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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북경의 청나라 왕부(王府)....그 세번째

by 중은우시 2005. 8. 11.

18. 공왕부(恭王府)

 

공왕부는 서성구 전해서가(前海西街)에 위치하고 있다. 공왕부의 건축은 건물과 화원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부지면적은 46.5무이고, 중동서의 3로로 나눌 수 있다. 각각은 사합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뒤에는 160여미터에 이르는 이층후조루가 둘러싸고 있고, 루각뒤에는 화원이 있는데, 38.6무에 이른다. 공왕부 및 화원의 설계는 화려하여 소문으로는 여기가 홍루몽에 나오는 영국부와 대관원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화신(和珅], 1750-1799)은 만주 정홍기출신이고 뉴후루씨이다. 자는 치재이고 건륭의 총신이다. 문화전대학사를 지냈는데, 가경4년(1799년)에 건륭제가 사망하자, 화신은 집안재산을 몰수당하고 자진을 명받는다. 가경제는 화신의 집을 성왕부(成王府)로 하여 경군왕(慶郡王) 영린(永璘)에게 하사한다.

 

함풍초년에 공왕 혁흔(奕訢)이 분부하게 되는데, 이 집을 혁흔에게 주어 공왕부로 삼게 한다. 혁흔(1833-1989)은 아이신줴뤄씨이고, 도광제의 여섯째 아들이다. 동치원년(1862년)에 의정왕이 되며 후에 군기대신을 역임하고, 자희와 신유정변을 일으킨다. 영국프랑스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땅을 나눠주고 배상하는 조약에 날인하였는데, 혁흔이 주재한 것이다.

 

민국이후, 공왕부와 화원은 1920년대에 부위, 부유형제가 서십고교당에 저당잡힌다. 1932년후에는 재산권이 보인대학(輔仁大學)으로 넘어간다.


공왕부 화원

 


공왕부 내부 모습

 

19. 계공부(桂公府)

 

계공부는 동성구 조양문내 방가원(芳嘉園) 11호에 있다. 명나라때는 명방가원이었는데, 정원이 폐허로 된 후 정업암(淨業庵)을 세웠다. 청나라때는 장군 승보(勝保)가 정업암의 부지에 이 집을 지었다. 후에 청나라 황실은 자희의 동생인 승은공(承恩公) 계상(桂祥)에게 주었으므로, 계공부라고 하였다. 동성구 중점보호문물이다.

 

20. 경친왕부(慶親王府)

 

경친왕부는 서성구 정부가(定阜街) 3호에 위치한다. 청나라 말의 경친왕에 봉해진 혁광의 왕부이다. 혁광은 경친황 영린의 손자이고, 도광30년(1850년)에 보국장군을 계승한다. 함풍원년(1851년) 혁광은 정부대가의 원래의 대학사 치산(琦善)의 집으로 이사간다. 함풍시대에 혁광은 보국장군에서 패자, 패륵으로, 광서10년에 경군왕으로 20년에 경친왕으로 승급한다. 24년에는 세습친왕에 봉해진다. 신해혁명후 혁광은 1912년 천진의 영국조계로 도망치고 1918년에 사망한다. 경왕부는 광서10년(1884년)에 경왕으로 승급한 후 지은 것이다. 1949년후에는 경진위수사령부가 여기에 있다. 북경시 중점보호문물이다.

 

21. 부군왕부(孚郡王府)

 

부군왕부는 동성구 조양문내대가 137호에 위치하고 있다. 최초에는 이친왕의 신부였다. 강희황제의 13째아들인 이친왕 윤상이 사망한 후 집은 개조되어 현량사(賢良寺)로 된다. 황제는 다시 이 땅을 2대왕인 홍효(弘曉)에게 하사한다. 이친왕의 원래 왕부와 구분하기 위하여 이친왕신부로 불렀다. 6대 이친왕 재원에 이르러, 정친왕 단화등과 함께 고명대신이 되었으나, 자희태후에 의하여 작위를 박탈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왕부는 조정에 회수된다. 도광황제의 어린 아들 혁혜는 도광 30년(1850년)에 부군왕이 되고, 동치3년(1864년)에 황궁에서 나와 여기에 머물게 되며, 부군왕부로 부른다. 서열로 아홉째 아들이었으므로, 구야부(九爺府)로 불렀다. 혁혜가 죽은 후, 재수가 계승하여 패륵이 된다. 이로 인하여 이 집은 수패륵부라고도 불리운다. 북경시 중점보호문물이다.

 


부군왕부

 

22. 예공부 : 사천반점

 

예공부는 서융선(西絨線)후통 51호에 있다. 예공은 바로 부예(溥裔)로 패자 면훈의 증손이다.. 공부는 패자 면훈이 동치8년(1869년)에 안정문내관가에서 이사온 후의 신부이다. 비교적 완전하게 보존된 패자급의 집이다. 중로와 동,서양로가 있고, 중로의 남북 중추선에 부분과 다섯개의 건물로 구성되었다. 1959년 여기에 사천반점을 열었다.

 

23. 순패륵부(洵貝勒府)

 

순패륵부는 서단 북대가 110호에 위치한다. 집은 남향이고, 서쪽으로는 서단북대가에 면해있다. 현재집은 길북쪽의 담장과 하나의 사헙원으로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순패륵은 재순(載洵)으로 원래 순친왕 혁현의 여섯째 아들이다. 서친왕 혁지에게 양자로 가서 뒤를 이어, 패륵의 작위를 승계했다. 광서34년 가군왕의 작위를 받는다. 선통제가 즉위한 후 그 형인 섭정왕을 도와 해군대신을 맡는다.

 

24. 도패륵부(濤貝勒府) : 13중학

 

도패륵부는 서성구 유음가(柳蔭街) 20호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서성구 중점보호문물이다. 여기는 원래 강희의 열다섯째 아들 윤우가 거주하던 유왕부(愉王府)였다. 광서38년(1902년) 순친왕 혁현의 일곱째아들인 재도가 뒤를 이어 종군왕 혁합의 뒤를 이어 패륵의 작위를 승계하고 유왕부로 이사한 후 패륵부가 되었다. 도패륵부는 후에 보인대학 부속중학교 남학생부 교사로 쓰여고, 1952년 보인남중은 북경시13중학이 되었다.\

 

25. 면덕부(綿德府)

 

면덕부는 서성구 소석호(小石虎)후통 33호에 위치하고 있다. 면덕은 건륭제의 첫째아들인 정친왕 영황의 장자이다. 건륭42년에는 진국공에 봉해진다. 이곳은 진국공에 봉해진 후의 주택이다. 후원에는 돌로 된 원태조 징기스칸기념비가 하나 있는데, 만몽전문학교가 원태조를 기념하여 건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