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송경령고거(宋慶齡故居)

중은우시 2005. 7. 24. 22:48


 

 

송경령(중국의 국부인 손문의 부인)이 마지막으로 기거했던 북경의 거주지는 현재 송경령고거라는 이름으로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송경령은 송씨삼자매(송애령, 송경령, 송미령)의 하나로써 중국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현재 송경령고거로 알려진 서쪽과 현재 중국종교사무국이 사용하고 있는 오른쪽 건물은 원래 하나의 집이었는데, 이 집의 내력 또한 만만치 않다.

 

첫번째 주인은 나란밍주(納蘭明珠, 1635-1708)이다. 그는 만주 정황기인으로, 그의 조부는 해서여진의 예허부의 추장인 나란진타이스이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여진족을 통일할 때, 그의 조부는 피살되었고, 그아들인 니사한은 누르하치에 투항하였으며, 후에 명을 칠 때 공을 세웠다. 밍주는 니사한의 둘째아들인데, 12살 때 부친이 돌아가셨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권모술수에 밝았다. 17세에 순치제의 시위가 되고, 이후 강희제에게 인정을 받아 내무부총관, 홍문관학사, 형부상서, 병부상서를 거쳐 강희 16년(1677년)에는 무영전대학사겸 예부상서, 태자태보에 올라서 당시 권신 쑤오어투와 같이 재상이 되었다. 강희 23년(1684년)에 쑤오어투가 삭탈관직되자 명주는 수보가 되어 권력생애의 최고봉에 오른다. 그는 내각에 13년간 머물며 천하의 정치를 장악하였다. 3번을 철폐하고, 대만을 통일하며, 외적을 방어하는 중요한 사건에서마다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황제의 총애를 믿고 매관매직등을 통하여 재물을 많이 모았었다. 후해북쪽의 집은 밍주가 한창 위세를 떨칠 때, 명나라시대의 한 고관의 집을 구매하여 새로 지은 것이다. 강희 27년(1688년)에 밍주가 탄핵받아 파직된 후 여기에 은거하였다.

 

나란밍주의 아들은 나란싱더(納蘭性德)이었다. 나란싱더는 부친은 재상이고, 모친은 누르하치의 손녀이므로 귀족중의 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문무에 모두 뛰어나 18세에 거인이 되고 22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바로 강희황제의 1등시위가 되었다. 강희보다 나이가 1살이 어렸는데, 강희는 그의 재주와 학문을 매우 좋아했고 강희의 시위를 9년간 하였다. 그런데, 나란싱더는 이런 관료생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싫어하였다. 그가 남긴 <<측모집>>, <<음수사>>등의 문집에 나오는 글은 대체로 비감한 정서로 옛날을 그리워하고, 현재의 상황을 조롱하는 글이 많아. 재상가의 자손이 쓴 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또한 17세에 만난 양광총독 노흥조의 딸과 결혼하는데, 두 사람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였으나 3년만에 부인이 세상을 뜨게 된다. 싱더는 매우 충격을 받았으며 후에 후처를 얻기는 하였으나 항상 우울해 하였다. 이후 밍주의 4세손 성안이 죄를 지어 가산이 몰수되면서, 이 집은 당대의 권신 허션(화신)의 별채로 된다.

 

그런데, 나란밍주와 나란싱더의 모습은 <<홍루몽>>에 나오는 가정, 가보옥 부자와 닮았으며, 그의 집안 이야기 또한 홍루몽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이로 인하여 건륭황제는 홍루몽을 읽고나서 바로 "이건 밍주집안 일을 쓴 거로군"이라고 했다고 한다.

 

둘째 주인은 허션이다. 허션은 건륭황제시절 거의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총애를 받았으며 현재의 북경대학부지, 공친왕부등이 모두 허션의 집이었다. 가경제가 들어서면서 허션은 몰락하고 집안가산은 몰수되었다.

 

셋째 주인은 성친왕(成親王) 영성(永瑆)이다. 영성은 가경제 영염의 형으로써 가경제가 허션으로부터 몰수한 이 집을 영성에게 주어 성친왕부로 삼는다. 이 때 가경제는 황제궁원이외에는 유일하게 이 집에 호수의 물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허가하고, 성친왕은 호수물을 끌어들인 후 정자를 지어 은파정(恩波亭)이라고 하여 황제의 은혜를 기렸다. 그러나, 황제의 은총은 오는 것도 빨랐지만 가는 것도 빨랐다. 같은 해 10월에 영성은 홍량길을 대신하여 조정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군기대신의 직위에서 쫓겨나고 집안에 머물게 되었다. 집안에서 우울하게 지내다가 일생을 마치게 되는데, 대호석의 위에 쓴 세세평안(歲歲平安)이라는 4글자는 영성이 쓴 글이라고 한다. 이후 영성의 후손들은 직위가 강급되어 패자(貝子)로 강급되었다.

 

넷째 주인은 광서제 재첨(載湉)의 부친인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이다. 자희태후는 이 집을 순친왕에게 내리고, 자희태후와 광서제는 16만냥을 내서 수선한다. 자희태후는 광서제가 1909년 후손없이 사망하자, 자희태후는 재첨의 동생인 재풍의 큰아들인 부의를 황위에 앉힌다. 재풍은 감국섭정왕에 올라, 이 집은 순친왕부로 불리는 외에 섭정왕부로 불리게 된다. 이 집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부의가 태어난 집이다.

 

신해혁명후에도 재풍은 여전히 이 집에서 살았으며 1924년 부의가 풍옥상에 의하여 자금성에서 쫓겨난 후 잠시 이 집에 머문다. 이후 부의는 천진으로 갔다. 그 때 재풍도 같이 천진으로 갔다가 1938년에 다시 돌아온다. 해방후에 재풍은 순친왕부의 모든 집을 정부에 팔아버린다.

 

다섯째 주인은 송경령이다. 1961년부터 주은래총리의 지시하에 이 집은 송경령 국가부주석의 북경거주지로 된다. 원래의 순친왕부에서 원 건물이 있던 곳은 나누어 별도로 하고, 이전의 서화원이 있던 곳을 개조하여 송경령의 거주지로 바꾼 것이다. 송경령은 1963년 4월에 이 집에 입주하여 1981년 5월 29일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8년간 여기에서 살았다.

 

이 집은 두명의 권신(나란밍주, 허션), 세명의 친왕(영성, 혁현, 재풍), 그리고 중화민국의 국모(송경령)가 살았으며, 청나라 마지막 황제(부의)가 탄생한 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