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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정화)

정화(鄭和)는 어떻게 해적을 소탕했는가?

by 중은우시 2008. 12. 25.

 

 

 

글: 촉인삼지안(蜀人三只眼)

 

명나라 영락연간(1403-1424), 명나라의 국력은 날로 강성해졌다. 경제실력, 조선기술, 항해경험이 모두 대규모의 항해활동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했다.

 

황제 주체는 웅심장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명나라초기의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대외정책에 만족하지 못했고, 다른 나라에 국가의 위엄을 떨치고, 명나라의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황제에 오르자, 바로 사람을 주변국가에 보내어 조공을 바치도록 요구했다.

 

당연히, 어떤 역사학자들은 주체는 주로 행방불명된 조카 건문제 주윤문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주체는 주윤문으로부터 황제위를 빼앗았다. 그리하여 주윤문이 되돌아올까봐 많이 우려했다. 그리하여 그는 강대한 진용의 해상함대를 만들어 "서양(西洋: 여기서 서양은 말라카해협의 서쪽의 인도양을 가리킴)"으로 가도록 하였다.

 

북경해양출판사가 2005년에 출판한 <<정화하서양자료회편>>의 소개에 따르면, 정화의 원래 성은 마(馬)이고 회족이다. 주체가 아직 연왕(燕王)으로 있을 때, 거세를 하고 왕부에 들어가 모셨다. 주체를 따라 거병에 참가하여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정(鄭)씨성을 받았다. 그의 본명은 삼보(三保)였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그를 "삼보태감(三保太監)"이라고 불렀다. 명성조는 그의 충성과 재능을 아주 깊이 신뢰했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사람을 이끌고 이 방대하고 항해거리가 먼 어려운 임무를 맡긴 것이다.

 

1405년 7월 11일, 흠차정사 총병태감 정화는 명성조 주체의 조서를 받아 선대를 조직하여 서양으로 떠난다.

 

정화는 208척의 선함으로 구성된 방대한 선단을 이끌고 관병 27,800명을 이끈다. 남경이 용강항에서 출발하여, 강소 태창의 유가만에서 편대를 집결시킨 다음 복건 장락의 태평항에 정박하면서 동북계절풍이 불기를 기다린다. 겨울에 동북계절풍이 불어왔다. 정화선단은 복건 민강입구 오호문에서 정식으로 돛대를 올리고 출발한다. 남중국해의 서부연안해역을 지나, 먼저 월남의 점성(占城, 지금의 월남 퀴농)에 도착한다. 그 후 인도네시아의 달조와(達爪哇, 지금의 자바섬),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섬의 구항(舊港, 팔렘방), 아로(阿魯, 아루), 수마트라, 남무리(南巫里, 반다아치)에 도착했다. 다시 남무리에서 출발하여, 인도양의 방글라데시만을 지나 석란산(錫蘭山,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그 후에 인도반도를 돌아, 차례로 인도의 소갈란(小葛蘭, 지금의 Quilon), 가지(柯枝, 지금의 Kochi), 고리(古里, 지금의 Calicut)에 도착했다.

 

정화는 Calicut에서 수일간 정비한 후, 현지에 기념비를 세운다. 비문에는 "그 나라가 중국과 십만여리 떨어져 있다....이 비석을 새겨 영원히 남긴다." 이것은 정화가 해외에 건립한 최초의 기념비이다.

 

진조의(陳祖義): 현상금이 사상최고인 수배범

 

정화의 거대한 선박 "보선(寶船)"에는 최소한 40여척의 배가 당시로서는 가장 선진적인 항해도구와 무기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대규모의 선단에, 정교한 장비를 갖추었으니, 이는 중국역사상 최초일 뿐아니라, 세계 항해사상에도 사상유례없는 것이었다.

 

선단의 군사장비는 아주 양호하고 정교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 동남아지역은 해적이 성행했다. 그들은 횡행하며 불법을 저지르고, 민간의 재물을 약탈했는데, 현지의 관청들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별명이 "해적왕"인 진조의는 조적(祖籍)이 광동성 조주(潮州)이다. 명나라 홍무연간에 온가족을 데리고 남양으로 도망가서 해적이 되었다. 이로부터 말라카를 십여년간 장악한다. 그리고 역사상 최대의 해적집단의 두목이 된다. 구성원들은 가장 많았을 때 만명이 넘었고, 전선이 근 백척에 달하였으며, 활동범위는 일본, 대만, 남해, 인도양 등지에 미쳤다. 모두 합쳐서 만척이상의 지나가던 선박이 약탈을 당했다. 명나라는 50여개의 연해 도시가 약탈당한 바 있고, 남양의 일부 국가는 심지어 그에게 공물을 바쳤다. 그리하여 명태조 주원장은 일찌기 현상금 50만냥백은을 진조의의 수급에 걸었다. 영락연간에 상금은 750만냥에 이른다.

 

알아야 할 것은 당시 명나라정부는 매년 재정수입이 겨우 1100만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조의는 유사이래 현상금이 가장 많은 수배범이 되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주원장시기의 쇄국정책은 주로 해적이 너무 창궐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해적왕" 진조의는 나중에 스리비자야(인도네시아 팔렘방 일대)의 발림방국(渤林邦國)으로 도망간다. 국왕 마나자우리의 아래에서 대장을 지낸다. 국왕이 죽은 후에는 그가 스스로 국왕에 오른다. 그리하여 발림방국의 국왕이 된다. 그는 명나라 영락황제에게 진공을 바쳤다. 그러나, 많은 공물은 본국의 항국에서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라, 빈 배로 출발하여, 가는 길에 계속 강탈하였고, 강탈한 물건을 공물로 바쳤다. 귀국할 때도 빈 배로 오지 않고 계속 약탈하며 왔다. 영락제가 가장 참을 수 없었던 점은 그가 비단 서양의 여러 소국의 배를 약탈했을 뿐아니라, 명나라의 사신선박까지도 약탈했다는 것이다. 그뿐아니라 삼광정책 즉, 모조리 빼앗고, 모조리 죽이며, 모조리 불태웠다.

 

정화선단은 해적 5000여명을 죽였다.

 

1407년, 제1차 하서양때 정화선단은 회항하면서 현지에 도착한다. 진조의는 정화의 호호탕탕한 선단에 보물이 배위에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내어 정화에게 그가 투항하겠다고 밝힌다. 이것은 거짓투항이었다. 그 후에 일거에 정화의 선단을 약탈하고자 했다. 비록 진조의의 사람수와 선박수는 모두 정화에 못미쳤지만, 그는 부하들을 격려하여 이렇게 말했다: "명나라의 선박은 비록 많아도, 배를 모는 자들은 처음으로 먼 바다까지 나왔다. 대부분은 강이나 호수에서 움직이던 군대이다. 명나라의 선박이 비록 크지만, 행동이 느리고, 지형에 익숙치 못하다; 명나라의 수군이 비록 강하지만, 여러해동안 전투를 하지 않아서, 병사들이 교만하다. 그리고 마보병이 위주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진조의는 아예 정화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태감이 도대체 뭐냐. 그리고 이 태감은 육상전투로 이름을 날리지 않았던가?

 

진조의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정화는 진조의에 대하여 일찌감치 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화의 선단이 점성을 지나온 후, 항해길에 계속 들은 것이 모두 진조의에 대한 호소였다. 더욱 행운이었던 점은 진조의의 음모를 팔렘방의 시진경(施進卿)이라는 한 중국인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소식을 정화에게 전한다. 정화는 선단에 응전을 준비하도록 지시한다.

 

진조의가 여러 해적을 이끌고 습격해왔을 때, 정화는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화공으로 해적선을 불태워 버리고, 해적 5000여명을 죽여버렸다. 이후 정화의 해군은 또한 함정을 파서 진조의등 3명을 생포하여, 뱃속에 가둬두고 명나라의 경사로 압송한다. 정화는 동남아의 해역에서 해적의 우환을 제거했고, 해상교통안전을 확보했으며, 연해인민들에게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하여 여러나라에서 칭송을 받는다.

 

정화선단은 전후 7번 하서양을 하게 된다. 1433년 4월, 정화는 마지막 하서양(下西洋)에서 귀국하는 길에 피로누적으로 서거한다. 나중에 남경 우수산에 묻힌다. 사료에 따르면 우수산의 정화묘는 사실 의관총(衣冠塚)이라고 한다. 정화의 유체는 인도의 서해안에 묻혔다고 한다. 그러나, 동남아의 화교들은 정화가 인도네시아의 삼보농(三寶壟)에 묻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가장 선진적인 무기장비를 갖추다.

 

사실, 정화의 선단은 중요한 외교임무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명나라와 해외각국간의 고정적 연락관계를 건립하는 것이다. 고대중국은 역대이래로 천조상국(天朝上國), 세계중심으로 자처했고, 주위의 소국을 약자로 보아서 자신들이 돌봐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했다. 이리하여 이들 번속국들에게 정기적으로 중국의 황제에게 신하를 자청하고 공물을 바치도록 요구한 것이다. 명성조는 막 황제에 올랐고, 합법성에 대하여 의심을 받고 있는 단계였다. 자연히 외국이 그의 지위를 승인하는 것는 국내의 관료와 백성들이 그를 따르도록 하는데 아주 중요했다. 그래서, 정화는 외국에 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주체의 조서를 읽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하늘의 뜻에 따라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이며, 사방의 번국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하며, 모두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이들 국가가 만일 조서를 받들고 조공을 하면, 일률적으로 큰 상을 내렸다. 그 후에, 정화는 다시 명나라황제를 대표하여, 전통에 따라 번국의 국왕과 중요관리들에게 직급에 따라 예물을 내려 명나라의 성의를 표시했다.

 

이외에 정화선단은 또 다른 중요한 전략적 임무가 있었다. 명나라는 전반기에 가장 큰 외래의 위협이 북방의 몽골세력과 동방의 일본왜구였다. 정화하서양은 아래와 같은 전략적 고려가 있었다. 하나는 서방과 남방에서 전략적인 동맹자를 찾아서 연락을 강화하여 북방과 동방의 침입자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둘은 명나라의 해상역량을 과시함으로써 해상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적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도 있었다. 셋은 해상에서 전략적포위를 실시함으로서 육상적대세력을 견제하고, 북방의 압력을 완화시키려는 의미도 있었다.

 

정화의 해적소탕경험: 신무(愼武)

 

정화가 해적을 소탕하는 것은 "치도(治盜)"에 중점을 두었다. 구체적인 방식은 "용병(用兵, 병력활용)은 적극적으로 다만 동무(動武, 무력사용)은 신중하게"였다.

 

정화는 진조의의 해적을 평정할 때, 민생을 중시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하여 해적이 발붙일 토양을 제거했다. 그리고 정화선단의 활동은 중국과 외국의 무역을 발전시켰다. 정화선단에는 대량의 동전, 비단, 철기, 자기등 중국의 수공예품을 싣고 있었다. 매번 한 나라에 도착하면 국왕과 관리들에게 선물하는 외에 각국의 토산품과 교환도 했다. 이들 아름답고 정교하며 드물게 보는 공예품은 많은 외국정부와 상인의 관심을 끌었고, 어떤 곳은 즉시 선단을 따라 중국으로 와서 무역활동을 했다.

 

정화는 조심스럽게 병력을 동원했다. 이는 스리랑카국왕을 대하는데서도 나타난다. 스리랑카국왕은 정화선단의 배에 대량의 금은보화를 싣고 있는 것을 보고 사념을 품었다. 그는 정화를 궁중에 불러 연회를 베풀면서, 한편으로 정화에게 금화를 강제로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병력을 동원해서 정화의 선단을 약탈했다. 정화는 위기에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는 궁성의 사병들이 모두 선단을 공격하려 빠져나가서, 성안의 병력은 비어있다는 것을 알고 급히 2000여명의 장사를 동원해서 의표를 찔러 궁성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욕심많은 국왕을 체포해 버린다. 그리고 그와 그의 처, 주요 두목을 데리고 북경으로 온다. 나중에 황제는 관대하게 그들을 풀어주고 본국으로 귀국시켜준다. 이 나라는 다시는 명나라에 불경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