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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전국옥새의 뒷이야기

by 중은우시 2005. 8. 9.

전국옥새는 진시황제 이래로 황제를 상징하는 물건, 황권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이에 따라 전국옥새를 차지하여 황제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혈안이 되어 전국옥새를 노렸고, 전국옥새는 진시황이래로 많은 곡절을 겪고, 많은 이야기를 남기게 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전국옥새를 차지한 인물들을 시간 순서대로 언급하고자 한다.(앞부분은 전 글 화씨벽과 전국옥새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간략히 소개)

 

1. 춘추시, 초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화씨벽을 얻음.

2. 초위왕은 소양이 월을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워 화씨벽을 상으로 내림. 이후 도둑맞음.

3. 조나라 영현이 얻은 후, 조혜왕이 뺏음.

4. 기원전 228년 진시황이 화씨벽을 얻음. 이사에게 명하여 "수명우천, 기수영창"의 여덟글자를 함양의 옥장인 손수에게 명하여 화씨벽을 편평하게 갈게 하고 깍아서 옥새로 만들게 함.

5. 기원전 219년 진시황제가 동정호에서 수렵시 분실 (후에 찾은 것으로 알려짐)

6. 기원전 206년 10월 유방의 군이 함양을 함락시킬 때 진왕 자영이 시황제의 옥새를 바침. 이후 유방이 천자에 오른 후 대대로 이어짐. "한전국새(漢傳國璽)" 또는 "한전국보(漢傳國寶)"라고 함.

7. 서기8년 왕망이 찬달. 왕망의 고모인 효원황후에게 한전국새를 내놓으라고 핍박하자 효원황후가 바닥에 버려 한쪽 귀퉁이가 깨지고, 왕망은 귀퉁이를 금으로 입히게 함.

8. 23년 10월 4일, 왕망의 패함. 상인 두오(杜吳)는 왕망을 죽인 후 교위 왕헌(王憲)이 옥새를 취함. 왕헌은 스스로 한대장군이라 칭함. 10월 6일, 이송, 등화가 장안에 들어왔으나 왕헌이 옥새를 내놓지 않으므로 왕헌을 죽이로 옥새를 취함. 이송은 전국옥새를 가지고 완(宛)으로 가서 녹림군(綠林軍)이 옹립한 한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에게 바침.

9. 서기 25년 6월, 적미군(赤眉軍)이 별도로 황족후예 유분자를 황제로 옹립하고 연호를 건세라 함. 같은 달에 유수(劉秀)가 고읍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한이라 하고 연호를 건무라 함. 9월에 적미군 번숭등은 10만을 이끌고 관내로 들어오고, 경시제 유현은 옷을 벗은채 도망침. 10월에 유수는 낙양에 들어가고, 12월에 적미군은 경시제 유현을 추살함. 서기 27년 1월 적미군이 의양에서 패하고, 유분자와 번숭은 무리를 이끌고 유수에게 투항하면서 전국옥새를 동한 광무제 유수에게 바침.

10. 동한 말년에 환관이 득세하며 소제 광희원년(189년 8월) 원소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환관을 죽인 후 단규가 황제를 모시고 북궁으로 도망치는데, 옥새가 실종됨.

11. 헌제쩨, 동탁이 난을 일으킴 191년 장사태수 손견이 군사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갔는데, 성남쪽 견관정에서 오색기운이 있는 것을 보고 손견은 사람을 시켜 우물에 들어가보게 하였더니 한전국새가 있었다. 글에는 수명우천 기수영창이 새겨져 있었고, 방원 4촌, 손잡이에는 오룡이 있었고, 한쪽귀퉁이는 깨져있었다. 손견은 이 옥새를 처 오씨 있는 곳에 감추어둔다. 후에 손견은 원술은 손견처를 붙잡아 옥새를 뺏는다. 손견이 죽은 후 형주자사 서규가 옥새를 가지고 허창으로 가서 조조에게 바치며, 조조는 당시 한헌제를 데리고 있었으므로 옥새는 다시 한황실로 돌아오게 된다.

12.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헌제를 핍박하여 양위하게 한다. 조비는 사람을 시켜 전국옥새의 어깨부분에 8글자를 전자로 새기게 한다 "대위수한전국지새(大魏受漢傳國之璽)"

13. 265년 12월 사마염이 같은 방법으로 황위를 찬탈하여 위제 조환을 퇴위시키고 위나라를 진나라로 바꾸며 진무제에 오른다. 전국옥새는 이로써 진(晋)에 귀속된다.

14. 311년 5월, 전조(흉노) 유총(劉聰) 이 진회제 사마직을 포로로 잡으면서 전국옥새는 전조(前趙)로 넘어간다.

15. 329년 9월, 후조(後趙)의 석륵이 전조를 멸망시키면서 전국옥새를 얻는다. 전국옥새의 우측에 "천명석씨(天命石氏)"라는 글자를 추가로 새긴다.

16. 350년 1월 염민이 후조의 황제 석감을 살해하고 전국옥새를 얻어 업성에서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국호를 대위(大魏,)를 세운다.

17. 352년 선비족인 모융준이 전국옥새를 얻기 위해 위를 공격한다. 3월에 염민은 패하여 포로가 되고, 5월에 살해된다. 위나라 대장군 장간은 태자 염지를 보좌하여 업성을 사수한다. 장간은 동진의 사상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사상은 대시를 보내서 구하게 한다. 대시는 장간에게 전국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청하여 얻어내고, 사상은 이를 진목제에게 바친다. 다시 사마씨의 수중으로 전국옥새가 들어왔다. 8월에 모용평은 업성을 함락시키고 11월에 전연의 모용준은 황위에 올라 황제가 되는데, 스스로 전국옥새를 얻었다고 주장하며 연호를 원새(元璽)로 바꾼다.

18. 420년 6월, 유유가 진공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며 국호를 송이라 한다.

19. 479년 4월, 소도성이 송순제를 핍박하여 양위하게 하며, 남제를 세운다.

20. 502년 4월, 소연이 남제를 뺏어 양나라를 세운다.

21. 548년 8월, 후경이 반란을 일으켰다 552년에 피살된다. 시중인 조사현은 옥새를 가지고 광릉으로 도망쳐서 북제의 신술에게 바치고, 신술은 북제조정에 바침으로써 북제의 고씨 소유로 넘어간다.

22. 577년 1월 주무제 우문옹이 북제를 평정한 후, 옥세는 주(周)나라로 간다.

23. 581년 2월 양견이 북주 정제를 폐위시키고 수(隋)나라를 세운다. 전국옥새는 수나라 궁중으로 들어가는데, 전국옥새를 수명새(受命璽)라고 부른다.

24. 618년 3월, 수양제 양광이 우문화급에게 강도에서 피살된다. 소후는 양제의 어린 손자 정도와 전국옥새를 데리고 막북의 돌궐에게 도망쳐서 수왕(隋王)으로 칭한다.

25. 당나라의 이세민은 전국옥새를 얻지 못하여 수명현새(受命玄璽)를 파서 "황천경명, 유덕자창"이라고 새겨서 쓰다가, 630년 이정이 돌궐을 치면서, 지리카한을 포로로 삼으며 동돌궐을 멸망시킨다. 같은 해에 소후는 양정도와 함께 중원으로 돌아오며, 전국옥새는 당나라 궁중으로 돌아온다.

26. 907년 4월, 당말에 천하가 어지러우면서 주황이 당애제를 폐하고, 전국옥새를 뺏어 후량을 세운다.

27. 923년 10월, 후당의 이존조는 후량을 멸하고 전국옥새도 후당에 들어간다.

28. 937년 1월 11일, 후당의 하동절도사인 석경당이 거란군을 데리고 낙양을 친다. 말제 이종가는 전국옥새를 안고 현무루에서 분신한다. 전국옥새는 이 때 사라진다.

 

이후에 몇번 전국옥새를 찾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후의 전국옥새는 모두 가짜라고 보고 있다.

 

첫째 경우,

 

1. 1096년 송나라 철종 때 함양현의 백성인 단의가 땅을 파다가 옛날 도장 하나를 발굴한다. 색은 녹색이고 따뜻하고 광택이 있으며 용손잡이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해 황제에게 바치며 예부, 어사대 등에서 고증을 하고 13명의 학사관원이 여러 차례의 고증을 거친 후에 시황제가 만든 전국옥새라고 결론을 내린다. 철종은 매우 기뻐한다.

2. 1127년 4월,   이 옥새는 정강의 변이후에 휘종흠종 두 황제가 납치된 후 전국옥새는 다시 금나라에 빼앗기고 행방을 모른다.

3. 1294년 1월, 원세조 쿠빌라이가 죽었을 때, 대도에 전국옥새가 갑자기 나타난다.

4. 1368년 1월, 주원장이 남경에서 명을 세우나, 원순제는 몽고초원으로 도망친다. 15만대군을 세번이나 몽고로 보내어 도망친 몽고조정을 쫓았으나, 결국 전국옥새는 찾지 못하고 만다.

 

둘째 경우

 

1500년 명 홍치 13년 섬서성현민 모지학이 니하빈에서 옥새를 얻었는데, 수명우천기수영창으로 되어 있고, 색이 흰색으로 약간 푸른 색을 띄며, 용손잡이가 있었다. 고증후 가짜로 결론을 내림.

 

셋째 경우

 

1632년 청태종이 차하얼부의 린단한을 궤멸시킨 후 린단한의 장자 어저가 무리를 이끌고 귀순하며 원나라때의 전국옥새를 바친다. 청태종은 이를 얻은 후, 진시황의 전국옥새가 아니라는 것은 바로 알아보지만, 이를 활용하여 여진을 만주로 고치고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고치며 연호를 숭덕으로 고친다. 청나라초에 궁내 교태전에는 39개의 각종 어새를 보관하였는데, 그 중에 진나라때의 전국옥새로 추정되는 도장도 있다. 건륭 11년 1746년 건륭은 고증을 거친 후 가짜로 판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