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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한중수교비사 (2)

by 중은우시 2005. 9. 3.

노태우를 만나다

 

우리가 서울에 도착한 그날 오후, 일정에 따르면,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각 구성원의 장관을 단체로 접견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제 시간에 도착하여 높으면서도 넓은 십여개의 계단을 올라 회견장에 들어갔다. 내빈들은 의전순서대로 서 있었고, 이 때 청와대의 의전관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말하기를, 대통령께서 단체접견후에 잠깐 남아달라고 하면서, 대통령이 단독접견을 원한다고 하였다.

 

노태우는 군인출신이지만, 비교적 온화하고, 중국수교문제에서도 상당히 단호하였다. 그는 1988년 2월 한국대통령직을 맡은 후, 국제형세와 한반도의 형세의 변화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는 그의 임기내에 중국, 소련과 동구권등 사회주의국가들과 수교한다는 소위 "북방정책"을 명확하게 제기하였다.

 

1988년 10월 한국은 성공적으로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였고, 그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동시에 중국, 소련, 동구국가의 체육대표단을 맞이하면서 이런 국가와의 긴장관계를 완화시키고 있었다.

 

1989년초, 헝가리는 사회주의국가로서 먼저 금기를 깨고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90년 9월에 소련이 한국과 수교할 때에는 대다수의 동구권국가들이 모두 한국과 외교정상화를 실현하였다.

 

노태우는 일찌기 여러 방면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시도하였으나, 계속하여 진전이 크지는 않았다. 당시, 그는 임기를 1년여 남겨두고 있었으므로, 비교적 조급해하였으며, 자연히 중국의 외교부장이 서울에서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자 하지 않았다.

 

단체접견이 끝난 후, 이상옥 외교부장관은 나를 이끌고 다른 고색이 창연한 회견실로 데려갔다. 먼저 확정한 회견 수행인원은  모두 이미 도착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푸른 색의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회견실로 들어오며 모든 사람과 악수를 했다.

 

자리에 앉은 후, 노태우 대통령은 먼저 중국대표단이 서울에 온 것을 환영하고, 중국이 아태경제합작조직에 가입한 것을 축하했다. 그러고는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양국관계문제를 얘기했다. 그는 말하기를 한국과 중국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자고로 유구한 교류왕래가 있었으며, 한국의 서해안과 중국의 산동반도의 사이에는 진짜 닭이 울면 들릴 정도라고 하였다. 단지 근대에 와서, 한국과 중국은 서로 수십년간 격리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유감이며 부자연스럽다고 하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최근들어 양국간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고, 1986년과 1988년, 중국체육대표단이 서울에 와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참석하였고, 이후 쌍방간의 교역교류도 시작되었으며 한국대표단은 여기에 기쁘고 만족한다고 하였다. 한국은 비록 이미 소련과 동구국가와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지만,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그리고 아태지구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서, 한국은 진정으로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기를 희망하며, 하루빨리 수교가 실현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담화중에 노태우는 시종일관하여 얼굴에 웃음을 띠고, 풍모다 우아하였다. 그가 특히 산동반도를 언급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산동 노씨의 후예라고 하였고, 나중에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산동을 가서 조상을 찾은 적이 있다.

 

나는 그의 접견에 감사를 표했고, 한국측이 아태경제합작조직의 장관급회의 준비업무에 쏟은 노력을 찬양했다. 이어서, 역사상으로 보면 중국과 한국은 오랜 교류왕래의 역사가 있으며, 지리적으로도 중국과 한국은 이웃으로 비록 닭소리가 서로 들리지만, 왔다갔다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의 비정상적인 관계는 2차세계대전후에 형성된 것이다. 나는 한반도의 남북쌍방이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왕래를 강화하길 바란다. 중한양국간의 무역관계는 최근들어 비교적 큰 발전이 있었고, 쌍방의 공동노력으로 더욱 발전하기를 바란다. 동시에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도 관계를 개선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의견은 명확하게 얘기했다. 노태우가 제기한 수교문제에 대하여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회견 1시간후 한국의 TV는 바로 보도를 했다. 다음날, 한국의 각 신문은 제1면에 노태우와 내가 악수하는 큰 사진을 실었다. 매체는 담화내용에 관하여는 보도하지 않았지만, 다만 보편적으로 평론하여 말하기는 이것이 중한관계의 "전환점"이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나는 이상옥 외무부장관과 조찬을 했다. 이번 활동은 오기 전부터 약속된 것이었고, 한국측은 이에 대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이전에는, 매년 UN에서 회의를 개최할 때, 한국의 외무부장관이 그 때마다 나와 만나도록 약속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나는 계속 거절했었다. 이번 9월이 되어 북한과 한국이 동시에 UN에 가입한 후, 나는 UN회의기간중에, 예의적으로 이상옥을 만난 적이 있을 뿐이었다. 중한 쌍방의 외교부장관이 자리에 앉아 아침식사를 하면서 의견을 교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찬에서, 쌍방은 먼저 회의관련사항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했다. 그 후 노태우와 마찬가지로, 이상옥도 화제를 돌려, 양국관계문제를 꺼냈다. 그는 제기하기를, 작년도 한중무역액이 38억달러이고, 올해는 아마도 50억달러를 돌파할 것이다. 만일 수교에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는 쌍방이 이미 상대방에 설립한 민간무역판사처를 관방기구로 승격시켜, 쌍방무역의 신속한 발전상황에 대처하자고 하였다. 나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양국관계는 이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민간방식이 좋다고 본다. 나는 쌍방인원이, 외교인원을 포함하여, 만나서 얘기하고 일을 처리하고, 서로 연락을 유지하자고 하였다. 이상옥은 말하기를 한국측에서는 한중수교는 중국측에서의 준비상황을 봐가며 진행하여야 한다는 점은 이해한다고 하고, 다만 한국측은 빠른 시일내에 실현되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 나는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수도거성(水到渠成, 물이 흐르면 도랑이 된다).

 

그날 저녁에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한국청소년체육부 장관인 박철언(朴哲彦)이 여러차례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이다. 원래는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상대방측에서는 계속 전화를 해오고, 계속하여 요구해왔을 뿐아니라, 또한 그가 여러차례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에도 적지 않은 친구가 있는데, 그 중에는 내 동생인 첸치아오(전기오, 錢其[玉+敖])도 있다고 하였다. 첸치아오는 당시 천진시 부시장으로 문화교육체육을 담당하고 있었고, 천진에서 국제체육경기를 개최하였을 때, 방문한 그를 접대한 일이 있었다. 밤에 거의 11시가 되었을 때, 박철언은 그의 조수를 데리고 내 방으로 왔다. 이런저런 인삿말을 나눈 후, 그는 우리와 비밀통로를 건립하고 싶다고 말하며, 양국의 수교를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자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오늘 밤의 만남은 대통령의 동의를 받은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경선업무에 참가하기 위하여, 그는 곧 장관직을 사임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중관계정상화는 그의 주요한 정치적 임무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그는 또 한 개는 크고, 한개는 작은 두개의 황금열쇠를 꺼내서, 큰 것은 나에게 주는 것이고, 작은 것은 나의 동생에게 주는 것이라고 했으며, 두개의 황금열쇠가 양국관계의 문을 열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몇해동안, 적지 않은 한국의 고위인사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별지비자를 받아, 개인적으로 북경을 방문해서, 우리들의 접대기관에 대하여, 양국의 수교에 일익을 담당하겠다고 말하곤 하였다. 접대기관이 어떤 성격인지는 전혀 관계없이. 이로써 볼 때, 중한수교를 실현하는 것이 당시 한국에서는 하나의 조류였고, 그 역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단지, 사람들이 너무 복잡하여,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박철언이 얘기한 것에 대하여 그냥 듣기만 하였다. 나는 그에게 중한양국은 비록 수교는 하지 않았지만, 이미 정부간에 접촉이 시작되었으므로, 무슨 비밀통로는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고 하였다. 귀국후에 나는 업무인원에게 두개의 황금열쇠를 중국인민은행에 보내어 감정을 하도록 시켰더니, 모두 순금이라고 얘기했다. 지금도 외교부에서 등기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그 때 중한관계발전과정의 하나의 작은 역사상의 발자국 흔적이라고 할 것이다.

 

단단한 얼음을 깨다

 

중국이 한국과 수교를 하려면, 어려움은 쌍방관계에 있지 않았고, 오히려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에 있었다. 즉, 어떻게 하면, 전통적으로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북한으로 하여금, 이러한 외교관계의 조정을 점진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느냐의 점이었다.

 

역사를 돌아보건대, 중국과 한국은 장기간 떨어져 있었던 것은 깊은 역사적인 연원이 있었다. 일찌기 1930,40년대에 김일성등 조선혁명가들은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항일연군에 참가하였고, 중국인민과 공동으로 일본침략에 대항하여 싸워왔으며, 중국과 북한의 전통적인 우의는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 미소는 38선을 경계로 하여 각자 군대를 파견하여 한반도의 남북에 진주하였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이 성립되고, 같은 해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49년 10월 1일, 신중국이 성립되었고, 6일후인 10월 6일 북한과의 수교를 선언하였다.

 

1950년 6월 조선전쟁이 일어났다. 전쟁발발후, 중국과 소련은 북한을 지원하였고, 미국과 일본은 한국을 지원하였다. 정전선은 대체로 38선과 가까웠고, 남북대치의 국면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970년대 중후반이후, 국제형세의 발전과 변화로, 많은 국가가 현실에서 출발하여, 북한과 한국의 존재를 승인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소련과 동구국가들은 비록 한국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국제다국간활동, 예를 들어 체육경기와 국제회의등에서는 한국과 교류왕래를 시작하였다. 1980년대초가 되면서 국제상에서 북한과 한국과 동시수교한 나라가 이미 100개국에 가까웠다.

 

이와 동시에 한반도내부에도 변화가 발생하여 여러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적대적인 남북쌍방이 접촉을 가졌을 뿐아니라, 고위급회담도 진행하였고, 1972년에는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국가통일을 촉진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중국국내를 보면, 당의 11차3중전회후에 중국의 업무중심은 경제건설로 옮아갔고, 개혁개방이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어떻게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을 전개하고, 국제교류공간을 최대한 확보하여 현대화건설에 우호적인 외부환경을 건설할 것인가가 외교업무에서 부닥친 시급한 문제였다.

 

바로 이런 배경하에서, 한반도의 긴장국면을 완화시키고, 남방쌍방의 평화회담을 촉진시키고, 이웃나라인 한국과의 관계를 완화시키는 것은 이미 의사일정에 올라있었다.

 

형세의 변화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규정을 확정했다. 즉, 이후 국제조직이 위탁하여 한국이 주최하는 국제활동에, 중국이 당해 조직의 구성원이면, 사람을 보내어 참가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이 주최하는 활동에도 한국의 인원이 참가하는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국제적인 다국간활동에서는 국제관례와 대등원칙에 따라, 우리도 한국과 왕래하지 않는다는 방식을 변경하여 앞으로 쌍방이 정상적으로 왕래하는데 조건을 제공한 것이다.

 

당시, 마침 중국도 아시안게임을 개최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 여러해동안 중국체육수준의 제고와 더불어, 중국은 계속하여 아시안게임을 개최하고자 하고 있었다.  많은 아시아의 국가들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체육팀을 중국에 오도록 하여 대회에 참가시키느냐는 것은 중국이 아시안게임을 개최하는데 반드시 극복해야할 장애가 되었다. 하나의 국가가 만일 다른 아시안게임이사국의 구성원인 국가의 운동원을 경기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그 나라는 기본적으로 국제운동회의 개최를 신청할 자격조차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1983년 8월, 북경시는 아시안게임이사회에 1990년 제11회아시안게임의 개최를 신청하였다. 중국의 외교부장은 동시에 아시안게임이사회에 서신을 보내어 , 한국을 포함한 모든 아시안게임회원국의 입국 참가를 보장하였다.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고려하여, 중국은 즉시 북한에 통보하였고, 만일 신청이 성공하면, 북한도 채육대표단을 보내어 참가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우리는 또한 아시안게임이사회규정을 준수하여, 한국을 포함한 아시안게임이사회의 모든 구성국가들이 대표단을 파견하여 참석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하였다.

 

등소평 동지는 중국과 한국의 관계문제에 대하여 계속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85년 4월, 등소평동지는 중국과 한국관계문제를 언급할 때, 중한관계발전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래도 필요한 것이 있다. 첫째, 장사를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둘째, 한국으로 하여금 대만과의 관계를 끊게 할 수 있다.

 

1988년 5월 에서 9월의 기간동안, 등소평 동지는 외빈을 접대할 때, 여러차례 중국과 한국의 관계를 언급했다. 그는 말하기를, 중국의 각도에서 보면, 우리는 한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이로움은 있지만 해로움은 없다(有利無害). 경제적으로, 쌍방의 발전에 유리하며, 정치적으로 중국의 통일에 유리하다.

 

또 다른 한번의 담화에서는 그는 더 나아가 말하기를 시기가 무르익었다(時機成熟). 한국과의 경제문화교류의 발걸음을 발전시키는 것이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더 빠르고, 좀 더 광범위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의 민간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중요한 전략적인 조치이다. 대대만, 대일본, 대미국, 대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대동남아에 대하여도 모두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와 동시에, 등소평동지는 이러한 업무를 매우 신중하게 해야한다고 언급했다. 이 문제는 매우 미묘하므로, 처리하려면 매우 신중해야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의 양해를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

 

등소평동지의 지도하에, 우리는 여러해의 금기를 깨고, 다변국제활동에서 한국과의 관계를 완화시켰다. 쌍방의 대표단의 교류도 빈번해졌다.1986년과 1988년에 중국은 수백명의 체육대표단을 보내어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에 참가했다. 1990년 북경에서 개최된 제11회 아시안게임때, 북한과 한국은 모두 대표단을 보내어 참가하였고, 북한 국가부주석 이종옥은 개막식에 참석하였다. 북한 국기와 한국국기는 처음으로 북경의 체육장에서 게양되었다.

 

무역측면에서는, 한국에 대한 정책조정후, 발전이 더욱 빨랐다. 1988년 양국의 무역액은 이미 10억달러를 돌파하였다.

 

무역량의 대폭 증가와 더불어, 이미 홍콩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진행하던 무역방식은 갈수록 맞지 않게 되었다. 이 때 쌍방은 상호 민간무역판사처를 설립하여, 중한의 민간직접무역을 전개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생각 못했던 것은, 이 문제는 북한쪽의 강렬한 관심을 끌어냈고, 직접 중국과 북한의 최고영도자들을 움직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