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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왕홍성(王洪成) : 물로 석유만들기

by 중은우시 2006. 11. 20.

왕홍선(王洪先) : 동북 사람. 부친은 양식창고의 퇴직노동자. 모친은 무직. 조손삼대에 학자는 없음. 왕홍선은 초등학교 4년을 다님. 2번 퇴학. 이후 교육을 받은 바 없음. 돼지를 기른 적이 있고, 목공일도 배운 적이 있으며, 군대도 갔음. 하얼빈공공버스회사의 운전기사였음.

 

1992년 8월 3일 "왕홍선이 발명한 팽화연료는 에너지가 부족한 상황을 개선하는데 중대한 공헌을 할 것이다. 최근 북경시자동차연구소, 중국자동차품질북경감독검사소는 팽화연료를 자동차에 사용하는데 대하여 실험을 했다. 측정에 따르면, 자동차는 시속 40킬로미터로 달렸고, 100킬로미터의 연료소모량은 7.06리터였다. 석유절감율이 44.84%에 달한다. 국가의 관련부문은 전국적으로 세계적으로 선진적인 신제품을 널리 보급할 예정이다."

 

전 물자부 연료사의 부사장인 엄곡량의 소개에 따르면, 1984년부터 왕홍선은 그의 소위 "수변유(水變油, 물로 만든 석유)"의 발병을 추진했다. 유일한 증거는 그가 즉흥적으로 시연한 것이었다. 왕홍선의 시연은 엄격한 과학적 조건하에서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 시연은 왕이 말하는 것으로 그만이었고, 즉흥적이었고, 눈으로 한번 보는 것이 끝이었다.

 

1984년초, 흑룡강성의 한 부성장이 왕홍선에게 연락하여 측정시험을 하여 수변유가 가능한지 알아보자고 했으나, 왕은 응하지 않았다.

 

1985년 겨울, 왕홍선은 대경에서 북경, 합구, 절강, 상해등지를 다니며 시연했다. 1986년 겨울, 국가계획위원회의 한 상무부주임은 중앙지도자의 위임을 받아 이 건을 처리했다. 왕홍선의 요구에 따라 1차로 60만위안을 주었고, 왕홍선에게 고급차량도 지원했다. 1987년 6월, 왕홍선은 다시 국가계획위원회의 그 지도자와 협의하여, 관직, 명문, 돈을 요구했다. 보고를 거쳐 왕홍선을 위하여 국가신에너지개발국(차관급)을 설치하고 왕홍선을 국장에 임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파격적으로 왕홍선을 위해서 발명증서와 특허증서를 신속히 발급해 주었다.

 

1987년이후 왕은 국가계획위원회의 책임자, 북경군구와 두 번에 걸쳐 협의서를 작성했으나, 집행되지 않았다. 1987년, 국가계획위원회는 왕홍선의 요구에 따라, 60만위안을 들여, 하북 정부 승리객차공장에서 왕홍선의 연료를 생산하고자 하였다. 생산라인이 절반정도 건설되었을 때, 왕홍선은 돈을 가지고 도망쳤고, 하얼빈에 두 채의 주택을 구입했다. 그리고, 공장내의 차량을 가지고 갔다.

 

1992년, 국방과공위원회 원망공사는 왕홍선과 합작하고자 하였다. 왕은 회사에 직위와 군복을 요구하고,공작증에 "연구원"이라는 직함을 쓰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원망공사는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왕홍선은 사회에서 고급장교로 행세하고, 국방과공위의 고급연구원이라고 행세하고 다녔다.

 

1995년 41명의 과학기술계의 정협위원이 연명으로 "수변유"에 대한 투자상황과 경제건설에 대한 파괴적인 결과에 대하여 보고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로써 수변유 신화는 끝이 났고, 수변유로 인한 직접적인 경제손실은 4억위안에 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왕홍선이 사기를 친 방식은 간단했다. 첫째, 시연, 둘째, 자금요청, 셋째, 생산라인건설직전에 도망치는 것이었다.

 

이처럼 황당하고 말도 안되는 사기극에 대하여 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믿고, 거액의 돈을 투자한 것일까? 왕홍성이 성공한 데에는 일부 천진한 과학자들의 도움도 있었다. 사실은 그들도 피해자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과학자들을 믿고, 과학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왕홍선을 옹호했으므로 그의 사기성은 더욱 컸던 것이다. 하얼빈공과대학은 여기에서 자랑스럽지 못한 역할을 맡았다. 하얼빈공과대학은 수변유에 대한 감정회를 가지고, 감정에 참가한 것은 하얼빈공과대학과 길림대학의 교수들이었다. 하얼빈공과대학의 총장 겸 서기는 두번에 걸쳐 중앙지도자에게 서신을 보내어 수변유가 믿을만하다고 주장했고, 중앙지도자들이 이 건을 중시할 것을 요청했다. 이 서신은 과학위원회로 넘겨졌고, 과학위원회는 이전에 왕홍성이 감정을 거절한 일을 들어, 다시 거론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답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