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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한중수교비사 (1)

by 중은우시 2005. 9. 3.

첸치천(전기침, 錢其琛)은 중국의 외교부장과 부총리를 지낸 사람으로 2003년 75세의 나이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외교부장과 부총리를 지내면서 겪었던 10가지 사건을 <<외교십기(外交十記)>>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어 2003년 10월 세계지식출판사에서 450페이지짜리 책으로 만들어 출판하였다.

 

한중수교에 관련된 비사는 <<통왕한성(通往漢城)>>이라는 제목으로, 외교십기중 오기(五記)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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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서울을 가다.

 

내가 처음으로 한국에 간 것은 1991년 11월이었고, 거기에서 거행되는 아태경제합작조직(APEC, 亞太經濟合作組織)의 제3차장관급회의에 참가하였다. 당시, 중국은 막 이 조직에 가입하는 절차를 끝냈으며, 이것이 첫번째 출석한 회의였다. 관례에 따르면, 아태경제합작조직은 매년 한 번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각 회원국대표단은 외교, 경제무역의 두 장관이 대표단을 이끈다. 나는 당시 대외경제무역부장을 맡고 있던 리란칭(이람청, 李嵐淸)과 같이 대표단을 이끌고 서울에 가서 회의에 참석했다.

 

중국의 외교부장이 서울에 나타난 것은 당시로서는 천지개벽할 일이었다. 1945년 2차세계대전의 종전이래로 중국과 한국간에는 어떠한 정부간교류가 없었으며, 조선전쟁(6.25전쟁)중의 격렬한 충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비록 오늘날에는 중국의 어느 곳에서도 쉽게 한국관광객을 볼 수가 있고, 중국공민들도 자유롭게 서울에 가서 관광을 즐길 수 있지만, 1990년대초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에게 있어서 한국은 여전히 "금지구역(禁區)"이었고, 거기 가본 사람이 몇 되지 않았었다.

 

11월 12일, 중국대표단이 탄 민항전세기가 서울로 날아갔고,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그 때 중한은 외교관계가 없었으므로 항공운항노선은 더구나 없었다. 중국의 전세기는 한국에 머무르지 못하고, 바로 북경으로 돌아갔으며,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와서 대표단을 태우고 귀국했다.

 

우리는 공항에서 한국측의 환영을 받았다. 한국측은 대표단이 비행기에서 내려 바로 자동차를 타도록 조치했고, 우리를 모시고 함께 시내지구로 차를 몰아갔다. 원래, 한국측은 중국의 외교부장이 처음으로 한국에 오는 것을 고려하여, 기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공항의 질서유지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여, 한국과 외국의 기자들이 공항에서 취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실제적으로, 각국의 미디어기자들은 당시 중국대표단이 머물기로 되어 있는 서울 최대의 신라호텔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으면서, 중한관계를 돌파할 수 있는 소식이나 흔적을 포착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신라호텔에 도착하였을 때, 막 로비를 들어가자, 일찌감치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물샐 틈없이 둘러싸였다.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지고, 카메라가 들이밀어졌으며, 길고 짧은 마이크들이 앞으로 뻗어 왔다. 단지 사진기자들이 서로 찍으려는 모습과 텔레비젼기자들이 촬영하는 모습, 기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기억하기로, 그 중여 몇몇 대만여기자가 있었는데, 한 명이 있는 힘껏 소리높여 말을 했다. 기자들이 관심있는 것은 중국이 아태경제합작조직에 가입하는 문제가 아니었고, 중한관계에 어떤 변화가 발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에 사람들 소리로 시끄럽고, 완전히 혼란상태였으며, 묻는 게 뭔지 분명히 알 수도 없었고, 근본적으로 뭘 대답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우리는 기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에게 또 만날 기회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만 말했다. 한국측 인원이 이끄는 바에 따라, 억지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생각못했던 것은, 기자들이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가 머무는 객실층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본 한국측 접대인원들은 우리가 머무는 객실층을 봉쇄하고, 전문 경비로 하여금 밤낮으로 지키게 하고 질서를 유지하게 하여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우리가 정상적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해주였다. 

 

이번 아태경제합작조직의  장관급회의는 매우 순조롭게 개최되었다. 한국의 이상옥 장관과 각 회원국의 외무부장관들은 회의상에서 순서대로 발언했고, 모두 명확한 말로 새로운 세 회원(중화인민공화국, 중국타이페이, 홍콩)이 아태경제합작조직에 가입한 것을 환영하였다. 나도 회의상에서 발언을 하여, 각 회원국들의 지지에 감사했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중국타이페이, 홍콩이 아태경제합작조직에 가입하는 것은 아태경제합작과정에서의 중대한 발전임을 언급했다. 나는 또한 한국이 주최국으로서 일체의 준비를 하는데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회의기간중에 한국측은 약속을 지켜 대통령초청연회를 비롯한 모든 경우에 당시 서울에 있던 대만"대사"가 어떠한 활동에도 참가하지 못하도록 해주었다.

 

아태경제합작조직(APEC)

 

중국이 아태경제합작조직에 가입하는데에는 곡절이 있었다.

 

아태경제합작조직을 만들자는 구상은, 최초로 호주의 총리인 호커가 1989년초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 제기한 것이었다. 주요 목적은 미국, 카나다, 호주, 뉴질랜드등의 국가의 동아시아지역에서 경제연계와 합작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시작할 때는 호주측에서 중국의 지원을 매우 희망하였고, 이를 위하여 일부러 특사까지 보내 중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9년 북경의 정치풍파가 발생한 후, 호주와 미국등 서방국가는 태도를 바꾸었다. 중국은 그해 호주에서 열린 제1차장관급회의와 다음해에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2차장관급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태경제합작조직에 중국이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중국은 하나의 대국이고, 시장이 넓으며, 아태지구와 광범위한 경제관계를 맺고 있으며, 경제는 빠른 속도로, 힘있게,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아태경제합작조직의 각 구성원들은 반드시 중국을 초청하여 아태경제합작조직에 참여시켜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제2차장관급회의에서 통과된 공동성명의 가운데 이러한 문구가 있다.

 

"장관들은 중화인민공화국, 대만과 홍콩의 삼개 경제체가 그들의 현재의 경제활동이건 그들이 본지구의 향후의 번영에 관하여 말하건 간에 모두 아태지구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 삼개 경제체를 앞으로 아태경제합작조직에 참가시키는 것이 적합하다. 장관들은 계속하여 삼개 경제체와 계속 협상하여 삼방과 현재의 구성원들이 모두 동의하는 합의를 이끌어내고, 삼방이 서울회의에서 하루빨리 아태경제무역합작조직에 가입하도록 한다"

 

중국과 외교관계회복을 협상중이던 인도네시아는 아태경제합작조직의 구성원이었는데, 먼저 우리에게 관련상황을 통보해주었다. 그 다음으로 제3차장관급회의의 주최국인 한국이 사람을 보내어 중국과 비밀협상을 시작하였다.

 

중국이 아태경제합작조직에 가입하는 것은 비교적 복잡했다. 주로는 대만, 홍콩동시가입의 명칭과 지위의 문제였다.

 

아태경제합작조직은 UN등 주권국가가 참가하는 국제조직과는 달리, 그 구성원들은 모두 경제체였고, 경제문제를 토론하는 논단이며, 개회시 구성국의 국기, 국휘등의 표지를 게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홍콩이나 대만도 경제체로서 가입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원칙을 제출했다. 즉, 1개중국의 전제하에 중화인민공화국은 주권국가의 신분으로 참가하고, 대만과 홍콩은 지역경제체로 가입한다는 것이다.

 

서울회의 이전에 중국가입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국은 매우 높은 열정을 나타냈다. 당시 한국은 비록 대만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다만 그들은 이미 동아시아의 향후의 경제발전이나 정치구조가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하에 중국과의 수교가 한국에 유리하다는 것은 고려하고 잇었다. 이로 인하여, 주최국이라는 편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중국가입문제를 해결하고자 추진하였고, 이로부터 중국과의 교류왕래를 늘이자는 것이 한국정부의 외교정책의 중요한 목표였다.

 

당시 한국의 외교관리들은 중국을 방문할 수 없었는데, 우리는 파격적으로 한국의 외교부차관보 이시영(李時榮)을 당시 아태경제합작조직고위관리회의의장의 신분으로 여러 차례 북경에서 우리와 해결방안을 협의하도록 하였다. 그를 통하여, 상황을 다른 구성원들에게 통보하고 의견을 구했다. 이시영은 또한 여러차례 대만과 홍콩을 방문하여 그들과도 주선하고 협상하였다.

 

담판과정은 아주 힘들었다. 힘들었던 것은 한국측이나 아태경제합작조직의 구성원들이 주권국가와 지역경제체를 구분하는 원칙상에서 무슨 이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로는 대만측에서 중간에 문제를 일으켯기 때문이었다.

 

대만측에서는 아태경제합작조직내에서 "평등지위"를 요구했다. 명칭상에서도 우리가 제안한 "중국대만(Taiwan, China)"라는 명칭을 쓰는 것에 계속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의 "외상"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이런 문제를 중국과 직접 협상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담판은 장애를 만났고, 문제는 한동안 해결방법이 없었다.

 

이시영은 세 곳을 왔다갔다하며 말을 전하고 각방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타협안을 마련하였는데, 그 어려움은 상상이 갈 것이다. 일이 계속하여 진전이 없자. 나중에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시영이 대만에 대하여 "만일 대만측에서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중화인민공화국과 홍콩만 먼저 가입시키겠다"는 최후통첩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대만측에서도 결국 "시대의 흐름을 아는" 태도를 보여 부득불 양보를 하게 되었다.

 

6차례의 담판을 9개월여의 시간을 들여 진행하여, 마침내 중국도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홍콩과 대만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다른 구성원들도 만장일치로 찬동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1991년 10월 2일, 중국외교부 국제사 사장 친화쑨(진화손, 秦華孫)과 한국의 이시영은 뉴욕에서 삼방이 동시에 아태경제합작조직에 가입하는 양해각서를 서명하였다. 그 중에는 중국이 유지했던 기본원칙이 포함되어 있었고, 대만의 칭호와 참가활동의 등급에 대하여도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대만은 "중국타이페이(China Taipei)의 명칭을 사용하며, 또한 경제업무를 주관하는 장관만 회의에 참석하고, 그 "외교부 부장" 또는 "외교부 부부장"은 회의에 참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태경제합작조직과 대만 및 홍콩도 내용이 같은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당시에 우리는 또한 한국측과 하나의 협의를 달성하였는데, 바로 한국의 대만 "대사"는 제3차 장관급회의의 활동에 참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중국대표단이 서울의 장관급회의에 참석하는 길을 깨끗이 청소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