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나왕부(那王府)
나왕부는 보초(寶초)후통내의 국상(國祥)후퉁 갑2호에 소재하고 있다. 몽고 커얼커 사이인노얀부 자사크 화석친왕 나얀투(那彦圖)의 왕부이다. 국상후통 갑1호의 두개의 건물은 원래 왕부에서 중로의 가장 북쪽에 있는 두개의 나란히 있던 건물이다. 집안에는 2개의 태호석이 있는데 석좌의 높이는 1.85미터이다. 남쪽에 방세간, 서상방 3간이 있고, 북방 5간이 있다. 북경시 중점보호문물이다.
10. 대공주부(大公主府)
대공주부는 원래 동성구에 있었고, 건륭2년(1737년)에 지었다. 강희황제의 24째 아들인 성친왕 윤비(允秘)의 왕부이다. 동치8년(1869년)에 함풍황제의 딸인 영안고륜공주(榮安固倫公主)의 집으로 되었고, 후에 영수고륜공주(榮壽固倫公主)에게 넘어갔는데, 영수공주는 공친왕의 장녀였다. 그래서 대공주부라고 불렀다. 1985년 원래의 모습 그대로 밀운현 백하교야공원에 이전하였다. 부지 2.1만평방미터이고 건물은 130여간이며, 문전, 정전, 침궁문, 침전, 후조루의 다섯개의 건물이 있다.
11. 화경공주부(和敬公主府)
화경공주부는 동성구 장자충로(張自忠路) 7호 (원 철사자후통)에 있다. 건륭황제의 셋째딸 고륜화경공주가 시집간 후에 하사받은 집이다. 화경공주(1731-1792)는 효현순황후 소생이다. 건륭 12년 몽고 커얼친부 보국공 서부틍바러주얼에게 시집간다. 원래의 집은 왕부의 규격에 따라 지었고, 정문, 정전, 후침, 후루와 동서배방등 부속건축이 있다. 중로는 주요 청당이 모두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북경시 중점보호문물이다.
12. 정친왕부(定親王府) : 구삼학사중앙위원회
정친왕부는 서사(西四) 남대가(南大街) 항와시(缸瓦市) 동쪽, 반상호원(頒賞胡園) 남쪽이다. 건륭제의 첫째 아들의 이름은 영황(永璜)인데, 건륭 15년(1750년)에 죽은 후, 정친왕에 추봉되었다. 전체 집의 면적은 40무이다. 서쪽 담장은 지금의 사과거반장(砂鍋居飯莊)일대이고, 동쪽은 구삼학사(九三學社) 중앙위원회 소재지이며, 방은 400여간이다. 부내에 관사처, 매판처, 장원처, 수시처, 회사처등이 있어, 재정관리, 토지세징수, 비서업무등을 담당하였다. 구삼학사 공용방은 왕부에서 남은 일부 건축물이다.
13. 순군왕부(循郡王府)
순군왕부는 안정문내대가(安定門內大街) 방가후퉁(方家胡同) 13호, 15호에 있다. 순군왕의 이름은 영장(永璋)으로, 건륭제의 셋째 아들이며, 죽은 후 순군왕의 작위를 추봉받았다. 나중에 순진왕을 계승하여 아들이 된 면의(綿懿)는 패륵부의 급별로 건물을 중수했다. 서부정원(15호)는 현재 별로 남지 않은 패륵부의 규격에 따른 집인데, 정당5간(이미 철거), 후원에는 정방과 배방이 있고, 동과원은 화원 및 생활거주지이다. 동부느 하나의 완전한 사합원건물인데, 주원, 중원과 후원이 있다. 북경시 중점보호문물이다.
14. 곤패자부(棍貝子府) : 적수담의원
곤패자부는 서성구 신가구동가(新街口東街)에 있다. 원래는 성친왕의 신부, 즉 패자 홍경(弘景)의 부였다. 가경시절에 인종의 넷째딸인 장정공주(庄靜公主)에게 하사하여, 사공주부라는 명칭으로도 불리운다. 후에 곤패자부가 되었다. 가경 연간에 옥하수(玉河水)를 집안으로 끌어들인다. 적수담의 남쪽과 서쪽에는 화정이 남아 있고, 적수담의 동쪽에도 흙이 남아 있다. 적수담의원이 여기에 있다.
15. 순친왕부(醇親王府) : 송경령고거, 국가종교위원회
순친왕부는 후해북쪽연안에 있다. 원래는 청나라초의 대학사인 밍주의 집이었다. 건륭 54년에는 그 11째아들인 영리(永理)가 성친왕이 되면서, 밍주의 집을 영리에게 하사한다. 그 후에 왕부의 규격에 따라 개조한다. 이 부는 후에 순친왕 혁현(奕譞)에게 하사된다. 혁현의 원래 왕부는 서성구 태평호 동리(현재의 중앙음악학원)에 있었다. 광서제가 이 집에서 태어났으므로 잠저로 되어, 순친왕은 이사를 가야하게 되었다. 구별을 위하여 순친왕의 원래 태평호의 왕부는 남부로 부르고, 후해의 신왕부는 북부로 불렀다. 북부는 남향으로 서쪽은 왕부화원이 있다.
1949년에 수리를 거친 후 송경령의 거소로 삼았다. 동부는 왕부자리인데, 동, 중, 서의 삼로가 있다. 중로는 주된 건축물로 남쪽에서 북쪽까지 가문 5간이 있다. 북부는 현존하는 가장 보존이 잘된 왕부의 하나이고, 북경시 중점 보호문물이다.
남부는 서성호 태평호 동리에 있는데 원래는 영친왕부(榮親王府)였다. 영친왕 영기(永琪)는 건륭의 다섯째 아들이고, 건륭 30년(1765년) 영친왕에 봉해진다. 도광 30면(1850년) 혁현을 순군왕으로 봉하고, 함풍9년(1864년)에 부를 나누어 출궁하며 태평호에 거주한다. 동치 11년(1872년)에는 순친왕으로 승격되며, 집은 순친왕부로 불리게 된다. 속칭 칠야부(七爺府)이다. 현재 중앙음악학원이 쓰고 있고, 서성구 보호문물이다. 동치13년(1874년) 동치제 재순이 사망하자, 혁현의 둘째아들인 재첨이 황위를 잇고, 연호를 광서라 한다. 광서14년(1889)년 순친왕부는 북부로 이사간다. 혁현이 죽자, 태평호의 순친왕부의 앞쪽 절반은 순친왕사로 개조하며, 뒤쪽은 여전히 잠룡저로 된다.
영성(永瑆)은 서법으로 유명하여, 옹방강, 철보, 유용과 더불어 4대가라고 칭해진다.
밍주(明珠, 1635-1708)는 강희제의 총신으로 무영전대학사를 지내나, 후에 축출된다. 그 아들 나란싱더는 청나라의 유명한 시인이고, 홍루몽연구의 전문가들이 주의하는 대상이다.
혁현(1840-1891)은 도광의 일곱째 아들로, 광서의 생부이다. 동치 11년에 순친왕을 받는다.
재풍(1883-1951)은 혁현의 아들로 광서 16년 순친왕을 물려받는다. 선통황제 부의의 부친이다.
16. 의친왕부(儀親王府) : 능원부(에너지부), 북경시문화국
의친왕부는 서성구 서장안가 길 북쪽, 부우가(府右街) 서쪽에 있다. 건륭 44년(1779년)에 건륭의 여덟째 아들인 영선(永璇)이 의군왕이 된다. 가경4년 (1799년)에 의친왕으로 오른다. 능원부, 북경시문화국등이 있는 곳이 바로 의친왕부의 옛 장소이다.
17. 단군왕부(端郡王府) : 중국소년아동활동중심
단군왕부는 서성구 평안리서대가 길 북쪽에 있다. 중국소년아동활동중심의 소재지이다. 이 땅은 원래 성친왕부(誠親王府)와 과친왕부(果親王府)가 동서로 나란히 있었다. 성친왕은 강희제의 셋째아들인 윤지(允祉)이고, 과친왕은 강희제의 17째 아들인 윤례(允禮)이다. 성친왕부는 옹정연간에 다시 신군왕(愼郡王) 윤희(允禧)에게 하사되는데, 신군왕은 강희제의 21번째 아들이다. 그 아들인 영용(永瑢)은 질친왕에 봉해져서 질왕부(質王府)라고 부르게 된다. 광서때, 그 후예인 진국공 부령(溥齡)이 살고 있었다. 그 집은 아마도 단왕부와 동시에 불에 탄 것으로 보인다. 과친왕부는 가경연간에 서친왕(瑞親王) 면석에게 주어 집으로 삼는다, 그의 후손인 손자 재의는 단왕에 봉해진다. 팔국연합군이 침입할 때 집이 불탄다. 그 유지에는 북경사범학교, 북경공업학교가 들어서고 후에 북대공학원으로 된다. 현재 북경77중학교지가 왕부의 위치에 있다. 단왕부내의 동북쪽에는 토산위에 318참안열사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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