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은래)

주은래(周恩來)의 육무(六無)

중은우시 2005. 9. 1. 16:24

주은래(쩌우언라이)는 중국 인민의 가슴 속에 영원한 총리로 남아 있다. 그와 관련한 얘기나 그의 영향은 중국 곳곳에 남아 있지만, 그러나 그는 또한 다른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를 가지지 않고 있다.

 

첫째, 사불유회(死不留灰)

 

죽어서 유골을 남기지 않았다. 주은래가 사망한 시점은 역사의 격변기였다. 임표(林彪) 집단이 막 분쇄되고, 강청(江靑)의 사인방은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1976년 1월 주은래가 사망하였다는 소식과 슬픈 음악이 라디오에 흘러나왔고, TV로 간략한 고별의식이 중계되었다. 이 때 강청은 모자도 벗지 않고 고개를 숙여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었으며, 며칠 지나서 팔보산(八寶山)에서 화장하였다. 1월 15일 추도회가 끝난 후, 부인 등영초는 생전에 유골을 남기지 말고 대지에 뿌리라고 하였다는 얘기를 전하고, 주은래의 유골을 그가 대학을 다니고 혁명을 시작했던 천진에서 황하입구까지 농업용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뿌렸다. 유골이 없으므로, 유골을 묻은 장소나 비석도 당연히 없다.

 

둘째, 생이무후(生而無後)

 

살아서 후손을 남기지 않았다. 중국인의 습관에는 후손을 잇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누구의 후예라는 것은 생활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불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후손을 두지 않는 것이 가장 크다라는 말도 있다. 후손들이 선인을 기리는 것에는 첫째, 고거(故居, 거주하던 집), 둘째, 묘지, 셋째, 후손인데, 그 중에서 후손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은래는 혁명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의 자손들을 보살피고(총리를 지낸 이붕은 주은래의 양자이다), 자신은 후손을 두지 않았다.

 

셋째, 관이무형(官而無型)

 

관직에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수천년 이래로 관직은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관직이 높을 수록 특수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주은래는 외교, 공무를 수행할 때는 관리였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보통의 백성과 같이 생활했다. 그는 중국유사이래 처음있는 평민재상이었다. 그의 검박한 생활에 관해서는 여러가지의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넷째, 당이무사(黨而無私)

 

당에 있으며 사사로움이 없었다. 레닌은 사람은 계급으로 나누어지고, 계급은 정당이 영도하며, 정당은 영수가 주재한다고 하였다. 사람이 있으면 당은 있다. 정당외에 붕당, 향당등의 당이 있는 것이다. 모택동 주석도 일찌기 당외에 또 당이 있으며, 당내에도 파벌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당을 이루고, 서로 이익이 맞는 사람끼리 당을 이루며, 당을 이룬 뒤에는 이익을 취하고, 권력을 취하고 영화를 취하는 도구로 쓴다. 그러나, 주은래는 당내에 파벌을 이루지 않았다.

 

다섯째, 노이불원(勞而不怨)

 

고생을 해도 원망하지 않는다. 주은래는 혁명사업 및 이후 국가건설에 많은 고생을 한 사람이다. 그는 해방전에는 상해노동자기의, 팔일기의, 만리장정, 삼대전역, 지하투쟁등으로, 해방후에는 정치, 경제, 문화등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무척 고생을 많이 한다. 업무량으로만 계산한다면 주은래의 업무량이 당시 당원들중에서 가장 많았을 것이다. 주은래는 1974년 6월 1일에 입원하는데, 입원하기 전인 1월부터 5월까지 139일간의 자료를 보면, 12시간 내지 14시간 업무를 본 날이 9일, 14시간에서 18시간 업무한 날이 74일, 19시간에서 23시간을 업무한 날이 38일, 24시간 내내 일을 한 날이 5일이었고, 단지 13일만 12시간이내로 업무를 보았다. 3월중순에서 5월말까지만 보더라도 중앙회의에 21번 참석하고, 외교활동이 54회, 기타 회의나 면담이 57회였다.

 

여섯째, 사불유언(死不留言)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1976년 주은래가 죽기 전에 모택동도 매일 한번씩은 주총리의 병세를 물어보고, 부인 등영초는 매일 병석에서 같이 있었다. 당시, 사인방에 의하여 거의 다 타도되고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 섭검영(葉劍英) 원수였는데, 섭검영은 백지를 비서들에게 주고, 혹시 주은래 총리가 무슨 말씀을 하시면 하나도 빼지 말고 기록해두라고 하였는데, 결국 사망시에 다시 받아본 백지는 원래 그대로인 상태였다고 한다. 주은래가 죽을 때 할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해야 할 것은 모두 말하지만,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단 한 글자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인인 등영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등영초는 혁명동지이고 고위관료였지만, 총리의 업무와 관련되는 일은 부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총리사무실의 열쇠도 그가 한 개, 비서가 한 개, 보안인원이 한 개를 가지고 있었을 뿐, 등영초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