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숙친왕부(肅親王府) : 일본대사관 - 북경시정부(현)
위치는 동성구 정의로(正義路) 동쪽에 있다. 순치시절에 지었으며, 역대로 숙친왕을 세습한 왕들이 이곳을 저택으로 삼았다. 1901년 일본대사관으로 변하였으며, 단지 담장만 남았다. 그 장소에는 현재 북경시정부가 들어서 있다.
숙친왕 하오거(豪格)는 청태종 홍타이시의 장자로서 태종 숭덕원년(1636년)에 숙친왕에 봉해졌으며, 청초 개국 8대 철모자왕의 하나이다. 태종이 죽은 후 뚜얼곤과 황위를 다투었는데, 뚜얼곤이 득세한 후 해를 입어, 순치5년(1648년) 왕위를 박탈당하고 연금되었으며 옥에서 죽었다. 순치제가 친정한 후 숙친왕의 작위를 회복시켰다. 이후 하오거의 자손은 친왕은 현친왕(顯親王)이라는 이름으로 작위를 세습하다가, 건륭 43년(1778년)에 숙친왕이라는 봉호를 회복한 후 세습하였다.
2. 예친왕부(睿親王府)
예친왕부는 2군데 있다. 하나는 동화문대가(東華門大街)의 보도사 일대이고, 다른 하나는 외교부가(外交部街)에 있었다. 전자는 예친왕이 북경에 들어온 후의 거주지였고, 후자는 건륭연간에 예친와의 작위가 회복된 후의 새로운 왕부였다.
예친왕, 즉 청초의 섭정왕 뚜얼곤은 청태조 누르하치의 14째 아들이었고, 청태종 홍타이시의 동생이었다. 청태종 숭덕원년(1636년)에 예친왕에 봉해졌고, 청초 개국8대철모자왕의 하나이다. 북경에 진입한 후, 명나라 때의 남궁(南宮)을 왕부로 삼았는데, 그 장소는 현재의 동화문대가 남쪽이다. 순치8년(1651년)에 뚜얼곤이 사망한 후 작위가 박탈되었고, 왕부도 폐지되었다. 그의 양아들인 뚜얼보는 순치 14년 (1657년)에 패륵에 봉해지고, 석대인후통(石大人胡同, 현재의 외교부가)에 패륵부를 만들었다. 건륭 43년(1778년)에 예친왕의 작위를 회복시키면서, 그 후예들이 세습하게 되었고, 패륵부는 예친왕 신부로 되었다. 원래 500여간의 방이 있었으나, 현재는 기와와 담장만 남기고 석사자 2개만 남아 있다.
3. 순승군왕부(順承君王府) : 대원수부 -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상설기구 사무실(현)
순승군왕부는 서성구 조등우로(趙登禹路)에 위치하고 있다. 순승군왕의 이름은 러커더훈(勒克德渾)이며, 예친왕 다이샨의 셋째 아들인 사하린(薩哈林)의 둘째 아들이다. 순치5년에 순승군왕에 봉해졌으며, 청나라 개국 8대 철모자왕의 하나이다.
저택의 배치는 바깥 담장으로부터 안쪽까지 3개의 길로 나누었고, 중로(中路)에 주요한 건축물을 배치했다. 앞에는 전각 뒤에는 침전을 두고, 정문(궁문), 정전과 약측 익루, 후전, 후침을 두고 있다. 동서 양로에는 생활거주구이다. 장작림(張作霖)이 북경으로 들어온 후에는 왕부를 점령하여 대원수부(大元帥府)로 삼았다. 1949년이후에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설기구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왕부의 정문바깥에는 정협예당을 건축하였으며, 중로의 주요한 건축물은 기본적으로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 동로의 앞뒤 수층의 원도 여전히 원래의 배치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1984년에 북경시 중점 보호문물로 지정되었다.
4. 정친왕부(鄭親王府) : 중국대학 - 국가교육위원회
정친왕부는 서성구 대목창후통(大木倉胡同)에 위치하고 있다. 청나라때의 개국공신인 지얼하랑의 저택이다. 지얼하랑은 청태조 누르하지의 셋째동생인 슈얼하치의 아들이다. 순치9년(1652년)에 정친왕에 봉해지고, 청초의 유명한 8대철모자왕의 하나이다. 왕부의 창건은 청나라때 북경에 들어온 초기였다. 청나라 왕공대신의 저택은 모두 정해진 규격이 있어서, 기반을 높이거나 방을 더 많이 만드는 것도 위법이었다. 정친왕 지얼하랑은 왕부의 기반이 법을 어기고, 동사자, 거북, 학을 사용하였다고 하여 순치4년(1647년)에 탄핵을 받아 파직된다. 저택의 건축후에 역대의 세습왕들이 약간씩 수리하고 확장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8대 세습왕인 더페이(德沛)에 의하여 이루어진 화원의 확장이었다. 이 화원은 "혜원(惠園)"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북경의 왕부정원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이름이 있었다. 13대 정친왕인 단화(端華)와 이친왕 재원(載垣) 및 숙순(肅順)은 "고명팔대신"인데, 신유정변이후에 자진하고 가산이 몰수된다. 동치10년에 다시 반환하고 작위를 받은 칭즈(慶至)가 다시 정친왕부를 복원시킨다. 민국후에는 먼저 왕부를 시스쿠교회(西什庫敎堂)에 저당잡히고, 1925년에는 중국대학의 교지로 임대준다.
정왕부는 남향건물로 원래의 배치는 동에서 서로 3부로 나뉘는데, 동부의 앞이 뛰어나서 왕부의 주요한 전각이 소재하였고, 중, 서부는 모두 도로에 따라 들락날락하였다. 현재는 단지 동부만 남아 있다. 중국대학이 사용시에 이름을 일선당으로 바꾸어서 현재까지 쓰고 있다. 서부화원에는 현재 이용로중학(二龍路中學)이 부지로 쓰고 있고, 정왕부는 지금은 국가교육위원회 부지로 쓰고 있으며 북경시 중점 보호문물로 지정되었다.
5. 장친왕부(庄親王府)
장친왕부는 원래 서사(西四) 북태평창(北太平倉)에 있었고, 북쪽으로는 마장원후통(麻狀元胡同)에 연결된다. 청태종의 다섯째 아들인 숴사이(碩賽)는 순치원년에 승택군왕으로 봉해진다. 순치8년에는 친왕에 봉해진다. 숴사이의 첫째아들인 보궈두오는 순치12년(1655년)에 친왕을 세습하며, 장친왕으로 고친다. 이후 모두 장친왕으로 세습한다.
장친왕 재훈(載勳)은 일찌기 왕부에 권단(拳壇)을 설치한 바 있다. 팔국연합군이 왕부에 침입하여 화재의 해를 입었다. 1920년대에 북양군벌의 이순(李純)과 그 동생 이형(李馨)이 장왕부를 매입하여, 왕부건축을 철거하고, 방을 지어 평안리(平安里)라고 하였다. 평안리 현판은 현재 서성구문화문물국에 보존되어 있다. 후에 이 부지는 철거되어 평안리대가(平安里大街)로 되었다. 그 부지는 남북양쪽으로 나뉘었으며, 현재 태평창 서쪽 입구의 북쪽에 있는 것이 장친왕부의 전부 유지이다.
6. 예친왕부(禮親王府)
예친왕부는 서성구 서황청근남가(西皇城根南街) 서쪽에 있는데, 대장방후통(大醬坊胡同)의 동쪽입구의 북쪽이다. 청태조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로서 청나라초기의 개국8대철모자왕의 하나인 다이샨의 집이다. 다이샨은 청태종 숭덕원년(1636년)에 화석예친왕에 봉해진다. 순치 16년(1659년)에 다이샨의 손자인 제수(杰書)가 예친왕의 작위를 승계하고, 봉호를 강친왕(康親王)으로 바꾼다.
이 부지는 제수가 작위를 승게한 후 다시 장소를 골라서 지은 곳이다. 강왕부라고도 한다. 건륭 43년(1778년)에 예친왕의 봉호를 회복하였고, 다시 예왕부로 개칭하였다. 가경 12년 (1807년)에 불에 나서 건물이 소실된 후, 원 부지에 다시 지었다. 왕부의 주요한 건축은 전후 양 부분으로 나뉘어지며 전부에는 정문(궁문), 정전과 양측 익루, 후전 및 기타 두개의 상배전이 있다. 후부에는 정원이 있다. 북경시 중점보호문물로 지정되었다.
7. 극근군왕부(克勤君王府)
근근군왕부는 서성구 신문화가(新文化街, 원래의 석부마대가)의 서쪽입구 북쪽에 있다. 극근군왕은 예친왕 다이샨의 큰아들이다. 극근군왕은 사후에 추봉된 것으로 청초의 팔대철모자왕의 하나이다. 이 집은 순치때 지은 것이다. 점유면적은 크지 않으나, 평면 배치는 왕부의 규격과 동일하다.
민국후에 최후의 극근군왕인 만선(曼森)은 집을 웅희령(熊希齡)에게 팔았다. 지금도 후침 양산의 기둥에는 웅희령과 그 부인 주기혜가 재산을 북경구제회(北京救濟會)에 기증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북경시 중점 보호문물로 지정되었다.
8. 순친왕부(淳親王府) : 영국대사관 - ?
순친왕부는 동교민항 정의로 서쪽에 있다. 순친왕의 이름은 윤우(允祐)로, 청나라 강희황제의 일곱째 아들이다. 강희 48년 (1709년)에 순군왕으로 봉해지며, 옹정 원년 (1723년)에 순친왕에 봉해진다. 이 집은 군왕작위를 받은 후 지은 것이다. 함풍 10년 (1860년), 왕부는 영국대사관으로 된다. 원래의 집은 어하(御河)에 면해 있으며 3로로 나뉜다. 중로는 궁전식의 녹색유리기와지붕건축이고, 앞에는 궁문 5간, 대전 5간, 뒤에는 원락과 배방이 있다. 가장 뒤에는 영국대사관으로 쓰던 시기에 건축한 영국식 건물이 있다. 동로는 이미 건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쪽은 화원에 속하는데, 단지 개조한 사합원 하나와 추가건축한 영국식 건물 하나가 있다. 1949년이후에 영국대판처가 사용하였다. 동성구 중점보호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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