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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북경의 성문

by 중은우시 2005. 8. 8.

북경에는 자금성, 황성, 내성, 외성등 여러 성벽으로 둘어싸여 있으며, 성벽에는 드나드는 문이 있다. 예로부터 내구외칠(內九外七)이라고 하여 내성에는 9개의 성문이 있고, 외성에는 7개의 성문이 있다고 하였다.

 

내성의 9개의 문 : 숭문문(崇文門), 정양문(正陽門), 선무문(宣武門), 부성문(阜成門), 서직문(西直門), 덕승문(德勝門), 안정문(安定門), 동직문(東直門), 조양문(朝陽門).

 

외성의 7개의 문 : 광거문(廣渠門), 광안문(廣安門), 동편문(東便門), 서편문(西便門), 좌안문(左安門), 우안문(右安門), 영정문(永定門)

 

내성구문에 대하여는 그 용도에 따라 민간에서는 각문의 실제 기능에 따라 별도로 부르는 명칭들이 있다.

 

정양문은 전문(前門) 또는 국문(國門)이라고 부르는데, 황제만 드나들 수 있는 문이었다.

숭문문은 세문(稅門)이라고 부르는데, 북경에 들어오는 세금을 숭문문에서 거뒀었다.

부성문은 매문(煤門)이라고 불렀다. 매는 석탄이다.

서직문은 수문(水門)이라고 불렀다.

덕승문은 병문(兵門)이라고 불렀는데, 병사들이 전쟁터로 나갈 때 이 문을 통해서 나갔다.

안정문은 진병문(進兵門)이라고 불렀는데, 전쟁에서 개선할 때에는 이 문으로 들어왔다.

동직문은 전와문(塼瓦門)이라고 불렀는데, 북경내의 성벽이나 황궁에서 쓰는 벽돌,기와는 이 문을 통과했다.

조양문은 양식문(糧食門)이라고 불렀다.

선무문은 형문(刑門)이라고 불렀는데, 범인에게 형을 가할 때, 이 문을 통하여 나가도록 하였다.

 

명청의 북경성은 원나라때의 그것을 기준으로 상당한 부분이 기본적으로 겹치고 있다. 성문의 명칭은 비록 바뀌었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양문은 원대에 여정문(麗正門)이라고 불렀으며 국문이고 황제만 통과할 수 있었다.

숭문문은 원대에 문명문(文明門)이라고 불렀는데, 민간에서는 합덕문(哈德門, 하더먼) 또는 해대문(海垈門, 하이다이먼)이라고 불렀으며 광명, 창성의 문이었다.

부성문은 원대에 평측문(平側門)이라고 불렀다.

조양문은 원대에 제화문(齊化門)이라고 불렀다.

서직문은 원대에 화의문(和義門)이라고 불렀으며 개문(開門)이었다.

덕승문은 원대에 건덕문(健德門)이라고 불렀으며 수문(修門), 품격이 고상한 문이었다.

안정문은 원대에 안정문(安貞門)이라고 불렀으며 생문(生門), 풍요의 문이었다. 황제가 매년 지단에 제사지낼 때 이 문을 지났다.

동직문은 원대에 숭인문(崇仁門)이라고 불렀으며 상문(商門), 교역의 문이었다.

선무문은 원대에 순승문(順承門)이라고 불렀으며 사문(死門)이었다. 장례를 지낼 때 이 문을 통과했고, 청나라때에는 범인을 채시구(菜市口)에서 참했는데, 범인을 이 문을 통과하여 데리고 갔다.

 

북경의 내성은 그후 3개의 문이 추가되어 9개의 문이 아니라 12개의 문이 있다. 그 후에 여러가지 필요에 따라 3개의 성문이 늘어났던 것이다. 늘어난 세 개의 문은 화평문(和平門), 부흥문(復興門), 건국문(建國門)이다. 화평문은 1926년에 지었는데, 처음에는 신화문(新華門)이라고 부르다가, 중남해의 신화문과 이름이 중복되어 화평문으로 개명하였다. 부흥문과 건국문은 1940년대에 지었는데, 처음에 일본괴뢰정권은 계명문(啓明門), 장안문(長安門)이라고 지었으나, 1945년에 부흥문, 건국문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이 문은 별도의 성루를 만든 것은 아니고, 단지 드나들 수 있게 간이로 성벽에 길을 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