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학/무협소설

김용 : [위소보 이녀석] (5)

by 중은우시 2005. 7. 19.

10

 

나는 <<녹정기>>에서 중국인의 모든 성격을 묘사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럴 재능이 없을 뿐아니라 사실상으로도 불가능하다. 단지 위소보의 몸에서 가장 특출난 점을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과 "의리를 중시한다"는 것으로 삼았다.

 

이 두개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외국인에게서는 현저하지 않은 것이다.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은 생존경쟁에서는 장점이지만, 도덕적으로는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다. 위소보에 있어서는 그의 대부분의 행동은 찬양할만한 것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청나라초기의 그러한 사회에서 이러한 행동은 그에게 매우 유리하였을 것이다.

 

만일 다른 환경으로 바꾼다면, 예를 들어, 현대의 스위스,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이러한 국가 즉 법률이 상당히 공정하고 엄격하며, 사회의 제재역량이 강하고, 투기적이고 술수를 쓰는 것으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고, 규칙대로 생활하는 것이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한 나라에서라면, 위소보와 같은 사람이 이민간다면 그는 환경에 적응하여, 규칙대로 생활했을 것이다. 비록, 위소보가 규칙대로 생활하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어던 사회에서 예를 들어, 뇌물, 비리, 사기, 범법의 결과는 깨끗하게 생활하는 것보다 유리할 수 있으며, 이런 사회와 제도는 개조되어야 한다. 소설에서 만일 이러한 얘기를 묘사한다면,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사회와 제도이다. <<관장현형기>>등등의 소설과 같다.

 

11.

 

중국인은 인정과 의리를 중시하고, 이것은 그들의 생활에 약간은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힘들고 가난한 생활에서, 만일 서로 적대시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냉혹하고 미움으로 가득하다면, 이러한 생활을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질조건이 풍요로운 도시에서는 인정을 얘기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의리를 얘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생활이 단조롭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살아나갈 것이다. 그러나 빈곤한 농촌사회에서는 인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풍파가 많은 강호에서는 의리는 지고무상의 도덕적인 요구사항이다.

 

그러나 인정과 의리는 원칙을 돌보지 않고, 많은 나쁜 관습들이 생겨나게 하였다. 중국정치는 계속하여 궤도에 오르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인이 인정과 의리를 너무 중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관계를 맺고, 조직을 결성하며, 치마바람을 일으키고, 재능보다는 고향과 친척을 중시하는 하고, 뒷문으로 들어가고, 정의를 중시하지 않으며, 법을 무시하고, 친구의 과실을 덮어주는데, 합리적인 인정이나 의리만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하고 공익에 해가되는 인정과 의리도 중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더러운 기운, "위소보스타일"이 모든 사회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처지에서 "위소보스타일"은 적을 수록 좋다.

 

그러나, 서방사회처럼 부모와 성년 자녀간에도 인정을 돌보지 않고, 공적인 일은 공적인 일로 하고 일체의 융통성이 발휘되지 않고, 단지 법률만 있고, 인정은 전혀 없다면, 단지 원칙만 얘기하고 의리는 돌보지 않는다면 너무 차갑지 않겠는가? 위소보가 만일 철면무사한 포청천처럼 바뀐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소설의 임무는 어떤 문제에 답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러한 사회에서 그러한 인물이 있다는 것이며, 너희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슬퍼하고, 어떻게 기뻐할지를 정한다.

 

이상은 내가 생각하는 위소보 이 녀석에 대한 약간의 잡생각이다.

 

솔직히 얘기하면, 내가 <<녹정기>>를 쓸 때는 이런 걸 생각하지 못하였다. 최초에 몇달동안 글을 쓸 때는 위소보의 성격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도 생각지 않았으며, 그는 천천히, 천천히 스스로 성장해갔다.

 

나의 경험에서는 매번 소설의 주요인물들은 최초에 쓸 때는 비교적 간단하고 모호한 그림자였다가 얘기가 점점 전개되면서 인물도 점점 분명해진다.

 

내가 <<녹정기>>에서 위소보를 그릴 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환경에 적응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이 두개의 특징을 묘사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었는데, 어쨋든, 이 두가지의 주요한 성격이 이 작은 깡패의 몸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친구들은 위소보에 대하여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타이페이에서의 좌담회에서 본래는 "김용소설"을 토론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결과는 4분의 3의 시간을 위소보의 성격에 대하여 변론하는 것으로 썼다. 적지 않은 독자들이 나에게 의견을 물었으며, 나도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분석해보기 시작하였다.

 

여기의 분석은 전혀 "권위"를 지닌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사후의 감상일 뿐이다. 글을 쓸 때늬 계획이나 마음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내가 소설을 쓸 때는 구성과 사실(史實)을 연구하는 외에는 모두 순전히 감성적인 것이다. 이성적인 분석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소설에서 어떤 주제를 고의로 표현할 것인지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만일 독자가 그 중에서 어떤 주제를 느낀 다면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것이다. 독자들이 스스로 내린 결론도 서로 그다지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서검은구록>>에서 <<녹정기>>까지 십여편의 소설에서, 내가 관심을 둔 것은 인물과 감정이었다. 위소보는 감정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녹정기>>는 정을 중시한 소설은 아니다. 거기서 쓴 것은 비교적 특수한 감정이다. 즉 강희와 위소보간의 군신간의 정의, 모순되고 충돌되며, 정이있고 우애가 있는 복잡한 감정이다. 다른 소설에서는 거의 써보지 않은 것이다.

 

위소보의 신상에는 많은 중국인의 보편적인 장점과 결점이 나타난다. 그러나 위소보는 당연히 중국인의 전형이라고 볼 수는 없다. 민족성은 일종의 광범위한 개념이고, 위소보는 독득하고 개성을 가진 사람이다. 유비, 관우, 제갈량, 조조, 아Q, 임대옥등등의 신상에도 중국인의 어떤 특성이 담겨있다. 그러나 그것이 중국인의 전형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중국인의 성격은 너무 복잡하다. 1만권의 소설을 쓴다고 하더라도 다 써낼 수 없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들의 신상에도 중국인의 어떤 특징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요괴를 쓴 사람이 바로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견은, 원래 간단하게 <<녹정기>>의 후기중에 쓰려고 하였으나, 나중에 생각하니 작가가 자기의 작품에 대하여 얘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것은 독자들이 스스로 느끼는 것을 방해할 수 있어서 쓴 후에 삭제해버렸었다. 그러나 작가는 항상 자기가 창조한 인물을 사랑한다. "문둥이도 제 집이 좋다"는 말이 있듯이, 이성적으로 비교하여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상, 내가 <<녹정기>>를 5분의 1쯤 썼을 때 위소보를 내 좋은 친구로 삼아버렸다. 어느 정도 봐주고, 보호하였는데, 중국인이 정을 중시하고 이성을 경시하는 나쁜 습관이 발동되어 버린 것이다.  편집자가 원고를 독촉하고, 다 쓴 글을 버리기도 뭣하여,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까하여 제공하니 도움이 되면 좋겠다. 급하게 쓰느라고 생각이 주도면밀하지 못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