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무술

증손 곽자정(霍自正)이 말하는 곽원갑(霍元甲)의 진상

중은우시 2006. 3. 5. 00:03

진상1. 곽원갑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니다.

 

영화속에서, 곽원갑이 태어난 집은 현재에서 돈과 권세가 있는 집안이었고, 부친은 무술이 뛰어나고 많은 제자를 거느린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곽자정은 "곽원갑은 사실 단지 아주 보통의 농민이었다. 집안에 돈도 별로 없었다." 곽자정에 의하면 곽원갑은 농사에 바쁠 때면 집에서 농사를 짓고, 농사일이 없을 때면 천진성내에 가서 물건을 팔았다.

 

곽원갑은 각행(脚行, 운반공들의 조직)에서 관사를 맡은 적이 있고, 나중에는 친한 친구인 농경손(農勁蓀)의 약잔(藥棧)에서 일을 했다. 농경손은 혁명가였고, 암중에 북방에서 손중산(손문)을 위하여 인재들을 모았고, 자주 각지를 돌아다녔다. 약잔의 일은 대부분 곽원갑이 처리했다. 곽원갑은 이로 인하여 천진성내에 주로 머물게 되었으며, 나중에 상해로 가서 비무를 준비하고 정무회를 열때까지 그러했다. 곽원갑은 1910년에 죽었는데, 10년후에 손중산은 곽원갑의 무관에 글을 써주었고, 이로써 중국무술의 선구자를 추도하였다.

 

진상 2. 곽원갑은 단지 서방 대역사를 쫓아보냈을 뿐이다.

 

영화에서, 곽원갑은 혼자서 사개국의 대역사들과 싸워서 세번을 이기고 마지막 싸움에서 독에 중독되어 죽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의 곽원갑은 이런 적이 없고, 단지 명성으로 두 명의 천하무적이라던 서방 대역사를 도망치게 만들었을 뿐이다.

 

천진에 있을 때, 곽원갑의 쿵후는 뛰어났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었다. 누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들고 일어나 도와주곤 하여, 천진에서는 유명해졌다. 당시에 러시아의 대역사인 스치판로프가 천진에서 무대를 만들어 비무를 하며, 스스로 세계제일의 대역사라고 하였다. 곽원갑은 이를 듣고, 그와 비무를 하고자 하였다. 사치판로프는 곽원갑의 내력을 알아내고는 "내일보자"고 하였다.

 

그러나 사치판로프는 자신이 없어, 통역을 통하여 곽원갑의 내력을 알아보았다. 통역은 그에게 곽원갑이 천진에서 매우 유명하고 쿵후가 아주 뛰어나다고 하였다. 그리고 통역은 그에게 가능하면 안싸우는게 좋을 것이고, 싸우면 질 것이라고 얘기해주었다.

 

다음 날 비무를 할 때, 사치판로프는 부득이 사정을 했다. 그는 "나는 단지 천진에 와서 장사나 하고 입에 풀칠이나 하려고 한 것이니, 내가 한 말에 신경쓰지 말라고 하였다" 곽원갑은 그에게 신문에 스스로 잘못했다고 실으라고 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싸우자고 하였다. 스치판로프는 할수없이 동의하였다. 그러나 신문에 사죄광고를 내지는 않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스치판로프는 천진을 떠났다.

 

나중에, 영국의 대역사인 오피인이 또 상해에서 무대를 만들고 중국인은 "동아병부(東亞病夫, 동아시아의 병든 환자)", 상해사람들은 매우 불쾌해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무대위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농경손은 상해의 유명인사인 진기미(陳其美)를 통하여 곽원갑을 추천하여 비무를 하도록 주선하였다. 곽원갑이 상해로 오자, 오비인은 이미 다른 나라로 가버렸고, 몇 달이 지나서 다시 돌아왔다.

 

오비인은 주위사람들에게 곽원갑의 내력을 알아보고는 상대방이 천진에서 왔으며, 천진에서 매우 유명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감히 여기까지 와서 싸우고자 하는 자라면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비인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계약서에 이미 사인은 했고, 경기도 이미 공고되었다. 많은 사람이 상해로 와서 그들의 비무를 보려고 했다. 어떡할 것인가? 그는 아이디어를 내서, 곽원갑에게 말하였다. 서방의 비무는 중국과는 다르다며 단지 주먹만을 쓰고, 발이나 다리는 써서는 안된다는 등 여러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곽원갑이 쿵후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곽원갑은 두번도 생각하지 않고 모두 동의하였다. 그리고, 오비인과 비무일자에 합의하였다. 날이 되자, 오비인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도망치고 없었다.

 

곽자정의 회고에 따르면, 곽원갑은 이 일로 천진을 떠나 상해로 갔고, 다시는 천진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진상 3. 곽원갑은 일본인이 넣은 폐병약에 의해 죽었다.

 

각종의 이야기중에서, 곽원갑은 모두 일본인에 의하여 독살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인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어 영화 곽원갑에서는 곽원갑이 일본무사 다나까와 제2차 비무를 하기 전에 독을 먹였고, 이로 인하여 비무대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곽자정에 따르면, 당시 곽원갑은 상해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현지의 유명인사들의 자금지원으로 정무체조학교(나중에 정무체육회로 고침)를 열었다.

 

당시 상해 홍구구에는 일본인의 유도협회가 있었는데, 거기의 사람들은 곽원갑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를 찾아 비무를 했다. 그들은 10명의 고수를 보냈는데, 결과적으로 곽원갑과 그의 제자에게 패하였다. 마지막으로 유도협회의 두목이 곽원갑과 싸웠는데, 곽원갑을 암산하려고 하였으나, 곽원갑은 알아차렸고, 거꾸로 곽원갑에 의하여 팔이 부러졌다.

 

일본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못했고, 다시 책략을 바꿨다. 표면적으로는 곽원갑과 잘 지냈다. 곽원갑은 원래 호쾌한 사람이었으며 단지 "무로서 친구를 사귀려는" 생각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인의 간계에 당하였다는 것이다. 즉, 그가 기침을 하는 것을 본 일본인들이 일본인 의사를 통하여 폐병약을 곽원갑에게 보냈는데, 곽원갑은 그 약을 먹고 악화되어 죽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