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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서지마(徐志摩)와 장유의(張乳儀)

by 중은우시 2005. 12. 22.

서지마는 중국의 문학계에서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라도 그는 여성편력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존재이며, 많은 여자들과 끊임없는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장유의(張乳儀), 임휘인(林徽因), 능숙화(凌淑華), 육소만(陸小曼), 한상미(韓湘眉)등 적지 않다. 이건 중국내이고, 외국 여자들중에서도 새진주(賽珍珠, Pearl S. Buck 펄벅), 사말특래(史沫特萊, Agnes Smedley 스메들리)가 있다.

 

이런 여자들 중에서 명분으로 따지면 장유의가 가장 존귀한 편이다. 정실부인이었으니까. 다만 쌍방의 감정은 가장 담백했고, 7년만에 이혼하였다. 두 사람의 감정에 대하여는 <<이혼통고>>라는 서지마가 쓴 짧은 글(그것도 절반만 남았고, 나머지 절반은 찾을 수 없음) 이외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혼전이고 이혼 후이고, 심지어 서지마가 죽은 후 50년이 지나서까지 장유의는 한 마디도 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었다.

 

이것은 장유의의 현명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십년이 흐른 후 박복했던 이 여자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사실을 얘기하고 떠난다. 그녀는 88세까지 살았고, 1988년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그녀에게는 조카손녀인 장방매(張邦梅)가 있었는데, 1996년 9월에 미국에서 영문의 <<전족과 양복...장유의와 서지마의 집안일>>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장방매는 장유의의 여덟째 남동생인 장우구(張禹九)의 손녀였다. 1983년부터 1988년 장유의가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는 고모할머니와 5년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먼저 졸업논문을 완성한 후에, 그녀의 전기를 저술하였다. "고모할머니는 제 글을 보았어요"라고 그녀가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내용의 진실성은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결혼전부터 결혼후까지 서지마는 장유의를 무시하였다고 한다. 첫번째로 장유의의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서지마는 입술을 찡그리며 싫은 내색을 하면서 "시골촌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결혼후에도 장유의에게 제대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가장 기본적인 결혼의 의무를 이행한 것을 빼고는 장유의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혼의무를 이행하는데서도 부모들이 손자를 안고싶어하는 바람을 따르는데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1920년 겨울, 장유의는 출국하여 서지마와 만나게 된다. 과거에는 서지마가 처를 그리워하여 부친에게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장유의에 의하면 이 편지는 장군려(張君勵, 장유의의 오빠로 국민당정부의 중요인물)의 요청에 따라 서지마가 쓴 것이라는 것이다. 수년간 별거한 상태였으므로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장유의를 출국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서지마가 그녀를 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처가에서 그녀를 보내온 것이다. 친가에서 그녀를 보낸 것은 단지 서지마에게 집안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장유의의 이 해석보다 더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없다.

 

3개월후, 배는 마르세이유 항구에 닿았다. "나는 갑판 꼬리에 기대어, 그저 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을 찾고 있는 무리들 중에서 서지마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때, 내 마음은 서늘해졌다. 그는 좁고 긴 검은색 외투를 걸치고 있었고, 목에는 흰색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양복을 입은 것을 본 적은 없었지만, 나는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태도에서 나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절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서 그는 유일하게 그곳에 오고싶지 않은 것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장유의는 멀미로 구토를 하였다. 서지마는 머리를 돌리며 "넌 정말 시골촌것이구나"라고 하였다. 그 말을 한 지 얼마되지 않아 서지마도 토했다. 장유의도 지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내가 보기엔 너도 시골촌것이네."라고 하였다.

 

런던, 샤스톤 그리고 후에 베를린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과거에는 서지마가 얼마나 선량하고 얼마아 인자하였는지를 얘기하지만, 장유의에 의하면 서지마가 장유의에게 대한 것은 비인간적이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샤스톤에 살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장유의가 임신을 하였다. 이 때 서지마는 마침 임휘인을 쫓아다니고 있을 때여서 장유의를 돌볼 틈이 없었다. 임신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애를 떼어버리라"고 하였다. 당시는 낙태가 매우 위험할 때여서 장유의가 "들어보니, 낙태를 하다가 죽는 사람도 있다던데..."라고 하였다. 그러자 서지마는 차갑게 "어떤 사람은 기차 탔다가 죽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기차를 타지 않더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얼마지나지 않아, 서지마는 중국의 여자유학생 한명을 데리고 집에와서 밥을 먹었다. 책에서는 명소저(明小姐)라고 되어 있다. 장유의가 보니, 그녀는 해군복장을 하고 있는데, 발이 전족을 했던 적이 있었다. 손님을 보내고 나서, 서지마가 장유의에게 그 여자가 어떤지 물었다. 장유의는 "그녀는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전족과 서양옷은 좀 잘 안어울린다."고 하였다. 그러자 서지마는 왔다갔다 몇번 하더니 장유의에게 그 동안 쌓인 것을 쏟아내듯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너와 이혼하려는 것이다."

 

책이름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장유의는 전족하지 않은 발이었다. 서지마도 나중에 양복을 잘 입지 않았다. 이것은 일종의 상징이다. 두 개의 문화가 충돌하는 중국과 서양. 전통과 현대.

 

서지마는 즉시 이혼하자고 했고, 장유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서지마는 떠나버렸다. 장유의 혼자 샤스톤에 남았는데, 해산이 다가오자 할 수 없어 둘째 오빠인 장군려에게 연락했다. 장유의는 파리로 갔다가 다시 베를린에 가서 아이를 낳았다. 서지마는 장유의가 간 곳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단지 이혼절차를 밟을 때 한번 베를린에 왔을 뿐이다.

 

해산후, 장유의는 슬픔을 딛고 일어나서, 페스탈로찌학원에 입학해서, 유아교육을 배웠다. 귀국후에는 운상회사를 운영하였고, 상해여자저축은행을 경영하였다. 모두 큰 성공을 이루었다. 그녀는 모두의 주목을 받는 신여성으로 변신에 성공한 것이다. 더 뛰어났던 점은 귀국후에도 여전히 서지마의 부모(양녀가 되었다)를 모셨고, 정성을 다하여 서지마의 아들을 길렀으며, 대만에서 <<서지마전집>>을 발간한 것도 그녀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서지마는 장유의를 이렇게 대하였지만, 장유의의 서지마에 대한 감정은 어떠햇을까?

 

"너는 자꾸 나에게 묻는데, 내가 서지마를 사랑한 건지 아닌지? 너도 알겠지만, 나는 이 문제에는 대답할 수가 없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서지마를 위하여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해주었으니, 분명히 나는 서지마를 사랑하는 것일 거라고 한다. 그러나, 난 뭐가 사랑인지를 잘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만일 서지마와 그의 가족들을 돌보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를 사랑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고, 그의 일생중에서 만났던 여러 여자들 중에서 아마도 내가 제일 그를 사랑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