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정화)

정화하서양(鄭和下西洋)의 일곱가지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07. 3. 30.

글: 유가(劉可), 후건미(侯健美)

 

600여년전에, 정화는 명성조 영락제 주체의 명을 받아, 200여척의 선박과 27,000여명으로 구성된 방대한 함대를 이끌고, 강소 태창(太倉) 유가항(劉家港)을 떠나 바다로 갔다. 이로써 서양(西洋, 지금의 말라카해협 서쪽)을 7번이가 항해하는 쾌거를 이룬다. 그러나, 관련사료가 많이 소실되어, 지금까지도 600여년전의 이 장거는 여전히 여러가지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다.

 

첫째 수수께끼 : 건문제를 찾기 위한 것이었는가?

 

정화가 험난한 고생을 거쳐, 여러번 서양으로 항해한 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역대이래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널리 알려진 주장은 정화하서양의 목적은 바로 건문제의 종적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건문제는 이름이 주윤문이고, 명태조 주원장의 장손이다. 주원장이 죽고 건문제가 즉위한 때로부터 번왕을 폐지하려고 생각한다. 1399년 6월, 연왕 주체는 "청군측(淸君側, 군주의 측근인 간신을 깨끗이 청소한다는 의미. 통상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지방제후가 내세우는 주장임)"을 명분으로 하여, "정난"을 일으키고, 공개적으로 건문제에 항거한다.  1402년, 주체는 군대를 이끌고 남경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남경이 함락될 때, 궁중에는 불이 일어나고, 건문제는 행방불명이 된다. 어떤 사람은 건문제가 중이 되어 숨었다고 한다.

 

<<명사. 정화전>>에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조는 혜제가 해외로 망명하였다고 의심하여 그의 종적을 추적하고자 했다" 범문린의 <<중국통사간편>>, 오함의 <<명초 대외정책과 정화하서양>>에서도 정화하서양은 경제측면의 요소이외에 건문제의 행방을 찾는다는 비밀사명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명사학회 명예회장인 유중일은 정화하서양의 주요목적은 건문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의 의견으로는 이런 주장이 처음 나온 것은 명나라 후기 봉건문인들이 편협한 사고를 가지고 내린 결론이라는 것이다. 명성조 주체는 웅재대략(雄才大略)의 황제였다. "주체는 수천의 부하장병만을 거느릴 때에도 건문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찌 대권을 장악하고 난 후에 열몇 살된 어린아이를 두려워하겠는가. 다시 말해서 실종된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비용을 쓸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당시 명나라는 국력이 이미 세계최고수준이었고, 봉건제왕중의 '개혁가'인 주체는 전황조의 황제를 넘어서려는 욕심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정화하서양이라는 장거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북경정화하서양연구회의 부이사장인 모패기 교수도 서양과 통하는 것은 명성조의 주요한 대외정책이었다. 그러므로, 주체가 서양에 가는 길에 건문제의 행방을 알아보라고 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이 주요목적이라고 얘기한다면 그것은 명성조 영락제의 흉금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둘째 수수께끼: 왜 정화를 정사(正使)로 뽑았는가?

 

명나라초, 주원장은 역사상 환관이 득세하던 데서 교훈을 얻어, 환관은 글자를 알고 공부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고, 철패를 만들어, 환관은 조정에 간여하는 것을 금지했따. 그런데 왜 정화는 정사로 선발된 것일까? 기록에 의하면, 정화의 본성은 마(馬)이고, 이름은 화(和) 였으며, 어릴 때 이름은 삼보(三寶)였다. 회족이며, 1371년 봄에 태어났고, 원래 서역사람이다. 나중에 선조를 따라 운남 곤양주(진녕현 곤양진)에 자리잡았다.

 

당시의 중국은 원말명초이므로, 주원장이 황제에 올랐지만, 천하는 완전히 통일되지 않았었다. 운남은 아직도 원나라의 땅이었다. 1381년, 주원장은 대장 부우덕, 남옥, 목영을 보내어 운남을 평정한다. 마화의 부친은 전쟁통에 죽는다. 12살된 마화는 포로가 되고, 예물로서 거세한 후 연왕부에 보내어진다. 그리하여 주체의 측근 환관이 되고, 불교를 믿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마화는 열심히 공부하고 충성을 다하여 연왕 주체의 신임을 얻는다. '정난지역"때는 주체를 따라 전장터로 가서 여러차례 공을 세우기도 한다.

 

정사의 기재에 의하면, 연왕이 황제가 된 다음 해(1404년), 정원 초하루, 주체는 마화에게 친히 "정(鄭)"이라는 성씨를 부여한다. 이때부터 마화는 정화로 개명하게 된다.

 

정화가 왜 정사로 뽑혔는지에 대하여, 유중일은 이렇게 본다. 하나는 당시 '서양'각국은 모두 이슬람과 불교를 믿었고, 정화는 두 종교, 풍속과 예의를 잘 알고 있었다.그리하여 이런 국가와 교류하는데 편리했다. 둘째는 정화는 아랍어를 알았다. 연왕부에서 사서오경을 읽어 한어, 아랍어 두 개 언어에 능통하여 외교업무에 적합했다. 셋째는 정화는 기민했다. 전란중에 단련했고 성장하였다. 넷째, 명말청초의 민간사서인 <<명서>>에 의하면 정화하서양이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정사가 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셋째 수수께끼: "서양"은 어디인가?

 

정화칠하서양은 28년이 소요되었고, 수만해리를 항해하였다. 그가 탐색한 '서양'은 현재지리상의 '서양'과 어떻게 다른가?

 

유중일의 소개에 의하면 현대적 의미의 '서양'은 대서양영역의 유럽과 미주국가를 의미하지만, 정화가 살던 명나라때에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동방세계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서양(西洋)"은 중국이외의 서쪽에 있는 강대한 영역으로 동남아, 중앙아시아등의 지역을 의미했고, 대체로 남양각 도서와 인도양안안 각지역과 국가이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이슬람교와 불교를 믿었다.

 

사료기재로 보면, 정화의 제1차항해로 도달한 곳은 중국이남의 국가였다. 월남, 태국, 인도네시아 등이었다. 실제로 는 "남양"으로 간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후, 탐험이 계속되면서 항해영역은 계속 늘어났다. 도착한 국가와 지구도 계속 늘어났다. 인도양영역의 방글라데시, 인디아, 스리랑카, 몰다이브등이었고, 더 멀리는 서아시아 페르시아만안안국가와 지구, 예멘, 암만, 사우디아라비아등이었다. 그 후에는 동아프리카의 소말리아, 케냐등을 탐험했다.

 

넷째 수수께끼: 일곱번 서양으로 간 것은 목적이 동일했는가?

 

학자들은 정화하서양의 사명은 시간의 변천에 따라 약간 달라졌다고 본다.

 

유중일 선생의 연구에 의하면, 제1차 하서양은 명성조가 더 많은 국가와 교류하고, 우호관계를 맺고, '천조상국'의 우월성을 선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의 몇 번은 연락을 강화하고, 통상을 진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중국으로 와서 진공하는 각 나라사절과 상인이 급증하여 명성조는 정화에게 명하여 그들을 호송해오도록 하고 교류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5, 제6의 원양항해가 이루어졌다. 마지막의 원항은 선덕황제가 영락황제의 위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한 것이었고, 정화에게 명하여 멀리까지 가도록 한 것이다. 즉, 매번 출항의 주요목적은 각국과의 평화적인 교류였다. 동시에 상업무역도 진행하였다. 그러나, 매번의 구체적인 목적은 약간씩 다르곤 했다.

 

다섯째 수수께끼:  정화는 무슨 기술로 원양으로 항해했는가?

 

명나라때의 휘황한 조선기술은 정화하서양의 정거에 가장 유력한 기술적인 뒷받침을 해주었다.

 

2005년 7월 4일, 남경보선창 유적지공원이 정식으로 낙성되었다. 600여년전에 그곳은 중세기 최대의 조선공장이었다. 정화하서양을 위하여 수백척의 크고 작은 배를 만들었다. <<명사>>의 기재에 의하면, 중형배를 거조하는데 쓰는 목재만 수백은이었고, 못은 수만개, 끈은 수백개였으며, 동유 수천근, 석회 근 만근이 필요했다고 한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런 거선은 지금까지 남아 있지 않고, 그저 3개의 길이 약 400-500미터의 작당만 남아 있을 뿐이며, 이것들이 소리없이 정화항해시대의 중국의 놀라운 항해기술을 대변해줄 뿐이다.

 

"선박의 키는 한나라때 발명되었다. 그러나 정화의 보선의 키는 올리고 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물이 킾으면 길게 뻗고, 물이 얕으면 조금 줄였다. 수밀격창의 기술은 송나라때 발명되었다. 정화의 보선에도 응용했으나, 선체를 하나하나의 격창으로 나무고 물이 한 곳으로 들어오더라도, 다른 곳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했다." 이것은 북경정화하서양연구회 부이사장 정명이 한 말이다.

 

항해기술상, 정화함대는 집대성자였다. 바람이 있으면 돛을 쓰고, 바람이 없으면 노를 쓰고, 작은 배가 큰 배를 끌고, 향을 태워 시간을 재고, 나침반을 가지고 별을 보고 위치를 잡았다.

 

여섯째 수수께끼: 이끈 것이 "국제함대"였는가?

 

한 아랍여행가인 이븐 바투타는 친히 정화의 함대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여행기에서, 정화함대에 "흑인"이 있다고 적었다.

 

북경대학 환경학원의 등휘는 그것은 아마도 남아시아에서 온 일꾼일 것으로 본다. 정화함대에서 일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프랑스는 아랍의 서신을 수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정화함대에서 항해를 도왔던 아랍인이 가족에게 쓴 편지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정화가 이끄는 것은 '국제함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서아시아, 중아시아 및 남아시아의 사람들이 모두 배에서 일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화를 위대한 항해가라고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위대한 관리자이고 조직가였다고 하는 편이 맞다는 것이다. 그의 수하인물들은 신분이 모두 다르고 신앙도 다르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왔지만, 그는 2만여명을 하나로 묶어 위대한 항해사업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일곱째 수수께끼: 정화하서양은 왜 중단되었는가?

 

1433년, 정화는 제7차하서양을 마치고 돌아오던 도중에 병사한다. 그리하여 남경성 남쪽의 우수산에 묻힌다.

 

정화가 서거한 후 얼마되지 않아, 선덕황제도 사망한다. 헌종때인 성화9년(1473년), 다시 서양으로 항해하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병부로 하여금 정화의 관련자료를 찾게 한다. 그러나 3일이 지나도록 찾지 못했다. 병부상서 항충은 황급히 물어보니, 담당자는 잃어버렸다고 대답한다. 병부시랑 유대하는 곁에서 "잃어버렸으면 잃어버린 거지. 서양으로 항해하는 것은 국력을 소모하는 것이다.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라고 하였따. 항충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저 잃어버렸다고 황제에 보고하는 수밖에 없었따.

 

사실 이 일은 유대하가 몰래 저지른 일이다. 헌종이 서양항해기록을 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유대하는 먼저 정화의 서양항해의 모든 기록을 보관소에서 꺼집어내어 불태워버린 것이다. 이런 멍청한 행동은 국가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한다고 한 것이지만, 대량의 진귀한 자료가 이로써 한 줌의 재로 변했고, 도저히 메꿀 수 없는 손실이 되어버렸다.

 

이후 명나라는 여러 번의 전쟁으로 국고가 비고, 왜구가 침입하여 서양으로 항해하려는 것은 보수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명나라 통치자들은 할 수 없이 서양으로 항해하려는 계획을 접게 된다. 나중에는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한다.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쇄국하게 된다. 중국은 이로써 "대항해시대"를 접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