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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음식

북경의 노자호(老字號) - 전취덕(全聚德)

by 중은우시 2005. 8. 26.


전취덕 간판

 

북경을 대표하는 음식은 뭐라고 하더라도 북경오리구이이다. 중국어로 베이징카오야(北京[火+考]鴨), 영어로는 페킹덕(Peking Duck)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요리이다. 북경오리구이로 가장 유명한 점포는 췐쥐더(全聚德)이다.

 

전취덕은 청나라 동치3년(1864년)에 문을 열었고, 현재 남아있는 전문(前門)의 본점은 광서14년(1888년)에 문을 연 것이다. 들어가는 문의 위에는 큰 글자로 "전취덕(全聚德)"이라고 써놓고, 왼쪽에는 "노로포(老爐鋪)", 오늘 쪽에는 "계압점(鷄鴨店)"이라고 써놓았다. 그리고 대문의 양쪽에는 두 개의 글을 써놓았는데, 하나는 "포판주석, 내유아좌(包辦酒席, 內有雅座, )"와 "응시소매, 수의변작(應時小賣, 隨意便酌)"라고 써붙였다. 개략적으로 술자리를 하도록 안쪽에 VIP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니, 언제든지 찾아서 편안하게 먹고마셔주십시오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전취덕의 초창기의 편액은 문지방위에 새겨져 있다. 비록 100여년의 비바람을 견뎌왔지만, "전취덕" 세글자는 아직도 알아볼 수 있다. 현재는 이 글자는 점포안에 진열하고 있다.

 

양전인(楊全仁, 1822-1890)은 본명이 수산(壽山), 자(字)가 전인(全仁)인데, 바로 전취덕의 창시자이다. 원래 하북성 기현(冀縣)의 양가채(楊家寨) 사람이다. 처음에 북경에 왔을 때는 전문의 육시가(肉市街)에서 닭과 오리를 팔았다. 후에 양전인은 다른 사람의 소개를 받아 한 잡화점내에서 자리를 잡고 닭과 오리를 팔았다. 이 때의 잡화점의 이름은 덕취전(德聚全)이었다. 의미는 "이덕취전, 이덕취재(以德聚全, 以德取財)에서 딴 것인데, 덕으로서 여러가지를 모으고(잡화점이므로), 덕으로 재물을 취한다는 의미였다. 양전인이 이 점포를 나중에 인수한 후에 상호를 "전취덕"으로 "덕취전"의 이름 순서를 뒤집어버렸다. 여기서 "전(全)"은 양전인 본인의 이름을 암시하는 측면이 있으며 "이전취덕, 재원무성(以全聚德, 財源茂盛)" 완벽하게 모아서 덕을 이루니, 재물이 끊이지 않고 무성하게 모인다는 의미이다.

 

양전인의 노력으로 전취덕은 북경오리구이를 대표하는 가게로 성장한다.

 

현재 북경전취덕에는 양전인의 5대후손인 양종만(楊宗滿, 여)이 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그녀의 부친인 4대후손인 양복래(楊福來)는 1951년 27세의 나이로 전취덕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어, 기존의 기업들을 모두 공사합영을 거쳐 국유화하는 단계였으므로 이미 양씨집안의 가게가 아니라 공사합영(국가와 개인이 공동으로 경영하는 가게)으로 바뀌어 있을 때였다. 그렇지만, 종업원에게 급여를 주기 힘들면 양복래는 부인의 패물을 팔아서 급여를 주었고, 양복래는 자기가 타던 차까지도 나중에는 팔았다. 양종만에 따르면 "그 때는 우리 집안에서 쓰던 은수저까지 모두 점포로 가져갔습니다. 점포내에서 뭔가 필요한게 있으면 집에 있는 걸 가져갔죠. 그 때 말로야 이미 공사합영이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그걸 따지지 않았고, 이건 우리 집안의 가게인데, 우리 집에 있는 걸 가져가면 어떠냐는 생각을 했었다, 아무래도 피속에 흐르는 감정때문일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외교관계가 회복되었을 때, 일본의 누군가가 양복래에게 일본에 가서 텔레비전 광고에 한번 나가주면 얼마얼마를 주겠다고 거금을 제시하엿는데도, 양복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취덕을 가지고 자신이 이익을 보는 것은 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게에 있는 모든 점원들은 양복래에게 사장님이라고 불렀는데, 바로 그의 이런 인품때문이었다."

 

양종만은 어릴 때 집안 어른들이 오리구이가게에서 일하기보다는 대학교육을 받고 좀 더 그럴 듯한 일을 하도록 바라서, 전취덕에서 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1968년 문화혁명이 나면서 그녀는 흑룡강성으로 쫓겨가 노동일을 하게 되고 1978년이 되어서야 겨우 북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북경으로 돌아온 후 우연한 기회에 부친을 따라 주방에 들어가게 되었고, 밑반찬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주방장까지 되었고, 후에 공관부 경리를 거쳐 1996년에는 부총경리가 되었다.

 


위의 사진은 독일의 여자 사진작가인 헬렌 모리슨이 1933년에 찍은 사진으로 오리를 굽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원래, 전취덕은 오리굽는 방법은 기밀로 관리하여 외부에 절대 노출시키지 않고, 외부인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는 것인데, 독일의 여자 사진작가가 워낙 간곡하게 부탁하여 당시의 주인이 허락하여 찍게 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