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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재녀(才女) 임휘인(林徽因)과 정치(情痴) 김악림(金岳霖)

by 중은우시 2005. 11. 27.

김악림

 

1895년 7월 14 생 (호남성 장사)

1911년 청화학당 입학

1914년 미국 펜실베니아대 입학(상과로 입학, 정치학으로 전과)

1917년 펜실베니아대 졸업, 컬럼비아대 입학

1918년 컬럼비아대 문학석사

1920년 컬림비아대 박사

1922년 영국런던에서 연구

1926년 청화대학 철학과 교수

1952년 학교조정으로 북경대학 철학과

1983년 사망(89세)

 

김악림은 중국현대철학과 논리학의 창시자격인 인물이다. 그는 1914년 청화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영국 그리고 유럽의 여러나라를 둘러본 후에, 귀국하여 주로 청화대학과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서구의 영향을 많이 받아 생활도 상당히 서구화되었으며, 양복을 입고, 180센티미터의 큰 키를 가지고, 당당하고 늠름한 대장부였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임휘인 때문이다.

 

김악림이 임휘인을 알게 된 것은 서지마를 통해서였다. 김악림은 원래 서지마와 친구간이었다.

 

임휘인과 양사성 부부는 미국유학을 다녀왔고, 집안의 영향으로 지식인들과 널리 사귀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거의 매주 그들의 집에서는 살롱식의 모임이 있었는데, 김악림은 항상 거기에 참석하였다. 그들은 문화적인 배경이나 지식이나 취향이 맞았고, 교분도 깊었다. 김악림은 바로 뒷집으로 이사들어가 오랫동안 이웃으로 살았다. 김악림은 임휘인의 인품과 재능에 감탄해 마지 않았고, 임휘인도 그를 매우 존경했다. 그들 사이의 교류는 보통은 아니었다.

 

김악림은 양사성 임휘인 부부에게 다음과 같은 대련(對聯)을 써서 선물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양상군자(梁上君子)

임하미인(林下美人)

 

대들보 위의 군자(알다시피 도둑이라는 의미)와 숲 아래의 미인, 두 사람의 성씨가 양, 임이므로 이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은근히 양사성이 임휘인을 도둑질해간 것으로 비유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양사성의 후처였던 임수에 따르면, 어느날 임휘인이 울면서 양사성에게 그녀가 "큰 고민거리가 있다. 내가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고백하였다. 임휘인은 양사성에게 조금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여동생이 큰오빠에게 어떻게 해야할지 물어보듯이 얘기했다. 양사성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같았고, 하루 저녁을 고민고민하다가. 김악림이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을 하게 되자, 임휘인에게 "너는 이제 자유이다. 만일 네가 김악림을 선택한다면 영원히 행복을 빌어주겠다"라고 하였다. 임휘인이 이 얘기를 김악림에게 하자, 김악림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그 말을 들으니 양사성이 정말 너를 사랑하는구나. 나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가 없다. 내가 물러나겠다" 그날 이후 세 사람은 서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김악림도 여전히 그들의 이웃으로 지내고, 서로간의 믿음도 더욱 강해졌다. 심지어 양사성과 임휘인이 다툴 때에는 이성적이고 냉정한 김악림에게 찾아가서 중재를 요청하곤 하였다.

 

임휘인이 죽은 후 여러해가 지난후, 김악림은 친구들을 북경반점으로 초대해서 근사하게 식사를 샀다. 모두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고 있었는데, 김악림은 "오늘이 임휘인의 생일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임휘인이 죽은 후에 그가 왜 독신으로 일생을 마쳤는지에 대하여는 직접 얘기한 적이 없지만, 그의 제자중에 한명이 실연후 자살하려고 하자, 그 제자에게 가서 한 얘기에는 "연애는 하나의 과정이다. 결혼하느냐 결혼하지 않느냐는 것은 연애과정에서의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연애의 행복여부는 연애의 모든 과정을 보아야지, 단순히 결혼여부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 스승의 말을 듣고 그 제자는 실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악림은 임휘인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생각했고, 임휘인의 자식들도 김악림에게 아빠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악림이 80여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임종하고 장례를 지내준 것도 임휘인의 자식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