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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한희재야연도(韓熙載夜宴圖)

by 중은우시 2005. 8. 24.


<<한희재야연도>>

 

 

 

 

 

 

<<한희재야연도>>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물화 걸작중의 하나이다. 그림은 한희재의 집안에서 거행된 밤 연회때의 정경을 그린 것이다. 그림은 병풍이나 벽등으로 칸을 나눈 다음에 음악듣는 장면, 춤을 구경하는 장면, 휴식하는 장면, 헤어지는 장면등 관련되면서도 서로 독립된 5개의 장면을 담고 있고, 모두 46명의 다른 인물의 형상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 한희재는 그림의 가장 중심에 놓여 있고, 5개의 장면마다 반복하여 출현한다. 그런데, 5개의 장면에서마다 표정이나 동작은 모두 다르다. 다른 인물의 묘사도 매우 세세하고 정교하며, 그들의 서로 다른 신분지위와 성격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에는 인물 외에도 가구, 식기도구, 악기등의 사물도 잘 그려 중국회화사 및 공예미술사 및 음악, 무도등의 면에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그림을 그린 배경에 대하여는 두가지 전설이 있다.

 

하나의 전설은 5대10국때 북방에 한희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학문이 뛰어나고 시서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한희재는 부친에 사건이 생겨, 연루될 것을 두려워하여 강남으로 도망쳤으며, 이후 강남에 거주하며 남당에서 관직을 받아서 살았다. 한희재는 생활이 호화방탕하였으며, 처첩을 40여명을 두었다. 그런데, 그의 녹봉으로는 40명의 처첩을 먹여살릴 수가 없어져서, 처첩들이 하나 둘 분가해나갔다. 나중에는 스스로도 매우 궁핍해져서, 거지복장을 하고, 분가하여 독립한 처첩들 집을 찾아가서 밥을 얻어먹곤 하였는데, 본인은 이를 매우 즐겼다고 한다. 한희재가 중간에 관직에서 쫓겨났는데, 남당의 황제인 이후주(李後主)는 다시 등용할 생각을 가졌다. 한희재의 평판이 나빠 조정에서 논란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평소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궁중화가인 고굉중(顧閎中)을 시켜 그려오게 하였다. 이 때 고굉중이 밤에 연회를 베풀며 즐기고 있는 한희재의 모습을 그린 것이 <<한희재야연도>>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전설은 당시에 남북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북방의 후주는 시시때때로 남침을 하곤 하여, 남당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후주 이욱은 북쪽에 화해를 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부방어를 강화하였는데, 북방에서 남으로 내려온 관리들에 대하여 의심을 하고 경계를 하였다. 한희재는 북방에서 남방으로 건너와 관리로 지내고 있었는데, 본인은 정치적인 야심은 전혀 없었고, 그저 북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남쪽에 내려온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아무런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어, 스스로 취생몽사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이후주가 안심하도록 하였다. 고굉중이 그가 밤에 즐기는 모습을 담은 <<한희재야연도>>를 그려 이후주에게 보여주자, 이후주는 안심하였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이후 궁중에서 계속 전해지다가, 마지막 황제 부의가 이 그림을 장춘의 만주국 황궁에 걸어두었는데, 1945년이후에 그림이 민간으로 유출되었다. 오래지 않아, 그림은 다시 북경에 나타났다. 이 때 중국근대의 유명한 화가인 장대천(張大千)은 마침 청왕부집이 매물로 나와서 이를 사기 위해 계약금까지 지불한 상태였는데, 북경 옥지산방(玉池山房)에서 <<한희재야연도>>를 구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 소윤중(蕭允中)을 데리고 바로 옥지산방으로 달려간다. 옥지산방의 주인인 마제천(馬霽天)은 장대천과 그 제자가 오는 것을 보고는 바로 맞이해서, 조심스럽게 <<한희재야연도>>를 보여준다. 장대천은 즉석에서 구매하기로 결정하고, 마제천은 가격으로 황금500냥을 불렀고, 장대천은 즉석에서 응락한다.

 

마제천은 장대천을 믿고, 장대천에게 그림을 건네주었으며, 장대천은 그림을 갖고와서 오랫동안 살펴보고 이 그림을 절대 진품이라고 인정한다. 이 때 "집이야 나중에도 또 있지만, 이 그림은 한번 사라지면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음날 바로 돈을 지급한다. 장대천은 이 그림을 손에 넣은 후 매우 아껴서 "니연루([日+尼]宴樓)"라는 전각을 새기고, 나중에 다시 "東南西北, 只有相隨無別離(동남서북 어디를 가나, 같이 다니고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도장도 새긴다.

 

장대천은 일생동안 자신이 모은 서화는 보물로 여기고, 상대가 중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절대 팔지 않았다. 그런데 1951년 장대천이 홍콩에서 해외로 이주하기 전에 매우 놀라운 결정을 하게 된다. 즉, 자신의 수집품중 가장 뛰어난 작품 3가지 <<한희재야연도>>, 오대 남당 동원(董源)의 <<소상도(瀟湘圖)>>, 원나라 방종의(方從義)의 <<무이산방도도(武夷山方棹圖)>>를 아주 싼 가격으로 친구에게 팔아버린 것이다. 그가 판 가격은 시장가격에 훨씬 못미치는 싼 가격이었다. <<한희재야연도>>에 대하여 겨우 미화2만달러만을 받는다. 일전에 북경의 왕부한채 값이었던 황금 500냥을 주고 샀을 뿐아니라 평생 가장 아꼈던 수장품인데 이렇게 헐값에 넘긴 이유를 모두 궁금해 하였다.

 

장대천이 이렇게 한 이유는 나중에 밝혀지게 되는데, 원래 장대천은 해외로 이주하면서 국보를 유실시켜 천고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홍콩에 있는 친구에게 헐 값에 넘기면서, 후에 그림을 중국정부에 넘기도록 요청하였던 것이었다. 이 친구는 후에 주은래의 지시를 받고 온 중국 사회문화사업관리국 국장인 정진탁(鄭振鐸)에게 장대천에게 구매했던 원가로 3개의 국보급 그림을 넘겨준다. 이로써 <<한희재야연도>>는 중국에 남아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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