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예일대학 졸업사진
생년월일 : 1904년 6월 10일
출 생 지 : 복건성 민후
민 족 : 한족
사망일시 : 1955년 4월 1일
직 업 : 건축사, 교수, 시인, 작가
임휘인은 중국의 유명한 건축학가이며 작가이며, 중국 최초의 여성건축학자이며, 동시에 호적(胡適)이 중국일대재녀로 부른 여인이다. 1930년초에 남편인 양사성(梁思成, 梁啓超의 장남) 과 함께 현대과학적인 방법으로 중국의 고건축물을 연구하였다. 그녀는 양사성과 중국의 15개성, 2000여곳의 중국고대 건축물을 직접 찾아다니며 연구하였으며, 고대건축관련논문이 20여편에 이른다. 남편인 양사성과 공동으로 집필한 것도 적지 않다. 그녀는 평생에 걸쳐 산문, 시가, 소설, 극본, 번역, 서신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의 대표작은 <<너는 사람세상의 4월의 하늘이다>>라는 시와 <<구십구도중>>이라는 소설이다.
임휘인은 1949년이래로 세가지 큰 공헌을 세우는데,
첫째는 중국의 국휘(國徽)를 설계하였고,
둘째는 중국의 전통인 경태람(景泰藍)을 개조하였으며,
셋째는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의 설계에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그녀는 1955년 4월 11일 15년간에 걸친 병마와의 싸움을 겪은 후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일생에는 세 사람의 남자가 있다.
한 명은 남편인 양사성으로 그는 청화대학 건축학과를 만들고, 부친이 유명한 변법자강운동에 참여했던 유명한 인물인 양계초이다.
또 한명은 작가인 서지마(徐志摩)이고, 문학계에서 임휘인을 아는 것은 서지마 때문이다.
나머지 한명은 북경대학 철학과 교수였으며, 중국철학의 거두인 김악림(金岳霖)이며, 철학계에서 임휘인을 아는 것은 김악림때문이다.
서지마도 역시 명문집안 출신이다. 그의 부친인 서신여(徐申如)는 걸강 협산진의 거부였고, 은행을 경영하는 유명한 은행가였다. 서지마도 부친의 가업을 이어 유럽으로 유학갔을 때는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경제학에는 흥미가 없어 곧 문학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그 때 유명한 서예가인 임장민(林長民, 임휘인의 부친)이 유럽에 오자, 그를 찾아뵙는데, 거기서 임휘인을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임휘인보다 8살 많았던 서지마는 임휘인을 만났을 때 이미 2살짜리 아이와 부인이 있었다. 그 때 서지마는 부인인 장유의(張幼儀)와 아들이 모두 런던에 와 있었다. 서지마의 계속되는 공세에 임휘인은 결국 마음을 열게 되는데, "나는 감정을 함부로 하는 여자가 아니다. 너는 나와 장유의 사이에 선택을 해라"라고 하게 된다. 낭만적이었던 서지마는 즉시 집으로 돌아가 장유의와의 이혼수속을 밟는다. 장유의는 황당하였지만, 이성을 되찾고, 아들을 데리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버린다. (부친 서신여는 서지마가 이처럼 처를 버리자 화가 나서 아들과의 부자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자금지원을 중단한다. 한편 은행과 재산을 장유의에게 맡겨버린다. 이후 서지마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하게 되었다. 장유의의 큰 오빠는 장군려로써 국민당초기의 풍운의 인물이었고, 둘째 오빠인 장가오는 당시 중앙은행 총재였다)
그러나 서지마와 임휘인은 인연이 닿지 않았다. 임장민은 곧 유럽여행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서지마가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임휘인에게는 정혼자인 양사성이 있었다. 양사성과 임휘인은 집안끼리도 교분이 있었고, 어릴때부터 알고지내던 사이였다. 서지마는 <<우언>>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이 때의 심경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하늘에 한 조각 구름.
우연히 너의 마음속으로 그림자를 들이밀었네.
그대는 놀라지도 말고, 기뻐하지도 말라.
순식간에 소멸해버릴 그림자라네.
그대와 나는 검은 밤에 바다 위에서 만났고,
그대는 그대의
나는 나의 방향이 있다.
그대가 기억해도 좋지만,
잊어버리는 것이 더 좋을 것같네.
만났을 때 서로 비추었던 그 빛을...
서지마도 양계초의 제자였다. 스승의 아들과 정혼한 임휘인 앞에서 어떻게 하였겠는가? 그는 나중에 육소만(陸小曼)을 만날 때까지 임휘인을 계속 그리워하였고, 양사성과 임휘인의 집을 자주 찾아갔다.
임휘인이 양사성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에, 둘 사이의 다툼이 극에 달하였을 때, 임휘인은 서지마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서지마는 이로써 임휘인에 대한 환상을 계속 버리지 못한다. 양사성은 귀국후 동북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임휘인은 몸이 좋지 않아 북경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이 때 서지마는 자주 임휘인을 찾아갔었다. 후세의 연구자들은 이 때 서지마와 임휘인은 아마도 선을 넘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증거는 없다. 얼마지나지 않아. 서지마는 북경에서 남편이 있던 육소만을 만나게 되고, 다시 육소만과 결혼한다. 서지마는 결혼후 행복하기는커녕 오히려 불행하였다. 친구들에게 많이 하소연하였는데, 주로 호적, 임휘인, 능숙화(凌淑華)등이었다. 그러다 결국 1931년에 사망한다. 임휘인은 1931년과 1934년에 두 번 서지마를 기념하는 글을 남겨 진심을 나타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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