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황노사(黃老邪)라는 사람이 2006년 1월 17일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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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폭의 중국 청나라때의 <<천하전여총도(天下全輿總圖)>>라는 지도는 다시 세계의 눈을 집중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이 지도의 주해에는 지도의 일부 문자와 지도모양은 명나라 영락 16년 즉 1418년의 지도에서 따 왔다고 하기 때문이고, 이 때는 정화가 항해를 한지 13년째 되는 해였다.
만일 주해가 사실이라면, 역사는 영국퇴역장교인 개빈 맨지스가 고증한 바와 같이. 정화시대에 중국은 아메리카대륙과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정화와 맨지스에 대한 연구는 내가 2년전부터 시작했다. 정화항해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친구와 하나의 항해이벤트를 준비했다. 옛날 범선을 몰고, 정화가 항해했던 노선을 따라 실제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경에서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 스폰서가 이번 이벤트의 자금지원을 취소했고, 결과적으로 이번 고찰은 국내항로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고찰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반년의 시간을 들여 정화와 맨지스의 성과를 연구했다.
맨지스는 14년의 시간을 들여 120여개국을 방문하고, 900여개의 박물관과 도서관을 방문했고, 최후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정화의 선단은 콜롬보보다 70여년 전에 아메리카를 발견했고, 세계일주를 하였다. 이 결론이 발표되자, 즉시 세계는 놀라고 말았다. 그의 저서 <<1421. 중국이 세계를 발견하다>>는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60여개국가에서 발행되었으며, 헐리우드에서는 영화개작권을 사들였다. 나는 이 책을 먼저 보기 위하여 대만의 친구를 통하여 우편구매로 2권을 샀고, 한세트를 카피해서 기록하기 편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말하면, 맨지스의 관점은 90%이상이 추측과 추리이고, 1차적인 증거가 부족했다. 그리하여 양안삼지(대륙, 대만의 양안, 대륙, 대만, 홍콩의 세 지역)의 학자들은 그의 관점에 대하여 황당무계하다는 반응이었다. 나의 생각은 달랐다. 증거가 부족하다고 한마디로 매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맨지스는 최소한 우리들에게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공한 것이다.
돌아보면 정화에 대한 의문점이 많다. 첫째, 정화의 제6차 항해에서 선단을 3개로 나누었는데, 그 중의 2개의 선단은 1425년이 되어서야 차례로 중국으로 돌아왔고, 손실이 엄청났다. 3년여의 기간동안 2개의 선단은 어디로 갔던 걸까? 둘째, 정화가 사망한 후, 명정부는 정화의 고귀한 항해자료를 왜 다 불태워버렸을까? 그리고 나라의 문을 걸어잠구었을까? 셋째, 중국은 예전부터 세계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었는데, 왜 정화이후에 쇄국정책을 썼을까? 거기에는 어떤 연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의 추리는, 정화의 함대는 확실이 동아프리카보다 확실히 더 먼 지역까지 항해하였다는 것이다. 세계일주까지 하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고, 그들이 본 것은 야만과 황량함 뿐이었다. 즉 암흑과 연옥이었다. 명, 청 양대의 통치자들은 중국이 하늘이 내린 나라이고, 문명의 중심이라는 결론을 얻었고, 문을 걸어닫는 것이 열어두는 것보다 더욱 안전하고, 국운이 더욱 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옥의 문으로 향하는 일체의 자료를 불태우고 450년을 쇄국으로 일관한 것이 아닐까?
지도를 보면, 현존하는 정화의 항해도는 <<무비지>>에 인쇄되어 있어, 다행히 남아있을 수 있었다. 작성방법은 평면선묘이고, 현대적인 투영제작방식의 지도와는 다르다. 학자들은 그래서 정화의 항해도를 근거로 <<천하전여총도>>가 영락제때의 중국에서 만든 것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이런 판단은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시 한번 주원장시대에 중국에서 만든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과 그 후 얼마되지 않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보면, 그림중의 아프리카 서안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아무도 이 두 개의 지도가 유럽 것을 베낀 것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나는 추리의 방법으로 중국이 세계를 발견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듯이. 마찬가지로 추리의 방법으로 중국이 세계를 발견하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현재 역사연구에는 하나의 오해가 있다. 우리는 현대의 눈으로 조상의 지혜를 형량하는 경향이 있다. 무릇 현대기술이 달성할 수 없는 것은 당연히 고대사회에도 실현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하전여총도>>와 같은 것이나, 예를 들어 위성항해장치없는 무동력항해술이나, 예를 들어 정화의 보선과 같은 것들이다. 비록 정화의 보선에 대한 자료는 충분하지만, 학자들중 다수는 정화시대에 그렇게 대규모의 목재범선을 만들 수 없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현대의 하이테크기술을 쓰더라고 그렇게 큰 목제범선은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최근 몇년간에 출토된 문물들은 정화의 보선의 규격은 확실히 역사자료에 나와 있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멍청함을 가지고 조상도 분명이 바보였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외에, 중국이 세계를 발견하였는지, 중국이 세계를 발견하였는지 이것은 단지 학술적인 논쟁이다. 우리는 이것때문에 기뻐할 필요도 없고, 스스로 자괴감에 빠질 필요도 없다. 중국은 청나라 중기이후에 세계에 뒤떨어졌다. 영락제시기에는 확실히 세계를 앞서갔다. 이것이 역사이고 아무도 바꿀 수 없다. 마찬가지로, 조상이 현재의 중국에 얼마나 많은 영광을 주었던지, 중국이 아메리카를 발견했던지, 호주를 발견했던지, 중국은 어쨌거나 세계를 바꾸지 못하였다. 호주나 아메리카는 중국의 육백년전의 방문으로 인하여 번성한 것도 아니다. 반대로, 역사상의 진실한 기록은 중국의 첫번째 이민은 발견자의 신분이 아니라 노동자의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국이 세계를 발견했느냐는 논쟁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의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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