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보시비
정화보시비의 탁본
작자: 미상
명나라 영락제때 정화(鄭和)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범선으로 이루어진 선단을 이끌고 15세기초의 인도양을 가로질러갈 때, 당시 선단에 있던 사람들은 석란산(錫蘭山)이라고 부르고, 지금은 스리랑카로 불리우는 곳에 여러번 정박했었다. 스리랑카에서는 정화보시비(鄭和布施碑)가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 상륙지점은 불명확
"정화포시비"의 발견지점은 스리랑카의 남부해안도시인 Galle시의 크립스로드에 있다. 이 길은 약1킬로미터의 길이에 구불구불하여 보통의 길거리와 별다른 점을 찾아볼 수는 없다.
15세기의 콜롬보는 작은 어촌이며 소형무역집산지였다. 콜롬보에서 남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곳, 지금의 스리랑카의회가 소재하고 있는 곳은 이미 흥성하였고, 15세기초에서 16세기중엽에 스리랑카 승가라국 코티왕국의 수도였다.
14세기이래로, 스리랑카의 정국은 계속 불안정했다. 여러개의 권력핵심이 존재하였다. 당사의 역사기록을 보면, 정화는 주로 코티왕조(1412-1580)와 교섭했다. 정화는 콜롬보에도 갔을 것이고, 코티에도 갔을 것이다. 그런데 콜롬보에서 120킬로미터나 떨어진 Galle은 아마도 그가 처음으로 상륙한 곳일 것이며, 나중에 그를 위하여 비석을 세워 행적을 기록한 곳일 것이다. 정화보시비는 처음에는 Galle시의 어느 사원에 있었는데, 나중에 세월이 흐르고, 전란이 겹치면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1911년에 도로공사시에 엔지니어인 토마린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당시 비문이 아래로 향하게 크립스로드의 한 파이프관을 덮고 있었다. 스리랑카가 독립한 후, 이 비석은 현재 스리랑카국립박물관에 보내졌다.
2. 7번 지나며 6번 상륙
중국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정화는 1409년, 1410년과 1416년의 세번에 걸쳐 '하서양(下西洋, 중국은 말라카해협 서쪽을 서양이라 불렀다)'을 할 때, 스리랑카를 방문하였다. 이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서로 다른 설명을 한다. 어떤 학자는 정화의 선단은 7차의 하서양중 정화는 제2차때는 선단을 따라가지 않았으므로 정화본인은 실제로 6번 스리랑카에 상륙했다고 한다.
정화는 1405년에서 1407년에 처음으로 스리랑카에 도착한다. 이 때 코티지구의 통치자인 베라. 아라카스베라로부터 적대적인 대접을 받는다. 그리하여 바로 떠나게 된다. 제2차는 1407년에서 1409년인데. 정화의 선단은 스리랑카의 국경을 지나가고, 인도의 Calicut 즉, 당시의 고리국이다. 비록 정화는 선단의 최고지휘자였지만, 이때는 배를 같이 타고 따라가지 않았었다. 제3차는 1409년-1411년이다. 이때 정화는 두번째로 스리랑카에 상륙한다. 이때 정화는 이 '정화포시비'를 가져왔을 뿐아니라, 코티국왕과 충돌도 일어난다. 제4차는 1413-1415년이다. 정화의 선단은 스리랑카에 두 갈래로 나누어 상륙한다. 한 갈래는 서북으로 가서 호르무츠해협지구로 향하고 다른 한 갈래는 지금의 방글라데시로 향한다. 제5차는 1417-1419년이다. 정화의 이번 항해목적은 주로 19개국가의 외교사절을 귀국시키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스리랑카의 외교사절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6차에도 정화는 스리랑카에 도착한다. 제7차는 1431년-1433년이다. 정화선단은 1432년 11월 28일, 콜롬보 남쪽 약 60킬로미터 지점의 Beruwala에 상륙한다. 그리고 1432년 12월 2일 인도의 Calicut로 향한다.
3. 3개문자로 쓴 비문
스리랑카의 관련학자들이 제공한 시간표에 따르면, 정화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극적인 활동은 그의 두번째 방문(제3차 하서양)때 있었다.
정화의 활동에 대하여는 중국사료에도 기록이 있다. <<명사>>에 따르면, "6년 9월, 다시 석란산(스리랑카)로 간다. 국왕 아열고내아는 정화를 유인하여 나라안으로 데려가서, 금과 돈을 요구하고, 병사를 일으켜 정화의 배를 빼앗았다. 정화의 선단에서는 적의 많은 무리가 나와서 국내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는 이천여명을 이끌고 허를 찔러 그 성을 격파했고, 아열고내아와 그의 처자등을 생포했다. 정화의 배를 강탈한 자들이 이를 듣고는 돌아와서 구하려고 하였으나, 관군이 다시 크게 무찔렀다. 9년 6월, 포로를 조정에 바쳤다. 황제는 죽이지 않고 죄를 사해주었으며, 석방해서 귀국시켰다" 전체 왕실이 정화에게 체포되었던 '아열고내아'가 바로 코티의 국왕인 베라 아라카스베라였다.
베라는 비록 승가라국의 국왕이지만 불교를 믿지는 않았다. 그는 현명한 군주는 아니었고, 현지인들 사이에 명망도 높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시 명나라는 왕실에 압력을 가해서 적당한 다른 사람으로 왕위를 대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직접간섭하에, 파라가라마파홀 6세가 왕위에 오른다. 사료의 기록에 의하면 이 파라가라마파홍 6세는 스리랑카 고대역사상 가장 현저한 공을 세운 군왕이 된다.
정화의 또 하나 의미있는 활동은 그가 바로 유명한 "정화보시비"를 가져왔고, 이 비석을 이 "광명과 부유의 땅"에 영원히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정화보시비"는 높이가 145센티미터, 너비가 76센티미터, 두께가 13센티미터가량이다. 윗부분에는 살아있는 듯한 용의 도안이 새겨져 있다.
정화를 따라 나섰던 비신이 쓴 <<성사승람>>이라는 책에 의하면, "정화보시비"는 1409년 정화가 스리랑카에 도착해서 새운 것이다: "영락7년, 황상은 정사 태감 정화등으로 하여금 명을 받들어, 금은....직금보번을 절에 보시하고 석비를 보내었다"로 되어 있다.
이 석비가 관심을 끄는 점은 비문이 중문, 타밀어, 페르시아어의 3종언어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문의 비문에서 쓴 내용은 정화등이 명나라황제의 명을 받아 파견되어 스리랑카에 와서 성지를 순례하고, 향을 보시하고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이 기재되었다. 뒷면에는 목록이 있다. 비문의 낙관은 영락7년2월, 즉 1409년 2월이다. 타밀어의 비문은 남인도 타밀인들이 믿는 바라문교의 보호신인 비시누에게 바치는 것이다. 페르시아어의 비문은 이슬람교를 믿는 알아에게 보내는 존경의 뜻이 담겨져 있다. 이 두 문자는 대체로 정화일행이 두 종교의 신령들에게 바치는 제물의 내용을 담고 있다.
4. 평등관용정신
중국과 페르시아 양국의 관련기재를 보면, 정화가 두번 스리랑카를 갔을 때, 현지에서 저지를 받았다. 그러나 결국은 잘 해결되었다. 이후 스리랑카와 명나라는 관계가 더욱 밀접해 졌고, 빈번하게 사신을 보냈다.
"정화보시비" 및 정화의 스리랑카방문의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는 무슬림인 정화는 석비에 3가지 종교를 대상으로 하여 동일한 존경과 예를 표했다는 점이다. 이 비석은 한편으로는 정화와 명나라통치자들의 각국의 종교에 대한 존중과 관용성을 보여주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화일행은 그들의 경제문화교류가 종교대립에 따른 불리한 영향을 받지 않고자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석비는 정화와 당시 명나라황제의 평등관용정신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화이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영국인이 차례로 스리랑카로 들어온다. 정화의 호혜평등, 상호왕래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이들 식민주의자들은 스리랑카의 풍부한 물산을 두고 피튀기는 전투를 벌였는가 하면, 스리랑카인들을 천주교, 기독교로 개종하게 하여, 스리랑카인민들의 반발과 반항을 불러왔다.
정화가 항해한지 얼마되지 않아, 명나라이후의 황제들은 영락제와는 전혀 다른 정책을 취한다. 중국은 이때부터 폐쇄정책을 쓰고, 짧았던 해상왕국의 영광은 끝이 난다. 지금 거의 모든 스리랑카인들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인들이 스리랑카에 왔었다는 것은 알지만, 중국인들이 왔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것은 명나라, 중국에게는 하나이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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