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무술

곽원갑(霍元甲) : 정무문의 창시자

중은우시 2006. 1. 23.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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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원갑(1868-1910)

 

자는 준경(俊卿), 조상의 적은 하북성 동광안락둔이다. 대대로 천진 정해 소남하촌에 거주하였고, 정무체육회(精武體育會)를 창시하였이며, 근대에 저명한 무술가이다.

 

곽원갑이 어릴 때는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부친인 곽은제(霍恩第)는 당시 이름을 날리던 비종권(秘宗拳)의 대가였다. 그는 곽원갑이 무술을 익히면 후에 곽씨 집안의 명성에 누를 끼칠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게는 무예를 전수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곽원갑은 스스로 뜻을 세워, 매일 부친이 형제들에게 무예를 전수해줄 때 눈여겨 보고는, 집밖의 대추나무숲에 숨어서 혼자 열심히 수련했다. 나중에 부친이 이를 알고는 그를 벌했다. 곽원갑은 부친에게 절대 다른 사람들과 비무를 하지 않고, 곽가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고나서야 겨우 다른 형제들과 같이 무술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런데, 곽원갑은 자질이 뛰어나고 총명하며, 의지력도 남달랐다. 무술에서 발전이 빨라 형제들중에도 독보적이었다. 부친은 이러한 상황을 보고는 예전의 생각을 바꾸어 그에게도 무예의 정수를 전수해준다. 나중에 곽원갑은 무술을 통해 친구를 사귀고, 여러 무술가문의 장점을 잘 모아서, 조상으로부터 전해지던 곽씨집안의 "비종권(秘宗拳)"을 "미종예(迷宗藝)"로 발전시켰다. 이리하여 곽씨집안에 대대로 전해져오던 권법은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광서 22년 (1896년), 산동의 큰 협객인 유진성(劉振聲)이 그의 명성을 듣고 천진까지 찾아와서, 곽원갑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곽원갑은 그의 사람됨이 정직한 것을 보고 제자로 거두었다. 이에 따라 곽가권은 "집안에서만 전하고 집밖으로는 전하지 않는다"는 선례를 깨진다. 곽원갑은 의협심이 강한 편이었다. 광서 24년(1898년), 담사동(潭嗣同)이 변법에 실패하여 죽고, 대도왕오(大刀王五, 왕자빈)가 난을 피해 천진으로 왔다. 곽원갑과는 만나자마자 바로 친구가 되었다. 나중에 왕자빈이 북경에서 붙잡혀, 팔국연합군에 의하여 효수되었다. 곽원갑은 유진성과 함께 몰래 북경성에 들어가 수급을 훔쳐온다. 그리고 <<노잔유기>>의 작자인 유악의 도움을 받아 대도왕오의 몸과 머리를 합해서 묻어줌으로써 친구의 의리를 다하였다.

 

선통원년(1909년) 영국의 대역사(大力士) 오브라이언(O'Brian)이 상해에서 광고를 내어 중국을 '동아병부(東亞病夫, 동아시아의 병든 늙은이)"라고 모욕했다. 곽원갑은 친구들의 초청을 받아 상해로 가서 비무를 청하였다. 상대방은 곽원갑의 권법이 무서운 것을 알고, 만금을 서로 내어 비무의 보증금으로 하자고 하였다. 곽원갑은 친구들의 지원으로 만금을 내어 보증금을 걸었다. 그래도 상대방이 계속 질질끌며 비무를 지연하자, 곽원갑은 신문에 광고를 내었다. "세상은 우리나라를 병든 늙은이 나라라고 비웃고 있다. 나는 병든 늙은이 나라의 한 병든 늙은이이다. 천하의 건장한 자들과 싸워보고 싶다". 상대방은 감히 싸우지 못하고 도망쳤다.

 

1910년 6월 1일, 곽원갑은 무술계의 친구들의 도움하에 상해에서 "중국정무체조회(후에 정무체육회로 개명)"를 창건한다. 손중산 선생도 곽원갑을 찬양하여 "만일 국가를 강하게 하고자 한다면, 사람마다 무술을 익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신념과 곽가권을 세상에 전한 높은 뜻을 찬영하면서 친필로 "상무정신(尙武精神)"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정무체육회에 내려준다. 1910년 9월, 일본유도회 회장이 10여명의 고수를 데리고 와서 곽원갑과 대련하나, 곽원갑에게 패하고 만다. 일본인은 대련후 술을 대접하는 과정에서, 곽원갑이 기침을 하는 것을 보고는 일본의사를 모셔와서 치료해주게 한다. 곽원갑은 일생을 정직하게 지냈으나, 부지불식간에 중독되어 9월 14일 사망하니, 향년 42세이다.

 

나중에 상해정무회는 곽원갑의 동생인 원경(元卿), 둘째아들 동각(東閣)이 물려받는다. 각지의 분회가 계속 만들어지고 십수년 후에는 중국내외에 정무분회가 43곳에 이르고, 회원은 40만을 넘어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