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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by 중은우시 2005. 8. 24.


<<청명상하도>> 우표

 


<<청명상하도>>중 핵심부분인 무지개다리(홍교) 부근

 

<<청명상하도>>는 북송때의 인물풍속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자인 장택단(張擇端)의 일생내력에 대하여는 아는 게 많지 않다. 단지 그는 학자였고, 나중에 회화를 배워서 휘종(徽宗)때 궁중화가로 활약했다는 정도이다. 그는 <<청명상하도>>외에 <<서호탈표도(西湖奪標圖)>>도 그렸는데, 서호탈표도에서 그린 내용은 항주의 서호가 아니라, 당시 북송의 수도였던 변경(卞京, 현재의 하남성 개봉)의 금명지(金明池)에서의 청명절 때 용주 시합을 그린 그림이다.

 

<<청명상하도>>나 그려진 것은 북송시대의 인물화가 장기간 발전해온 결과이고, 당시 세속의 생활에서 제재를 뽑아서 그린 선구였으며, 오늘 날 볼 때, 그림의 내용은 아주 귀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청명상하도>>에서 그린 것은 청명절때 변경성의 변하([水+卞]河)변의 아주 시끌벅적한 풍경을 그린 것이다. 화가는 변경성의 동문대가와 동문바깥의 변하의 번화한 풍경을 아주 상세히 묘사하였는데, 각양각색의 점포와 형형색색의 인물이 있고, 가마를 몰고 배를 저어 노는 광경이 있다. 그림을 펼치면, 강남에서 공물을 싣고 오는 배가 줄줄이 이어져 있고, 거대한 조운선이 홍교(무지개다리) 밑을 지나가고 있으며 배위와 다리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시끄럽게 생활하는 모습이 그림 위에 펼쳐져 있다.

 

<<청명상하도>>를 제일 처음에 수장한 사람은 송휘종이었다. 송휘종은 그림에 그의 독특한 수금체(瘦金體)로 청명상하도라는 제목을 썼다. 정강의 변때 청명상하도는 북송황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다른 서화들과 함께 금나라에 빼앗겨 버린다.

 

이후 명나라에 들어서 <<청명상하도>>는 육완(陸完)의 수중에 들어간다. 육완이 죽은 후에는, 그의 부인이 그림을 베게에 넣고 꿰매어 버리고, 자신의 목숨처럼 아꼈으며, 친아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육부인의 조카중에 왕씨성의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그림을 잘 그렸고, 유명한 인물들의 서화를 좋아했다. 육부인이 집안에 <<청명상하도>>를 수장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여러번 부탁해서, 육부인이 결국은 보여주게 된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을 못하게 하였다. 왕은 10여번 본 후에 그림을 모방하여 한 폭 그리게 된다.

 

명나라때의 간신으로 유명한 엄숭(嚴嵩)은 이 때 사방으로 <<청명상하도>>를 손에 넣기 위해 찾았는데, 마침 왕도어사라는 사람이 800냥을 들여 왕모로부터 모방한 청명상하도를 입수하고, 엄숭에게 바친다. 엄숭이 그림을 표구하도록 맡기자, 표구하는 사람은 모방품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왕도어사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다 거절당한다. 표구상은 일부러 가짜임을 드러내도록 표구하여, 엄숭이 손님들앞에서 그림을 보여주다 망신을 당한다. 이후 엄숭은 왕도어사를 모함하여 죽여버린다. 왕모도 연루되어 감옥에서 굶어죽는다. 이 이야기는 널리 퍼져, 이후 <<일봉설전기>>라는 극본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사실은 육완이 죽은 후, 육완의 아들이 돈이 필요해 그림을 팔아버리는데, 곤산의 고정신(顧鼎臣)이 이를 매입한다. 이후 엄숭과 그아들 엄세번(嚴世蕃)에게 빼앗긴다. 엄숭 부자가 탄핵을 받아 가산이 몰수되면서 <<청명상하도>>는 명황실로 들어간다.

 

청나라에서도 <<청명상하도>>는 몇번의 곡절을 겪는다. 우선 수장하게 되는 사람은 육비서(陸費犀)이다. 그는 안휘 상향 사람이며, 건륭제때 진사를 지낸 사람이며, 청명상하도에 발을 쓰고 도장을 찍어둔다. 오래지 않아 그림은 필원(畢沅)의 손에 들어간다. 필원은 강소 태창 사람으로 역시 건륭제때의 진사이다. 필원은 금석과 서화를 좋아하여 많은 서화를 소장한다. 그는 <<청명상하도>>를 매입한 후, 동생인 필룡(畢龍)과 함께 낙관을 찍어둔다. 필원이 사망한 후 얼마되지 않아, 청황실은 필원이 호광총독을 지낼 때 직무유기와 군비남용을 하였음을 들어 가산을 몰수한다. 이 때 그림은 청황실로 들어간다. 청황실에서는 <<청명상하도>>를 자금성의 영춘각에 걸어두며, 이후 1860년의 영국프랑스연합군의 침입과 1900년의 팔국연합군의 칩입때도 빼앗기지 않고 살아남는다.

 

1911년 선통제 부의의 퇴위이후, 그림은 부의가 동생 부걸에게 상으로 내리고, 그림은 천진조계의 장원(張園)에 걸어둔다. 1932년 만주국을 세우면서 그림은 다시 장춘으로 가져가 동원 도서루에 걸어둔다. 1945년 8월 부의가 장춘에서 도망치면서 만주국황실의 많은 서화와 보물들이 민간에 흩어지게 된다.

 

1946년 중국인민해방군이 장춘을 점령한 후, 해방군 간부인 장커웨이(張克威)는 지방간부들을 통하여 만주국황실에서 흘러나온 유물 수십점을 수집하는데, 거기에 <<청명상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7년에 장커웨이가 동북행정위원회로 전근가면서 <<청명상하도>>를 비롯한 서화들을 당시 동북지방의 주요한 지도자중의 한 명인 린펑(林楓)에게 넘겨준다. 린펑은 <<청명상하도>>를 동북박물관에 넣고, 북경점령후, 그림은 다시 북경의 고궁박물관으로 보내진다. 오랜 동안의 방랑을 거쳐 <<청명상하도>>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