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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화씨벽(和氏壁)과 전국옥새(傳國玉璽)

by 중은우시 2005. 7. 21.


후세에 기록을 근거로 위조한 것으로 보이는 "受命于天,旣壽永昌"을 새긴 도장.

 

 

1. 화씨벽의 내력

 

춘추(春秋)시대에 초(楚)나라에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산에서 한 개의 박(璞, 옥을 싸고있는 돌덩어리)을 얻어서, 초여왕(楚勵王)에게 바쳤다. 초여왕은 옥장인에게 돌을 감정하게 하였는데, 옥장인은 그냥 평범한 돌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초여왕은 변화가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변화의 왼쪽 다리를 잘라버렸다. 나중에 초무왕(楚武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다시 박을 가져다 초무왕에게 바쳤다. 초무왕도 역시 옥장인에게 감정을 시켰는데, 옥장인은 또 그냥 돌맹이일 뿐이라고 말했다. 초무왕도 변화가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다시 변화의 오른 다리를 잘라버렸다.

 

초문왕(楚文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박을 안고 산에 가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삼일 밤낮을 울어서 눈물도 모두 마르고, 피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초문왕이 이 소식을 듣고 기이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서 물어보았다. "천하에 다리 두개가 잘린 사람도 많은데, 너는 왜 이렇게 슬프게 우느냐?". 변화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다리 두개가 잘린 것을 슬퍼해서 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옥석을 돌맹이라고 얘기해서 슬픈 것이고, 충정있는 사람이 사기꾼으로 볼리는 것이 슬픈 것이다." 초문왕은 다시 옥장인에게 명을 내려 박을 쪼개보도록 하였다. 과연 박안에는 보옥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이 옥을 변화의 이름을 따서 "화씨벽"이라 하였다.

 

2. 조혜왕(趙惠王)은 어떻게 화씨벽을 얻게 되었는가

 

초문왕이래로, 화씨벽은 계속 초나라에 머물러 있었다. 초위왕(楚威王)의 시대에 이르러, 초위왕은 공이 많은 초나라의 재상인 소양(昭陽)에게 화씨벽을 상으로 내렸다. 소양이 한번은 크게 연회를 연 적이 있는데, 이 때 화씨벽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연회중에 화씨벽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렸다. 소양은 장의(張儀)가 훔친 것으로 의심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초위왕이 장의를 받아주지 않아, 장의는 살길이 막막하여 당시 소양의 문하에 기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양은 장의를 피부가 터지고 살이 뭉그러지도록 때렸으며, 몇번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장의는 결국 초나라를 떠나서 진나라로 돌아갔다. 후에 소양은 천금을 내걸고 이 화씨벽을 사겠다고 하였지만 화씨벽을 훔친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소양은 결국 화씨벽을 찾지 못하였다.

 

50년이 지난 어느날, 먼 곳에서 온 손님 하나가 조나라의 환관인 영현의 집에 와서 하나의 옥벽을 팔았다. 영현은 이 옥벽이 흰색에 윤이 나고 하자가 없으며, 빛을 내뿜는 것을 보고는 오백금을 주고 사들였다. 후에 영현은 옥장인에게 옥을 감정하라고 시키자, 옥장인은 깜짝 놀라면서 이것이 바로 화씨벽이라고 하였따. 영현은 매우 기뻐하며 이를 감추어 두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사람을 통해 조혜왕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조혜왕은 영현에게 화씨벽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영현은 화씨벽을 너무나 아껴 즉시 바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조혜왕은 크게 노하여 사냥하러 가는 길에 갑자기 영현의 집안으로 들이닥쳐 화씨벽을 수색해서 가지고 가버렸다.

 

3. 화씨벽은 15개 성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화씨벽의 가치는 성에 필적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물론 과장된 것이다. 진소왕(秦昭王)이 성 15개를 줄테니 교환하자고 한 일은 있으나, 이것은 기만하려는 수법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화씨벽은 분명히 일반적인 옥과는 다른 특유한 공능을 가지고 있다.

 

고서의 기재에 의하면 화씨벽은 대체로 원형의 가운데 작은 동그란 구명이 있는 판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마치 가운데 중간에 구멍을 뚫은 둥근 전병같은 형태이다. 이것을 어두운데 놔두면 화씨벽은 빛을 내고, 먼지를 제거하며, 사악한 귀신을 쫓는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야광지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을 방안에 놔두면 겨울에는 따뜻하여 화로를 대신할만하고, 여름에는 매우 시원하여 100보이내로 파리모기가 들어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화씨벽은 희세의 진기한 보물로 여겨졌다.

 

4. 진소왕은 화씨벽을 얻었는가?

 

당시 요현에게 옥을 감정해줬던 옥장인이 우연히 진나라로 오게 되었고, 진왕을 위하여 옥을 깎게 되었다. 옥장인은 무의식중에 화씨벽에 대하여 얘기하였고, 그 행방을 얘기하였다. 진소왕은 조혜왕이 화씨벽을 가진 것을 알고는 이걸 속여서 손에 넣고자 하였으며 "완벽귀조(完璧歸趙)"라는 고사는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인상여(藺相如)의 용감함과 기지로 인하여 진소왕의 음모는 수포로 돌아가고, 진소왕은 화씨벽을 얻을 수 없었다. 후에 진시황이 육국을 멸망시킨 후에야 비로소 화씨벽을 얻게 되었다.

 

5, 화씨벽의 행방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육국을 멸망시킨 후, 좋은 장인으로 하여금 화씨벽을 깍아서 전국옥새로 만들게 하였다. 이사(李斯)로 하여금 "受命于天, 旣壽永昌"(하늘로부터 명을 받았으니, 영원토록 창성하소서라는 정도의 의미임)이라는 여덟글자를 충조전자(蟲鳥篆字, 벌레와 새와 같은 전서체의 글자)로 새기게 하였다. 이로써 화씨벽은 전국옥새(傳國玉璽)가 되었으며 황제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전국옥새는 진시황의 시대에도 한번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기원전 219년 진시황이 용주를 타고 동정호를 지날 때, 갑자기 풍랑이 일어 용주가 기울어졌다. 진시황은 급히 전국옥새를 호수에 던지며 하늘에 풍랑을 잠재울 것을 기원하였다. 이로 인하여 옥새는 실종되었는데, 8년후에 화음평서도의 어떤 사람이 다시 전국옥새를 찾아 진시황에게 바치게 된다.

 

 

진이세 호해가 사망한 후 자영이 한고조 유방에게 전국옥새를 바쳤다. 왕망이 찬탈한 이후에 왕망의 고모인 효원황태후에게 옥새를 내달라고 핍박하였다. 태후는 대노하여 옥새를 바닥에 집어던져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왕망은 사람들에게 황금으로 보완하게 하였다. 이로써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옥새는 후세에 계속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동한 말년에 각 제후들이 동탁을 토벌할 때, 먼저 낙양성에 들어온 손견은 우물에서 발견한 한 궁녀의 시신에서 붉은 색의 상자를 얻었으며 그 상자안에는 전국옥새가 들어 있었다. 손견의 아들인 손책은 옥새를 원술에게 바치고 병사와 말을 빌린 적이 있다. 손책은 이 옥새를 주고 원술에게서 3천의 병장을 얻어서 손씨의 오나라를 세우는 기반을 다지게 된다. 원술이 황제를 칭하였으나 실패한 후, 옥새는 조조에게 귀속된다.

 

그 후에 옥새는 약 1천년간 왕조를 바꾸어가며 전해지게 된다. 위(魏), 서진(西晋), 전조(前趙), 동진(東晋), 송(宋), 남제(南齊), 양(梁), 북제(北齊), 주(周), 수(隋)를 거쳐 당(唐)에도 전해진다. 이후 오대(五代)의 후당(後唐) 마지막 황제인 이종가(李從珂)가 거란의 야율광이 낙양으로 쳐들어오자 화씨벽을 안고 도망치다가 현무루에서 불에 타 죽으면서, 옥새가 실종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