것들을 던져넣어주었고, 1년후 약 2천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기적적으로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유대인들이 상해에 피난왔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이를 교과서에도 기재하고 기념비까지 세워놓고 있다. "중국인. 우리는 당신들의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이스라엘은 계속하여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관계를 기다려왔다. 40여년동안 대만과는 아무런 외교관계도 맺지 않았다.
1976년 중국의 당산대지진때 이스라엘은 제일 먼저 중국에 1억달러를 기증할 것을 선언하였다. 최근의 미국, 일본의 지진때에도 이스라엘이 기증하였지만 그 수준은 십만달러, 이십만달러수준이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중국에 대하여 이 정도로 많은 금액을 기증하였던 것이다.
냉전시기에 파리선언으로 민감한 기술은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철의 장막이었다. 그러나 틈이 없었을까? 중국의 군용전투기나 잠수함은 이스라엘의 그것과 매우 닮았다. 왜 그럴까?
방탄복을 예로 들면, 80년대에 이스라엘은 먼저 방직섬유방탄복을 만들었다. 그 당시 중국은 강철판을 덧댄 방탄복 수준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군용기술이고 민감한 것이므로 중국이 취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매우 필요로 하는 기술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중국이 "자체개발"로 방직섬유방탄복을 만들어낸 것이다.
얼마전, 중국이 이스라엘에 조기경보기 4대를 주문한 적이 있다. 후에 미국 국내의 반중세력의 방해로 인하여 계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때 중국으로부터 2.5억달러의 계약금을 받았던 이스라엘은 사람을 보내어 계약을 취소하면서 3.5억달러를 배상하였다. 이것으로 끝났는가? 그렇지 않았다. 3년이 지나지 않아, 중국은 "자체개발"로 조기경보기를 개발완성하고, 중국공군이 현재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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