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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무술

태극권(太極拳)은 누가 만들었는가

by 중은우시 2005. 8. 7.


                장삼풍의 화상

 

태극권은 현재 중국에서 매우 유행하고 있고, 청나라초에서 지금까지 이미 3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 신해혁명을 전후해서 태극권의 명가들은 북경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질병치료, 보건, 수명연장등의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북경에는 수십종의 태극권이 유행하였다. 태극권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 14세기의 원말청초의 무당산도사 장삼풍(張三豊)이라는 설.

 

장삼풍은 의주(懿州, 현재의 호남성 지강현) 출신이다. 이름은 전(全) 또는 군보(君寶)이다. 원말명초의 도교의 지도자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찌기 호북의 태화산(즉 무당산)에서 수행하였다. <<명사>>와 <<태화산지>>에서는 장상풍의 권술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그런데, 1723년 선서의 원통도인 왕석령이 편찬한 <<삼봉전서>>의 원고와 1844년 장을산인 이함허가 편찬하여 출판한 <<삼봉전서>>안에는 그들이 비록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14세기의 장삼풍을 보았다고는 하였지만, 장삼풍이 권술을 하였다거나 태극권을 만들었다까지 날조하지는 않았다. 태극권의 창시자가 장삼풍이라는 황당한 얘기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태극권이 북경에서 이름을 날릴 때 나타났다. 장삼풍이 태극권의 창시자라는 것은 허구이지만, 장삼풍이 매우 이름있는 도사였다는 것은 <<명사>>중의 호영전, 정화전, 요광효전과 방기전에 나오는 장삼풍의 행적을 봐도 알 수 있다.

 

장삼풍이 태극권을 창시하였다는 설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21년 북경판 허우생의 <<태극권세도해>>라는 책이다. 허우생은 무술을 제창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고, 양가태극권과 진가태극권을 모두 익혔다. 책에서 기록한 <<태극권경>>의 편말에 단 주석에서 "이것은 삼풍선생의 입실제자인 왕군종악이 만든 것이다"라고 하여 장삼풍이 태극권을 창시하고, 왕종악이 장삼풍의 제자라고 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 이렇게 언급된 후 많은 태극권에 관한 서적에서 태극권은 장삼풍이 창시하였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삼풍은 원말명초 사람이고, 왕종악은 청나라 초기의 사람이며, 두 사람 사이에는 수백년의 차이가 있으므로 도저히 스승과 입실제자라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

 

둘째, 12세기 송휘종시대(1101-1126)의 무당도사 장삼봉(張三峰)

 

청나라 강희8년(1669년) 황여주가 지은 <<왕정남묘지명>>에서 "소림은 권법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으나, 주로 사람과 싸우는 것이다.... 내가라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움직이는 것을 제압하는 것으로...송나라 장삼풍에서 기원한다. 삼봉은 무당단사인데, 휘종이 그를 불렀으나, 도사는 궁으로 가지 않고, 밤에 꿈에서 원제에게 권법을 전수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송나라때의 장삼봉이 무술을 할 줄 알았다는 것은 역사상 아무런 근거가 없다. 밤에 원제에게 권법을 전수하였다는 것도 황당스럽다. 청나라 강희 15년 (1676년) 여주의 아들이 백가가 그 스승인 왕정남으로부터 전수받은 내가권에 대하여 <<내가권법>>을 글로 쓰면서, 다시 장삼봉이 소림무술도 익혔다는 설을 내세웠다. "외가의 소림은 그 기술이 정교하다. 장삼봉은 소림에도 정통하였으며, 이를 다시 뒤집어서 내가라고 하였다" <<영파부지>>는 황씨의 설을 이어받았다. 중화민국시대가 되면서 장삼봉이나 장삼풍이 권법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이미 많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의 장삼봉이 내가권에 의하여 조사로 모셔져있기는 했으나, 황씨부자가 이미 장삼봉이 창시한 것은 내가권임을 명확히 하였으므로, 태극권서에서는 송나라의 장삼봉이 태극권을 창시하였다는 설을 포기하였고, 원말명초의 무당산 장삼풍도사를 태극권의 창조인으로 하였던 것이다.

 

셋째, 8세기 중엽의 당나라 서선평(徐宣平)

 

어떤 사람은 태극권은 당나라때의 서선평이 창시한 것이라고 한다. <<팔자가>>, <<심회론>>, <<주신대용론>>, <<16관요론>>, <<공용가>>등이 모두 서선평의 저작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글의 문장의 품격을 놓고 보면, 이것들은 절대 당나라때의 글이라고 볼 수는 없다. 송나라때의 계유공의 <<당시기사본말>>에서 나타난 서선평의 행적을 보면 "곡식을 피하고 먹지 않으며, 걸음은 달리는 말과 같았다. 당나라 때 장작을 가져다 시장에서 팔았다" 대시인 이백이 만나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망선교에서 시를 지은 적도 있다. 이로 인하여, 창시인을 보다 먼 시대에서 찾으려는 청말의 봉건문인들에 의하여 꾸며낸 일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넷째, 청나라 건륭시대의 왕종악(王宗岳)을 내가권가인 관중 왕종(王宗)이라고 하는 설

 

왕종은 명초 내가권의 전수자이나, 그는 관중(섬서) 사람이다. 그러나 왕종악은 산서사람이다. 이 설의 의도는 태극권이 내가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고, 명나라초부터 전수되어 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은 진가태극권은 장발에게서 전수받았는데, 장발은 왕종악에서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이 설의 기원은 하북 영년에 사는 이역서(1832-1892)의 <<태극권소서>>이다. 왕종악은 1791년에 낙양에, 1795년에는 개봉에서 관을 열고 글을 가르쳤다. 이 때, 온현 진가구의 진장흥(1771-1853)의 윗대 태극권가들이 흥성하던 시기였다. 온현과 낙양, 개봉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므로 왕종악의 태극권이 진씨에게로 이어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청사고 왕정남전에서 관중 왕종을 산서 왕종악으로 오인하는 바람에 후인들이 <<청사고>>를 인용하며 태극권은 명나라 때  창시되었다는 말을 하였다.

 

다섯째, 청초 옹정7년 절강총독 유포(誘捕)의 무술교사로 이름을 날린 남경사람 감풍지(甘風池)를 내가권가로 보고, 남파태극권파로 보는 설.

 

이와 같이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1930년대에 무술고증가인 당호등의 고증을 거쳐 태극권은 명말청초의 장군인 하남온현의 진왕정(陳王庭)이 창시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척계광의 <<권경삼십이세>>는 민간의 16가의 권법을 수록하였는데, 태극권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2) 온현 진왕정이 편찬한 태극권오로, 장권 108세1로, 포추1로는 척시<<권법삼십이세>>중의 29세를 채용하고 있다.

(3) <<권경삼십이세>>의 시작은 "나찰이" "단편" 양세로 시작하는데, 태극권오로, 장권, 포추의 시작도 모두 이 양세로 시작한다.

(4) 온현 진가구의 <<진씨가보>>의 제9세조 진왕정의 성명옆에 주석으로 "왕정, 주정이라고도 한다. 청초의 문양생으로 무술로 산동의 명수였다. 비적 천여명을 소탕하였다. 진씨권수도창의 창시인이다. 천생 호걸이다..."라는 글이 있다.

(5) 진왕정의 <<권경총가>> 가사는 척씨의 <<권경>> 가사의 내용중 정수를 받아들였다. 중요한 요결은 실질적으로 내용이 같고, 진왕정이 약간 수정하였다.

(6) 진왕정의 <<권경총가>>의 시작하는 두 문구는 "내밀 때는 곡선으로 굽어서 나가서 상대방이 알지 못하도록 하고", "모든 동작은 붙어서 돌아가게 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은 태극권 손사용의 기술특징으로 명나라 후기의 유대유, 척계광, 당순지, 정충두등 무술저작에서는 이런 특징이 없다.

(7) 진가구 진씨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진왕정의 권법과 추수는 진장흥(1771-1853)에 전해지고, 진장흥은 양로선(1799-1872)을 가르치면서 양가태극권이 나오고, 다시 오가태극권이 파생된다. 영년사람 무우양(1812-1880)은 양로선으로부터 진씨권법을 전수받고, 다시 진청평의 권법을 전수받은 후 무가태극권을 만들고, 다시 손가태극권이 파생된다. 이렇게 하여 세상사람들이 알고 있는 5개의 전통태권권이 형성되었다. 양, 오, 무, 손의 4식은 직간접으로 진씨태극권에서 나왔으며 관련이 있다.

(8) 척계광은 1528년에 태어나서 1587년에 사망하였다. 태극궈은 척계광의 <<권경>>이후에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척계광의 <<권경>>을 기초로 하여 새롭게 창조한 권법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당시 당호의 결론은 태극권은 명말청초에 창시되었고, 창시인은 명말의 장국인 하남온현 진가구의 진왕정이라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사료가 계속 발견되었는데, 진왕정이 태극권을 창시한 정확한 연대는 1644년 명황조가 멸망한 후 20년가량이 지난 후인 1660년대라는 것이다. 그 논거는 <<온현지>>, <<회경부지>>, <<평안현지>>를 고증한 결과 명나라가 멸망하기 3년전(1641년)에 진왕정은 온현의 향병수비로서 높지 않은 관직으로 고향을 지키는 무장이었다. 일찌기 향병을 이끌고 현장 오종해를 따라 토적을 토벌한 바 있고, 바람앞에 흔들리던 명나라를 위하여 전공을 세운 바 있다. 명나라가 망한 후, 진왕정은 소극적으로 은거하였는데, 사상적으로 도가의 형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유언에서도 "...일 없을 때 권법을 만들고...세상의 염량을 신경써 뭣하리, 성공해도 그만이고, 실패해도 그만이다. 누가 신선인가? 내가 신선이다"라고 쓰고 있다. 시기를 따져보면 명나라가 망한 후 약 20년이 지난 후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