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정화)

정화(鄭和)의 해양원정과 관련한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05. 8. 21.

정화(鄭和)는 명나라때의 환관으로 선단을 조직하여 당시 동남아, 서남아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원정하였다. 올해는 정화가 원정에 나선지 600년이 되는 해이다. 정화의 원정과 관련하여서는 많은 기록들이 명나라때 소실되어 해결되지 않은 여러가지의 수수께끼들이 남아 있다.

 

첫째 수수께끼. 대호보선(大號寶船)은 존재하였는가?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정화가 원정을 떠난 선단에서 가장 큰 보선은 길이가 44장4척, 너비가 18장, 적재중량이 800톤에 이른다고 한다. 이 배의 쇠로 된 키는 이삼백명이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치수로 계산하면 이 보선은 길이가 138미터, 너비가 56미터에 이른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큰 거대한 목선은 명나라때 제조가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다른 전문가들은 명나라 영락제때 가장 큰 목조건물인 태화전이 길이 63.96미터, 깊이 37.20미터, 높이 35.05미터이멌는데, 일개 환관이 타는 배를 이것보다 크게 만든다면 그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므로 불가능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중국의 선박전문가인 정명은 대호보선은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바다에 띄운 적은 없다고 본다. 정명은 이런 큰 배는 실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단지 황제어용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바스코다가마가 희망봉을 발견하였을 때의 몰고간 배는 겨우 4척이었고, 최고 큰 배가 120톤 길이가 25미터에 불과하였다는 것과 비교하면 대호보선은 엄청난 크기의 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수수께끼. 대호보선은 얼마나 컸는가?

 

학술계에서 대호보선이 길이 44장4척, 너비 18장의 치수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정화의 보선의 길이와 너비의 비율이 균형이 맞지 않음을 지적한다. 즉, 2.4666:1의 비율로 배를 만들었더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직사각형의 상자와 같은데, 현존하는 어떤 중국이나 외국의 배도 이렇게 허리가 두꺼운 경우는 없으므로, 이런 보선의 형상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보선은 얼마나 컸는지? 남경의 중보촌 명나라때의 조선창유적은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명나라때의 관용조선소였다. 1957년 발굴한 바에 따르면 길이기 11.07미터인 키막대, 1965년에는 길이 2.21미터인 묶음나무, 2003년, 2004년에는 길이가 각각 10.1미터, 11미터인 나무키막대가 발견되었다. 이것만으로 정확한 배의 크기를 계산할 수는 없지만, 다만 배가 엄청나게 컸다는 것은 추정할 수 있다.

 

셋째 수수께끼. 대호보선은 단지 전시용이었는가?

 

<<천비경>>에 따르면 정화가 원정한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그림의 배 모습이나 무비지에 기재된 배모양을 보면 당시 원정대의 주요 배는 대호보선은 아니었고, 길이가 약 61.2미터, 너비가 13.8미터인 2000료짜리 보선이나 그것보다 적은 해선이었다. 삽화는 2개인데, 이것은 2000료짜리 배가 정화가 원정에 나선 주요한 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대호보선이 참가하였다면 당연히 주인공으로 그려져 있어야 하나, 삽화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당시 정화가 탔던 배는 무엇이었을까? 1920년대에 역사학자인 정학성이 정해사 주방의 벽에서 탁본뜬 정해사잔비의 비문에 보면 관군이 탄 배중 최대의 것은 2000료해선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료는 용적단위로 명나라 사료상 400료, 500료짜리 배의 규격에 비추어보면, 2000료짜리 배는 61.2미터, 13.8미터의 배이고, 배수량이 1000여톤이 된다.

 

넷째 수수께끼. 선단은 어떻게 편성되었는가?

 

정화가 원정갈 때의 선단의 배는 48척에서 208척 사이였다. 정화가 이끈 이렇게 방대한 선단이 바다에서 어떤 형태로 움직였는지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

 

항행의 안전거리는 해선의 속도에 좌우되는데, 속도가 빠를 수록 거리는 넓어야 하고, 속도가 느릴 수록 반대로 거리는 짧아도 된다. 현재의 항해기술로 보면, 해상항행시 배와 배간에는 좌우전후의 거리가 일반적으로 555미터 정도는 되어야 한다. 당시 200척 좌우의 선대를 편제하면 약 10평방킬로미터의 면적에 이르게 된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고증하는데 어려움은 있지만, 전문가들의 추측으로는 물고기형의 편대를 하였을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제비형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