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강성박물관의 <<잉산도>>, 부춘산거도의 앞부분
<<부춘산거도>>는 황공망(黃公望)의 만년의 걸작으로, 중국에서 고대 산수화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다. 글씨에 있어서 왕희지의 <<난정서>>를 최고의 걸작으로 꼽듯이, 그림에 있어서는 황공망의 <<부춘산거도>>를 제일로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춘산거도>>로 알려진 그림이 세상에 2폭이 전해지고 있는데 보통 <<무용사권(無用師卷)>>으로 불리우는 한 폭과 <<자명권(子明卷)>>으로 불리우는 한 폭이 그것이다. 두 폭의 <<부춘산거도>>는 모두 건륭제때에 황궁으로 들어왔으며, 현재는 대만의 고궁박물원이 모두 보관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첫째, <<무용사권>>과 <<자명권>>중 어느 것이 진품이고 어느 것이 위작인지, <<무용사권>>에서 갈라졌다고 하는 <<잉산도>>는 진품인지 위작인지의 문제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두 폭중 <<무용사권>>은 특히 수장내력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기정의 <<서화기>>에 따르면, 이 그림은 명나라때 오지구(吳之矩)가 수장하였는데, 그 아들 오문경(吳問卿)은 이 그림을 매우 아꼈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문경은 자신이 죽기 직전에 평소에 가장 아끼던 <<부춘산거도>>와 당나라때 지영(智永)의 <<천자문>>을 불에 태워 자신과 순장하도록 후손에게 명한다. 후손은 첫날에 <<천자문>>을 불사르고, 둘째날에 <<부춘산거도>>를 불사르기 위하여 불에 집어던졌는데, 조카인 오자문(吳子文)이 이를 구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 길다란 그림은 두 개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앞부분은 나중에 <<잉산도(剩山圖)>>(폭 31.8센티미터, 길이 51.4센티미터)라는 이름으로 후세에 전해졌으며, 현재 절강성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뒷부분은 <<부춘산거도>>(폭 33센티미터, 길이 636.9센티미터)라는 이름으로 후세에 전해졌으며, 현재 대만 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앞부분과 뒷부분이 연결되는 곳에는 오지구의 도장이 찍혀 있으며, 앞부분에는 수장가 오호범(吳湖帆)이 쓴 "산천혼후, 초목화자"라는 여덟 글자가 쓰여 있다. 뒷부분에는 동기창(董其昌)의 발문이 있고, 화폭앞윗부분에는 양시정(梁時正)이 글을 쓰고 건륭제의 도장을 찍어놨으며, 뒷부분에는 심전석(沈田石), 문팽(文彭), 왕서등(王犀登), 주천구(周天球), 추지린(鄒之麟), 김사송(金士松)등의 글도장이 있다.
<<무용사권>>의 창작년대는 원나라 지정7년(1347년)에서 지정10년(1350년)이므로, 이 불후의 명작이 지금까지 6백여년을 전해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원나라 이래로 모든 화가들은 이 그림을 보는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이로 인하여 수장가들이 큰 돈을 들여 구매하여 후세에 전하였고, 보물로 모셔두거나, 외부에 비밀로 하여 보여주지 않았었다. 청나라 순치제 때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불에 탈 위기를 넘겼는데, 이로 인하여 두 조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예술적인 가치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무용사권>>의 첫번째 수장자는 황공망의 도우(道友)인 무용선사(無用禪師)였다. 무용선사는 이 그림을 세력있는 사람들이 탐낼 것을 두려워하여 그림이 완성되기도 전에 작가에게 먼저 무용에게 준다는 글을 써넣게 요청하여, 그림의 귀속을 분명하게 하였다. 그후 명나라의 화가 심주(沈周)에게 전해질 때까지 100여년간 이 그림을 누가 소장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심주가 이 그림을 소유했던 시기는 매우 짧았으며, 다른 사람이 빌려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심주는 집안이 부유하지 못하여 이 그림을 되사올 수는 없었다. 홍치원년(1488년) 소주의 번순거가 많은 돈을 들여 이 그림을 샀고, 심주로 하여금 이 그림에 글을 쓰도록 하였다. 심주는 자신이 보았을 때 이미 그림이 낡았으며 떨어져나갔다는 내용을 기재하였고, 화가의 각도에서 이 그림이 뛰어남을 기재하였다. 심주가 부춘산거도를 모방하여 그린 그림도 지금은 국보급으로 취급되고 있다. 용경4년(1570년), 이 그림은 다시 화가이자 감상가인 담지이(자는 思重)에게 전해지고, 태원의 왕서등과 화가 주천구는 모두 다음해에 이 그림을 보고 감상후기를 써둔다. 명나라 후기의 저명한 서화가이자 감상가인 동기창은 만력24년(1596년)에 이 그림을 샀고, 오래지 않아 다시 수장가 오지구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오지구는 아들 오문경에게 넘겨주었고, 오문경은 이 그림을 걸기 위해 특별히 부춘헌(富春軒)이라는 건물까지 지어서 보관한다. 그림에 오지구의 인감이 찍혀 있고, 화가 추지린도 그림에 글을 쓴다. 명청 양대의 혼란중에서도 이 그림을 잘 보관하였으며, 후에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죽기전에 불태우라는 명을 내리게 된다.
전반부의 불탄 부분은 오지구의 도장이 찍혀있는 곳에서 갈라졌는데, 오기정의 <<서화기>>에 따르면 길이가 4척여가 되었으며, 완전히 불에 탄 부분을 빼고 그림의 형태에 크게 영향이 없는 부분이 약 1척6촌이었다고 하며, 오기정은 이것을 얻은 후 <<잉산도>>라고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잉산도>>는 부춘강이 시작하는 부분의 구릉과 산들을 그린 것이다. 청나라 강희 8년(1669년)에 광릉의 왕정빈이 소유하며, 왕이 발문과 제목을 쓴다. 민국27년(1938년)에 오호범이 구매한 후 오호범의 낙관을 찍는다. 오호범은 <<부춘산거도>> 전반부의 진품임을 고증하고 다시 표구하며 일부 떨어져나간 곳은 보수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후에 절강성박물관이 구매하여 보관하고 있다.
후반부는 약 3장여가 되며, <<부춘산거도>>의 주요부분이되는데, 다시 수장가들을 여럿 거치게 된다. 먼저 단양의 장범아(張範我)의 손에 들어가며, 장씨는 매우 아꼈으나, 결국 오래 보관하지는 못하고 다시 계우용(季寓庸)의 손으로 넘어간다. 계우용은 "양주계인시수장인"등 여러개의 낙관을 찍어둔다. 다시 화가인 고사기(高士奇)는 강희 29년(1690년) 600금을 주고 사들인다. 후에 송강의 왕홍서가 원가로 사들이고, 고, 왕은 모두 수장인을 찍었다. 옹정6년(1728년)에 왕홍서가 병으로 죽자, 이 그림은 양주로 흘러가 천금의 가격에 시장에 나온다. 이 때 천진의 소금상인 안기(安岐)가 옹정 13년(1735년)을 전후하여 이를 사들인다.
건륭 11년(1746년)에 서화를 좋아하던 건륭제는 이 그림을 매입한다. 건륭은 서화에 능했을 뿐아니라 감상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명권>>을 진품이라고 감정한 바 있었는데, 다시 사들인 <<무용사권>>은 가짜라고 감정하고 석거보급차등으로 정하여 궁중에 보관한다. 이후 가경제때 호경에 의하여 석거보급삼편으로 승급되어 계속 보관되다가 1949년경 국민당정권에 의하여 대만으로 옮겨가서 대만의 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다.
<<부춘산거도>>의 진품, 위품 논쟁은 청나라 건륭제에 의하여 한번 벌어지게 된다. 건륭제는 건륭29년(1764년)에 진위논쟁에 대하여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글을 쓰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륭10년(1745년) 겨울에 황공망의 <<산거도>>(자명권)를 얻었는데, 필묵이 창고하고 진품이었다. 그런데 다시 심덕잠이 쓴 시문의 원고를 보던 중에 그가 쓴 부춘산거도 발문을 보게 되었고, 안기의 집안에 도 다른 한권의 황공망이 그렸다는 <<부춘산거도>>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륭11년(1746년) 겨울에 안기의 집안에서 <<부춘산거도>>가 당시의 대학사인 푸항의 집안으로 유입되었으며, 다시 푸항의 소개로 청황실에서 매입하게 되었다. 그림을 개략 봤더니 역시 황공망의 <<부춘산거도>>였고, 다섯개의 발문이 심덕잠의 글과 일치하였도 다시 동기창의 발문을 보니 역시 예전의 <<산거도>>에서 본 것과 일치하였다. 내관에게 <<산거도>>를 가져오게 하여 보니 과연 발문, 제문이 일치하였다. 다음 날 양시정등에게 명하여 진위를 가리도록 지시하니, 모두 <<산거도>>가 진품이고 <<부춘산거도>>가 가짜라고 하였다. 심덕잠, 고사기, 왕홍서 등은 모두 감상의 전문가들이면서도 모두 잘못 보았던 것이다. 원래 <<산거도>>는 부춘이라는 글자를 빠뜨린 것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진짜를 진짜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건륭제는 <<부춘산거도>>(무영사권)도 작품이 뛰어나다고 보고, 궁중에서 사들여 보관하기로 결정한다. 건륭제가 먼저 <<산거도>>(자명권)가 진품이라고 한 바 있으니, 당시의 신하들로서는 건륭제의 뜻에 거스릴 수가 없어 모두 건륭제의 뜻에 따라 <<산거도>>가 진품이고 <<부춘산거도>>는 가짜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명권>>에는 "子明隱君將歸錢塘, 需畵山居景, 圖此贈別(은거했던 자명이 전당으로 돌아가니 산에서 거주하던 모습을 그려 이로써 떠나는 사람에게 준다)"이라는 글이 적고 "大痴道人公望至元戌寅秋(대치도인 공망이 지정 술인년 가을에 그리다)"라고 적혀 있어 <<자명권>>이라 부른다. 앞에는 동기창의 발문이 있는데, 두 개의 발문을 비교하면 자명권에는 "억장안"으로 시작하는 55글자가 적다. 그림의 끝부분에는 명나라 성화연간의 유각의 감상기가 있고, 추지린의 단구와 공악의 발문이 있다. 건륭제때 심덕잠이 양쪽의 발문을 보고 일찌기 <<산거도>>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다. 그는 자명이 임인발(任仁發)이라는 것을 고증한 후, 임인발은 자가 자명이고 상해 청포 사람인데, 황공망과 동시대의 화가이면서 수리전문가였고, 일생동안 관직에 머무르고 은거하였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자명권>>은 건륭제에 의하여 진품으로 인정받은 후, 이 그림을 매우 아껴, 궁중에 두고 항상 보았을 뿐아니라 바깥에 나갈 때도 가지고 나갈 정도였다. 1745년부터 1794년까지 전후 54회에 걸쳐 건륭제가 이 그림에 낙관을 찍고 글을 남겨, 크고 작은 도장이 많이 찍혀 그림의 가치를 오히려 많이 깎았다. 대신, <<무영사권>>에는 양시정을 시켜 글을 쓰게 한 이외에는 일체 건륭제가 낙관등을 찍지 않았다.
건륭제의 진위판정은 약 200년간 권위를 발했으나, 결국 근대에 이르러 오호범에 의하여 뒤집히게 된다. 오호범은 연구를 통해, 민국28년(1939년) <<잉산도>>의 앞쪽에 쓴 글이 황공망의 친한 친구인 장우의 글인 "산천혼후, 초목화자"의 여덟글자를 전서로 쓰고 작은 글씨로 "화원의 묵황 대치의 제일 신품 부춘산도, 기묘원일..."이라는 글을 덧붙였다. 이로서 다시 한번 <<부춘산거도>>의 진위논쟁이 벌어졌는데, 미술계에서 수십년간의 논쟁끝에 나온 결론은 <<무용사권>>이 진품이고, <<자명권>>은 위작이라는 데 대체로 일치를 보고 있다. 다만, <<자명권>>의 예술가치도 매우 높다는데에도 의견이 일치하였다.
<<무용사권>>을 진품으로 인정하는 근거는 다음의 몇 가지 였다. 첫재, 화면자체이다. 구도에서 三遠(深遠, 高遠, 平遠)을 구비하였고, 그림의 내용이 스스로 쓴 발문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둘째, 제발문. 스스로 쓴 발문외에 다른 사람의 발문도 대부분 명가의 것들이고 내용도 풍부하며 그림과 일치한다. 그러나 <<자명권>>의 경우에는 내용이 빈약하며, 그림의 내용과 떨어져 있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무용사권>>의 제발문이 수장가들의 수장과정이 더욱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셋째, 수장기록과 도장기록. 원나라때부터 진본의 평가나 유전기록이 있고, 명, 청때에는 매우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이것과 제발문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림 오른쪽 위의 오지구의 도장은 가장 유력한 증빙으로 본다.
한편, <<잉산도>>가 <<무용사권>>에서 떨어져나간 진품인지 아니면 후세의 위작인지에 대하여도 의론이 분분하다. 첫째, 두 그림은 위의 도장부분은 일치하지만 아래의 산 그림은 겹쳤을 때 잘 맞지 않는다는 점, 둘째, 종이색과 먹의 색이 다르다는 점, 셋째, 준법(그림그리는 기법)이 다르다는 점등을 들어 <<잉산도>>는 위작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이 부분은 아직 두 그림이 하나는 대만에 하나는 절강성에 있어 서로 직접 비교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한동안은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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