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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송무제(宋武帝) 유유(劉裕): 중국역사상 전투에 가장 뛰어난 황제

by 중은우시 2025. 6. 27.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송무제 유유의 아명은 "기노(寄奴)"이다. 이름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유가 출생하자마자, 그의 모친은 세상을 떠난다. 유씨집안은 가난했고, 유모를 둘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유유의 부친은 원래 그를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같은 마을에 살던 이모도 아이를 낳아서, 어린 유유를 데려가 젖을 먹였고, 그렇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어른이 된 후, 유유는 짚신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고, 또한 "저포(樗蒲)"라고 부르는 도박에 빠진다. 한번은 동진의 관리 조규(刁逵)와 도박을 하다가 도박빚을 크게 지게 된다. 그는 갚을 수가 없었고, 화가 난 조규는 유유를 말을 매어두는 말뚝에 묶어놓는다.

상류층 인사들은 유유와 교류하기를 원치 않았는데, 오직 낭야왕씨(琅邪王氏)집안의 왕밀(王謐)만이 그를 다르게 대해준다. 왕밀은 유유가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자, 조규로 하여금 그를 풀어주게 하고, 또한 그를 대신하여 도박빚도 갚아주었다.

왕밀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당시 아직 이름을 날리지 못하고 있던 유유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일대영웅이 될 것이다."

역사학자 진인각(陳寅恪)은 이렇게 생각한다: 유유의 가정출신은 "차등사족(次等士族)"에 속했다. 그의 할아버지대는 진(晋)나라조정이 남천(南遷)하여 경구(京口)로 온 후, 태수(太守), 현령(縣令)같은 류의 지방관리를 지냈다. 그러나 동진은 "왕여마(王與馬), 공천하(共天下)"(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함께 다스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문벌정치였다. 유유같은 차등사족이 대권을 장악하기는 어려웠다.

동진말기에 이르자, 문벌정치의 게임규칙이 타파된다. 유유는 게임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었을 뿐아니라, 게임판을 뒤집어버릴 수도 있게 되어, 최종적으로 이 투쟁의 최후승자가 된다.

1

유유 이전에 문벌정치를 타파하려고 시도한 차등사족이 있었다. 그는 바로 손은(孫恩)이다.

그의 신분은 약간 신비하다. 그는 종교수단에 열중했다. 손은의 집안은 대대로 오두미교(五斗米敎)를 믿었고, 도술로 진나라황실 사마씨의 총애를 받는다. 다만 가족이 남으로 내려온 후에 중용받지 못하여 차등사족으로 전락한다. 지위는 높지 않았고, 권력의 중추에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그들은 이런 현상을 바꾸길 갈망했다.

진안제(晋安帝) 융안3년(399년), 보정(輔政)하던 회계왕(會稽王) 사마도자(司馬道子) 및 그의 아들 사마원현(司馬元顯)이 개혁을 시작했다. 동부 각 군의 노호(奴戶)를 석방하여 전호(佃戶)로 신분을 바꾸어주고, 경사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이들을 군대에 입대시켰다. 이 조치는 민심을 흉흉하게 만든다. 백성들은 모두 군대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다. 일시에 오도미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손은의 아래에 모여든다.

이 일이 발생하기 1년전에 손은의 숙부인 손태(孫泰)가 무리를 모아 거사를 시도했으니, 사마도자 부자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한 바 있다. 손은은 요행히 도망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섬에 숨어지내며, 숙부의 복수를 계획한다. 삼오(三吳)지구가 다시 혼란에 빠지자, 손은은 매부인 노순(盧循, 范陽盧氏 출신)과 함께 조정에 불만을 가진 강동8군의 농민등 무리를 수십만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손은, 노순의 난은 종교적인 색채를 띈 농민반란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 지도자인 손은, 노순은 실제로 동진의 문벌정치에 도전한 차등사족이었다.

손은 대군의 도전에 직면하여, 문벌사족은 그들의 부패함과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회계내사(會稽內史) 왕응지(王凝之)는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아들로 낭야왕씨 출신이다. 그는 손은이 오두미교도를 모아 회계로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적시에 방어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하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주문을 외웠다. 자신이 "귀병(鬼兵)"을 모셔와서 손은을 상대하겠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손은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회계성을 함락시키고, 왕응지를 붙잡아 죽여버린다.

손은이 해상으로 물러난 후, 사안(謝安)의 차남 사염(謝琰)이 명을 받아 손은의 반란군을 막으려 나선다. 그는 자신은 명망이 있다고 생각하여 백성들을 다독이지도 않고, 병력과 물자를 모으지도 않았다. 부하들은 그에게 섬에 숨어있는 손은이 공격해 오는 것을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염은 이렇게 말한다. 손은같은 소적(小賊)이 만일 정말 감히 싸우러 나온다면, 하늘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를 멸망시켜버릴 것이다. 나중에 손은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오자 사염은 식사도 마치지 못하고 말을 타고 전투에 나섰지만, 패배하여 전사하고 만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유유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때 가난한 도박꾼인 그는 이미 결혼을 했다. 그의 처인 장씨(臧氏)의 부친은 군(郡)의 공조(功曹)였다. 남자가 가정을 가지면 성숙해지는 법이다.

유유는 처자식이 자신때문에 힘들게 사는 것을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자리를 찾는다. 그리하여 북부병(北府兵)에 들어가서, 군인으로서의 생애를 시작한다.

북부병은 경구(京口)일대에서 병력을 모은 강력한 군대였다. 치감(郗鑒)이 일으켰고, 나중에 사현(謝玄)이 재건한다. 군대내에는 북방에서 내려온 교민들중 용맹한 자들이 많았다. 비수지전(淝水之戰)때 전진(前秦)의 백만대군이 밀고 들어왔지만, 북부병이 장강의 방어를 책임지며 국면을 뒤집어 승리를 거둔다. 그렇게 북부병은 동진조정의 대들보가 된다.

사현이 북부병을 떠난 이후, 북부병의 여러 장수들은 각지로 분산되어 흩어진다. 동진말기에 이르러, 북부병의 명장 유뢰지(劉牢之)는 이 군대의 지도자가 된다.

경구는 지금의 강소성 진강(鎭江)이다. 사진은 진강의 북고산(北固山)이다.

유뢰지와 유유의 조상은 모두 북에서 남으로 내려와 장강을 건너 경구에 거주하게 된 팽성(彭城)사람이다. 이런 말이 있다. 고향사람을 만나지 두 눈에 눈물이 줄줄이 흐른다. 유유는 몸집이 컸고, 군인이 될 자질이 충분했다. 군대에 들어온 후에 병사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어, 금방 유뢰지에게 중용된다. 유뢰지는 유유를 자신의 참군(參軍, 참모)으로 발탁하고, 그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손은의 군대를 막게 한다.

손은은 반란을 일으킨 후, 처음에는 매우 순조로웠는데, 이제 유유라는 극성(克星)을 만난다.

유유는 유뢰지에 의해 참군에 임명된 후, 수십명의 병사를 데리고 적군의 상황을 살피러 나선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도중에 손은군대의 수천병력과 맞부닥치게 된다. 만일 일반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도망쳐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정찰하러 나온 것인데, 무엇하러 목숨을 걸고 싸운단 말인가? 그러나, 유유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병사를 이끌고 상대방을 공격한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그가 데려간 병사들은 모두 전사하고, 오직 유유만이 남아서 장도를 들고 소리치며 적군과 싸우고 있었다.

손은의 병사들은 비록 우세를 점하고 있기는 하지만, 유유의 미치광이같은 행동에 놀라서 어쩔줄 모르고 속속 후퇴한다. 이때 유뢰지는 유유가 정찰을 나갔다가 아직 군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려, 병사를 보내 찾게 한다. 그런데, 유유가 혼자서 수천명과 싸우는 장관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증원온 병사들이 반군을 공격해서, 유유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손은의 병사 천여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다.

이 전설적인 전투 이후, 유유의 명성은 하늘을 찌른다.

유뢰지의 대군이 도착하면서 손은은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여 부하들에게 말한다: "내 생각에 도망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수하 및 그 가족 20여만명을 이끌고 다시 섬으로 도망쳐 숨는다.

융안5년(401년) 삼월, 손은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육지에 상륙하여, 해염현(海鹽縣, 지금의 절강성 가흥시)을 공격한다. 유유는 병력을 보내 이곳에 성을 쌓고 방어했다. 여러번 손은의 공격을 막아낸다. 그러나 해염성에는 병사도 적고 장수도 적었다. 그리하여 지구전을 펼치기는 어려웠다. 저녁이 되자, 유유는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낸다. 그는 성안의 군기를 쓰러뜨리고, 병사들은 숨도록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성문을 열고, 나이들고 병약한 병사들 몇몇을 성루로 보내 멀리 살펴보게 한다.

손은이 사람을 보내 정보를 취득했는데, 유유의 군대가 어제 밤에 이미 도주해버렸다고 한다. 손은은 그것을 사실로 믿고 병력을 성으로 진입시킨다. 손은의 군대가 성으로 진입하자마자, 미리 매복해있던 유유의 군대가 그들을 공격한다. 유유의 이 "공성계"로 손은은 대패한다. 손은은 해염성을 점령하기 어렵겠다고 여기고, 병력을 이끌고 다른 성으로 간다. 유유는 승기를 잡아 추격하여, 손은의 군대를 공격한다. 손은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북부병의 공격하에, 손은은 연전연패한다. 병력도 점점 약해진다. 같은 해 팔월, 유유는 동진조정에서 하비태수(下邳太守)로 임명되고, 병력을 이끌고 손은을 토벌한다. 3개월의 전투를 거쳐, 손은의 군대중 유유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죽임을 당한 자들이 만명을 넘는다. 손은은 부득이 다시 섬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 손은이 삼오지구에서 붙잡아온 남녀들이 거의 없어진다. 손은은 동진의 군대에 생포될 것을 겁내,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한다. 그의 일당과 처첩들도 그를 따라 수백명이 바다에 몸을 던진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수선(水仙)"이라고 불렀다.

손은이 죽은 후, 그의 부하들은 그의 매부인 노순이 지휘하며, 계속하여 연해에서 활동한다. 10년후에 이르러, 노순의 군대는 동진의 대권을 장악한 유유의 병력에 의해 평정된다. 노순도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하는 것을 선택하여, 처남 손은의 뒤를 따른다.

손은, 노순의 난은 차등사족이 농민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려는 시도였으나, 실패로 끝난다. 당초 손은과 전투를 벌이면서 두각을 나타낸 유유는 아마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또 다른 방식으로 차등사족의 역습을 실현하게 될 줄은.

2

동진말기, 두번째 문벌정치를 타파하려는 시도는 환현(桓玄)에 의해 일어난다.

환현은 초국환씨(譙國桓氏)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그 이름도 유명한 야심가 환온(桓溫)이다. 동진때, 황권은 사족(士族)과 장기간 상호균형을 이루어왔다. 낭야왕씨, 영천유씨(潁川庾氏), 초국환씨와 진군사씨(陳郡謝氏)등 문벌세력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전후로, "왕여마, 공천하"의 역할을 담당했다.

환온이 권력을 장악한 후, 사족과 사족간의 균형을 타파하기 위하여, 유씨등 사족을 도륙했을 뿐아니라, "토단(土斷)"을 반포하여, 호구를 엄격히 조사하여, 호구를 숨긴 귀족과 지주를 처벌한다. 심지어 그는 거의 황제에 오르기 직전까지 이른다. 조정의 왕씨, 사씨세력들이 계속 저지하여 결국 환온은 병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황제꿈을 이루지 못한다.

환온이 죽은 후, 초국환씨는 한때 조정에서 멀어진다. 그리하여 환온의 아들 환현은 오랫동안 중용되지 못했고, 종실인 사마도자(司馬道子)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당시 재위하고 있던 진안제 사마덕종(司馬德宗)은 거의 백치였고, 배고픔과 추위, 더위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으며, 음식을 먹고 기거하는 것도 혼자서는 해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조정대권은 사마도자, 사마원혁 부자의 손아귀에 쥐어진다. 그들은 사마씨의 황권을 대표했는데, 이들 부자도 멍청이였다. 손은의 반란을 불러온 도화선도 바로 이들 부자가 내린 하나의 멍청한 정령(政令)때문이었다.

환현이 23살때, 사마도자를 찾아가서 만난다. 그때 사마도자는 술에 취해 있었다. 사마도자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곁에 있던 빈객에게 말한다; "환온은 말년에 황위를 찬탈하고자 했다는데, 정말 그러했는가?" 그말에 깜짝 놀란 환현은 바로 땅바닥에 엎드렸고, 등에는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환현은 사마도자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기 보다는 원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바득바득 갈게 된다.

나중에, 조정은 환현을 의흥태수(義興太守)에 임명한다. 환현은 관직이 너무 낮다고 여겨서 우울해 했다. 그는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탄식했다: "부친은 구주백(九州伯)이었는데, 아들은 오호장(五湖長)이구나!"

사마도자 부자는 인심을 얻지 못했고, 그것은 환현에게 기회를 주게 된다.

당시 사마도자 부자의 권력독점에 불만을 품은 동진의 대신 왕공(王恭)이 앞장서서 거병한다. 비록 왕공은 얼마 후에 패전하고 말았지만, 동진 지방세력에 연쇄반응을 불러와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후, 환현은 부친 환온의 옛부하들의 지지를 받아, 환씨의 근거지인 형주(荊州)를 빼앗고, 연이어 은중감(殷仲堪), 양전기(楊佺期)등 지방세력을 소멸시키고, 도독형、강팔주군사(都督荊、江八州軍事)가 되어 명성을 천하에 떨친다. 전성기때는 동진의 2/3의 판도를 차지한다.

형주: 환온, 환현 부자의 근거지

환현은 스스로 사마도자 부자를 대체할 수 있다고 여겨, 서신을 보내 그들을 위협한다. 현재 조정의 충신은 모두 너희부자의 신임을 얻지 못해, 하루하루 쌓이다보니 지금 사방에서 동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조정신하들은 모두 감히 말하지 못하지만, 나 환현은 외지에 있어서 감히 진상을 까발리는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서신을 받은 후, 사마도자는 "그것을 보고, 크게 두려워했다(見之, 大懼)"고 되어 있다.

환현은 강릉(江陵, 지금의 호북성 형주)에서 병력을 일으켜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을 공격하여, 사마부자를 하야시키려 한다. 그리고 북부병의 유뢰지에게 사람을 보내 협력하자고 한다. 유뢰지는 평소에 사마도자 부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비록 그는 조정에 의해 환현을 상대하는 선봉으로 임명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환현을 물리친 후에 공고진주(功高震主)하여 사마도자에게 더욱 배척당할 것을 우려했다.

환현이 사람을 보내어 협력을 요청하자, 유뢰지는 별로 생각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한다. 유유와 유뢰지의 외조카인 하무기(何无忌)는 모두 환현에게 이용당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유뢰지는 듣지 않았고, 환현에게 투항한다.

나중에 환현이 권력을 장악한 후, 유뢰지를 회계내사로 임명한다. 그제서야 유뢰지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빨리 나의 병권을 빼앗는단 말인가, 나에게 큰 화가 곧 닥치겠구나!"

유뢰지는 그제서야 거병하여 환현에 항거할 생각을 하고, 유유에게 함께하자고 한다. 그러나 유유는 옛 상사의 요청을 거절하며 말한다: "장군은 이전에 수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소식만 듣고 바로 환현에게 투항하셨습니다. 그런데 그(환현)은 이미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조정내외는 모두 그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저도 군복을 벗고 경구의 고향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무기는 유유의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외삼촌 유뢰지는 믿을 수 없다고 보아, 유유에게 묻는다: "네가 보기에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유유는 말한다. "내가 보기에, 유뢰지는 결국 죽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너는 나를 따라 경구로 돌아가자. 만일 환현이 신하의 예절을 지킨다면, 우리는 함께 그의 말을 듣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방법을 강구해서 그를 상대하도록 하자." 얼마 후, 유뢰지는 과연 거병에 실패하고, 결국 자결하고 만다. 그후 개관육시(開棺戮屍)당하고, 폭시어시(暴屍於市)당한다.

학자 전여경(田餘慶)이 말한 것처럼, 유뢰지의 실패는 "정치에서 패배한 것이지, 군사에서 패배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마도자 부자의 종실명분이라는 무게를 감히 돌파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환현으로 대표되는 문벌사족의 역량도 돌파하지 못했다.

환현은 여러 주의 병력을 모으고, 북부병도 매수하였으니, 건강은 전혀 막아낼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신속히 함락된다. 원흥2년(403년), 환현은 병력을 이끌고 입경한다. 권신 사마도자부자와 북부병장수 유뢰지를 제거한 후, 진안제를 폐위시키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고 환초정권(桓楚政權)을 건립한다.

환씨가족은 2대에 걸쳐 노력한 끝에 마침내 동진의 문벌정치의 대문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환현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은 그의 "제업(帝業)"이 한 차등사족에 의해 금방 멸망당한 것이다.

3

전여경은 환현이 동진으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것을 문벌사족정치의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본다. 그후의 경구에서 유유가 거병하여 유의(劉毅), 하무기, 제갈장민(諸葛長民)등과 환초를 토벌할 때, 이들이 참가한 목적은 오직 환현을 타도하고, 동진황실을 부흥시키는 것이었다. 문벌정치를 대체할 의도는 없었다. 소위 "지재광복(志在光復), 정비조송(情非造宋)"이었다(뜻은 동진을 부활시키려는 것이지, 유송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유유는 달랐다. 심지어 당시의 많은 사람들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는 것을 보았다.

환현이 칭제한 후, 유유는 입조하여 배알한다. 환현의 황후인 유씨(劉氏)는 그가 위협이 된다고 여겨, 남편인 환현에게 말한다: "내가 보기에 유유는 용행호보(龍行虎步)이다. 눈빛도 보통 사람이 아니다. 오랫동안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닌 것같으니, 하루빨리 기회를 잡아 그를 죽여버리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환현은 인재를 아끼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중원을 평정해야 하는데, 바로 유유같은 인재가 필요하다. 관중, 하락을 평정한 후에 다시 그 일을 논의해보기로 하자."

그러나, 환현은 이때 유유를 제거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원흥3년(404년), 유유는 경구로 돌아온다. 하무기등 북부병의 옛장수들과 환현을 토벌한 계획을 모의한다. 하무기는 밤중에 집에서 격문을 초안한다. 그의 모친이자 유뢰지의 누나는 등받이없는 의자에 올라가서 몰래 그를 보았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나는 비록 한나라때의 여모(呂母, 서한말기 왕망의 통치에 반대한 반란지도자)같이 사리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네가 이렇게 하다니, 내가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하무기의 모친은 다시 묻는다. 같이 거사를 도모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무기는 말한다. 유유입니다. 그러자 하무기의 모친은 매우 기뻐하면서, 그들이 함께 거병한다면 반드시 성공하고, 환현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하무기는 유유와 상의를 마친 후, 또 다른 북부병의 장수인 유의를 설득하여 가담시킨다.

두 사람은 모두 심기가 뛰어났다. 하무기는 유의를 떠보기 위해 이렇게 묻는다: "환씨가 현재 강성한데, 토벌할 수 있을까?"

유의도 돌려서 대답한다: "정의로 역적을 토벌하는 것은 실패가 두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지도자도 없지 않은가?"

하무기는 일부러 유유를 언급하지 않고, 시험적으로 말했다: "너는 스스로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구나, 설마 천하에 영웅이 없단 말인가?"

유의도 하무기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즉석에서 말한다: "내가 보기에, 오직 유유만이 대사를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무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말한다. 이 일을 그렇게 확정되었다.

그러므로, 유유는 환초를 토벌하는 맹주로 추대되고, 하무기, 유의, 제갈장민등 27명의 장수들이 피를 뽑아 맹세하여 거병하게 된다.

환현은 스스로 자신이 비범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겁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유유가 거사했다는 말을 듣자, 여러 날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신들이 말한다: "유유의 군대는 모두 오합지중입니다. 아무 일도 성사시킬 수 없을 것이니,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환현은 탄식하며 말했다: "유유는 당세영웅이라 할 만하다. 유의도 목숨을 아끼지 않는 도박꾼이다. 하무기는 그의 외삼촌 유뢰지와 닮았다. 그들이 함께 일을 일으키는데 어찌 성사되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환현은 북부병과 강대강으로 맞부닥치지 않고, 이백리를 물러나서, 복주산(覆舟山, 지금의 현무산. 남경성동북쪽에 위치함)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이일대로(以逸待勞, 피곤한 병사를 편안하게 기다린다)한다. 그러나, 유유는 순식간에 강승(江乘, 지금의 남경시 서하구)까지 쳐들어온다.

유유의 군대와 환현 수하의 용장 오보지(吳甫之)가 맞부닥친다. 유유는 다시 한번 맹장의 본색을 드러낸다. 손에 장도를 쥐고, 크게 소리치면서 싸움에 뛰어들어, 오보지를 말에서 베어 버린다. 오보지의 부대는 궤멸되었고, 유유는 나락교(羅落橋, 지금의 남경시 동북쪽)까지 진입한다.

그후, 유유는 환현의 또 다른 심복장수인 황보부(皇甫敷)와 대적한다. 황보부는 포위망을 깔았고, 유유는 그 안에 갇힌다. 양군이 대치하면서, 황보부는 유유를 도발한다: "어떻게 죽고 싶은가?" 말을 마치고 장극(長戟)으로 유유를 찔러간다. 유유는 포위망에 빠져 있었지만,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눈을 부릅뜨고 직시하자, 놀란 황보부는 감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바로 이 때, 유유의 지원군이 도착하고, 화살을 한 대 쏘아 황보부의 이마를 맞춘다. 황보부는 바로 땅바닥에 쓰러진다. 유유는 칼을 들고 달려나가 그를 참살한다. 죽기 전에, 황보부는 유유가 당세영웅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후사를 부탁한다: "그대는 천명을 받았으니, 내 자손을 그대에게 맡기겠다." 유유는 나중에 그의 후손을 잘 대해준다.

오보지, 황보부가 연이어 패배하자, 유유의 군대는 순식간에 건강성 아래에까지 도착한다. 환현은 할 수 없이 성을 나와 서쪽으로 도망쳐, 가족이 경영하는 형양지지(荊襄之地)로 돌아가고자 한다. 성을 나서면서, 환현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저 말채찍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고, 하루종일 한끼도 먹지 못했다. 시종은 거친 쌀밥을 그에게 바쳤으나, 그는 그것도 삼키지 못했다.

환현은 문벌정치의 게임규칙을 깼고, 자신이 황권을 차지하고자 했지만, 그는 중시지적(衆矢之的)이 되어 지금은 길거리의 쥐새끼처럼 사람들마다 때리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후, 환현의 병력은 산사태가 나듯이 무너지면서, 익주(益州)까지 패퇴한다. 주변에 남은 심복도 몇 남지 않았다. 익주독호(益州督護) 풍천(馮遷)은 그가 반드시 지나가야할 길에 매복을 설치해두고 칼을 뽑아 환현을 죽이고자 한다. 환현은 머리에서 황관을 벗으면서 풍천에게 말한다: "너는 누구냐. 감히 천자를 죽이려 하는가?" 풍천은 큰 소리로 대답한다; "내가 죽이려는 것은 천자의 원수이다!" 환현이 피살된 후, 그의 수급은 건강으로 전해진다. 수급은 다리 위에 걸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또 한명의 인물이 패퇴하여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다.

4

의희원년(405년), 유유는 진안제를 다시 모셔와서 황위에 앉힌다. 유유는 환현을 대체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시중(侍中), 거기장군(車騎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양주자사(揚州刺史), 녹상서사(錄尙書事), 서연이주자사(徐兖二州刺史)가 된다.

그가 이런 지위도 높고 권력도 큰 직위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유유가 차등사족의 신분으로 문벌사족의 장기간 권력독점을 타파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동진말기 정치게임의 세번째 참가자이고, 또한 최후의 승자이다.

유유가 재건한 북부병은 문벌정치를 무너뜨린 마지막 지푸라기가 되었을 뿐아니라, 또 다른 차등사족의 반항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중에는 앞에서 얘기한 노순이 있고, 유유의 동맹이었던 유의, 제갈장민도 있다.

형주자사 유의는 비록 당초 유유를 맹주로 추대했지만, 유유가 조정에 들어가 보정하며 권력을 독점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조정에 양주를 다른 사람이 관장하도록 건의한다.

유유의 모사인 유목지(劉穆之)는 유유에게 말한다: 절대로 이 건의를 따라서는 안됩니다!

유유가 거병할 때 유목지를 불러 주부(主簿)로 삼았다. 즉, 기요비서(機要秘書)이다. 당시 유목지는 경구에서 전해지는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유유가 보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급히 집으로 돌아가 바지를 갈아입은 후 유유를 만나러 간다. 유유는 말했다. 나는 막 거병했다. 문서를 책임질 인재가 필요하니, 네가 보기에 누가 담당하면 좋겠는가? 유목지는 그자리에서 말한다: "장군의 군부(軍府)는 이제 막 건립되었습니다. 급박하니 아마 제가 가장 적합할 것같습니다!" 그리하여 유목지는 그때부터 유유의 지낭이 된다.

유목지는 유의가 유유의 힘을 약화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유유에게 계책을 올린다: "동진 조정의 권력은 이미 잃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천명이 이미 바뀌었습니다. 당신은 진왕조를 부활시켰고, 지위는 높고 권한도 큽니다. 스스로 겸양하지 마십시오. 유의 등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한미한 집안 출신에서 태어났고, 함께 거병하여 부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당신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서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현재 양주라는 땅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서는 안됩니다. 권력을 일단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나면, 다시 빼앗아 올 기회는 없게 될 것입니다."

조정에서 이 일을 논의할 때, 의사를 분명히 밝히십시오. "조정의 재보(宰輔)와 지방고위직의 임면은 국가의 대사이다. 절대로 헛되이 논의해서는 안되고, 내가 시간을 내서 입조하여, 여러 왕공대신들과 인선에 대해 깊이있게 검토해보겠다." 그러면 당신이 경성에 도착한 후, 그들은 겁을 먹고 감히 당신을 무시하고 양주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못할 것입니다.

유유는 유목지의 건의를 따랐고, 과연 조정에서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유의는 부드러운 방식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보고, 강경한 방식을 취하기로 한다. 의희8년(412년), 형주를 점거하고 있던 유의는 자신이 당초 거병한 공로는 유유와 동일하다고 여겼고, 유유에 대한 불만이 점점 더 커진다. 그리하여 이런 말까지 하게 된다: "유방, 항우를 만나 그들과 중원을 다투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유유에게서 권력을 빼앗겠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유의는 "그는 문아(文雅)한 점이 있었고, 그리하여 조정의 선비들 중에서 청망(淸望)이 있는 자들이 많이 그를 따랐다." 유유에 대항하기 위해, 그는 물벌사족의 대표인 상서복야(尙書僕射) 사혼(謝混), 단양윤(丹陽尹) 치승시(郗僧施)등과 협력한다. 그리하여, 유의의 항쟁은 배후에 문벌사족의 반격이 있는 것이다.

유유는 당시에 이미 태위(太尉)였고, 그는 진나라조정에 압박을 가해 유의의 죄행을 반포하게 한다. 그후 직접 대군을 이끌고 형주를 토벌하고, 유의의 일당을 제거하고자 한다.

유의는 전투에서 전혀 유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패전후 그는 이름을 숨기고 강릉의 우목불사(牛牧佛寺)로 간다. 그는 투숙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한다. 당초, 유의는 환씨의 잔당을 추적살해하면서, 우목불사를 지나간 바 있다. 그리고 환씨를 숨겨준 승려들을 죽여버렸다. 절의 승려가 유의에게 말한다: "이전에 돌아가신 사부께서 반당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유의 장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적이 있다. 지금 본사에서 다시는 외인을 거두어줄 수가 없다."

유의는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일종의 숙명으로 여겼는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탄식하며 말한다: "내가 스스로의 길을 막아버렸구나.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말을 마치고 절망한 그는 목을 매어 자결한다.

유의와 결탁했던 사혼등도 처형당한다. 나중에 유유가 진나라로부터 황위를 찬탈할 때, 사혼으로 하여금 새불(璽紱)을 바치도록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유감으로 여기게 된다.

유유가 거병할 때의 또 다른 맹우는 낭야제갈씨 가족출신의 제갈장민도 매우 감정적이다. 그는 유유가 언제든지 자신을 조사해서 처벌할 수 있을 것이라 걱정한다. 유의가 패망하자, 제갈장민은 더욱 우려하며, 자신이 유하 수하의 팽월, 한신처럼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두명은 모두 서한의 개국공신으로 최후가 비참했던 인물들이다.

제갈장민은 몰래 유유의 모사인 유목지에게 물어본다: "외부의 소문으로는, 태위가 나에게 불만의 있다고 하는데, 왜 그런 것인지요?"

유목지는 즉시 제갈장민의 정서를 안정시킨다: "유공이 유의를 토벌하면서, 자신의 노모와 나이어린 아이까지 당신에게 맡기지 않았는가? 만일 당신은 신임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모사의 입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다. 제갈장민은 조금 안심되어, 유유가 승리를 거두고 조정으로 돌아올 때, 제갈장민은 급히 그를 만나겠다고 찾아간다.

유유는 건물에서 걸어내려와 제갈장민의 손을 붙잡고 예전처럼 담소를 나눈다. 형님 별래무양하셨습니까. 당초 우리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형님에게 맡겼으니, 이제 형제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저를 계속 도와주시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제갈장민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매복하고 있던 장사가 뛰쳐나와서 제갈장민을 쓰러뜨리고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다.

5

 

동진의 조정에서 더 이상 유유의 적수는 없었다. 유유는 상국(相國), 송공(宋公)등 신하로서는 최고위의 관직과 작위를 받고, "검리상전(劍履上殿), 입조불추(入朝不趨), 찬배불명(贊拜不名)"의 특권도 누리게 된다(검을 차고 대전에 들어가는 것, 조정내에서 걸을 때 잰걸음으로 걷지 않아도 되는 것, 아뢸 때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것)

조정의 정적을 제거하는 동시에, 유유는 다른 정권에 대한 정벌도 시작한다. 그는 북상하여 청주(靑州), 서주(徐州)에 할거하고 있던 남연(南燕)을 소멸시키고, 서쪽으로 촉(蜀)의 땅에 할거하고 있던 초종정권(譙從政權)도 정벌하며, 관중을 북벌하여 후진(後秦)을 멸망시켰다.

이것이 바로, 남송때의 신기질(辛棄疾)이 쓴 사에 나오는 "사양초수(斜陽草樹, 심상항맥(尋常巷陌), 인도기노증주(人道寄奴曾住). 상당년(想當年), 금과철마(金戈鐵馬), 기탄만리여호(氣呑萬里如虎)"(저녁햇살이 나무와 풀이 가득 자란 보통 골목길을 비추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곳은 옛날 유유가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그 옛날을 생각히보니, 그는 정예병마를 이끌고 정벌에 나섰으며, 그 기세는 만리를 집어삼키는 맹호와 같았었다)

다만, 유유의 북벌은 여전히 중원을 수복하지 못한다. 그는 출병하여 후진을 멸망시킨 후, 나이 겨우 12살의 아들 유의진(劉義眞)과 다른 몇병 장수를 남겨 장안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남으로 되돌아간다.

당시, 또 다른 북방정권인 대하(大夏)의 모신(謀臣) 왕매덕(王買德)은 이렇게 말한다: "유유는 급히 황위를 찬탈하고자 하는 마음이어서, 중원을 다시 살필 뜻은 없다." 유유가 남하한 후, 대하는 기회를 틈타 관중을 침입하여, 유유의 북벌성과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러나 사방을 정벌하여 얻은 전공은 그의 동진조정에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해준다 .

진왕조를 빼앗는 것이 유유의 최종목표이다. 또한 그가 차등사족으로서의 최후의 역습이기도 하다.

조정으로 돌아와서, 유유는 송왕이 되고, 구석(九錫)을 받는다. 이는 황위찬탈전의 표지이다.

유유는 조정신하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면서, 담담하게 말한다: "환현이 찬탈할 때, 천명은 이미 옮겨갔다. 내가 먼저 대의를 내걸고 진황실을 부흥시켰으며, 남정북벌하여, 사해를 평정했고, 조정은 나에게 구석의 영예를 주었다. 지금 나는 이미 말년이 되었다. 물기성만(物忌盛滿, 사물은 가득 차는 것을 꺼린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장기적인 방법이 아니다. 나는 작위를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말년을 편안히 보내고자 한다." 대신들은 그의 이 말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모두 돌아가며 그의 송덕을 칭송하고, 감히 다른 의견은 내지를 못한다.

중서령(中書令) 부량(傅亮)이 술을 다 마시고, 돌아가던 길에 돌연 유유의 말 속에 숨은 의도를 깨달았다. 그는 급히 되돌아가 만나뵙기를 청한다. 유유는 그에게 대문을 열어준다. 부량은 그에게 단 한 마디만을 한다: "제가 지금 바로 입궁하겠습니다!"

유유는 부량의 뜻을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말한다. 그럼 내가 몇 사람을 붙여서 당신을 호송하겠다. 부량이 나왔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하늘에는 별들만 가득했다. 천문역법에 정통한 부량은 이것을 길조(吉兆)라고 여긴다.

원희2년(420년), 육월, 부량등은 당시 재위하고 있던 진공제(晋恭帝)에게 황위를 송왕 유유에게 선양할 것을 암시하고, 사전에 조서까지 초안을 마친다.

진공제 사마덕문(司馬德文)은 동진의 마지막 황제이다. 이전에 유유는 사람을 보내 무능한 진안제를 암살하고, 황위를 찬탈하려고 생각했는데, 그때 진안제의 전임황제인 진효무제(晋孝武帝)의 재위시 이런 참어(讖語)가 떠돌았다는 것을 떠올린다: "창명(昌明, 즉 진효무제)이후에 두 황제가 있다(昌明之後有二帝)". 미신을 믿던 유유는 도참에 부합하도록 하기 위해 사마덕문을 황제에 앉힌 것이다. 사마덕문은 드라마에 나오는 아무 생각없이 밝은 사내아이같았다. 아무런 존재감도 없고, 그저 도장찍는 기계에 불과했다.

진공제는 부량이 조서까지 초안해놓은 것을 보고, 그는 기꺼이 동의한다: "환현이 황위를 찬탈했을 때, 진왕실은 이미 천하를 잃었다. 나중에 송왕에 의존하여 지금까지 연명할 수 있었다. 오늘 나는 기꺼이 그에게 황위를 선양하겠다."

그리하여 유유는 선양을 받아 칭제건국한다. 국호는 송이라 하니, 역사에서 그를 송무제라 칭한다.

남조의 시대가 이렇게 열린다.

다만, 사마덕문은 선양후에 그다지 운이 좋지 못했다. 유유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낭중령(郞中令) 장위(張偉)을 시켜 독주를 한 단지 보내 그를 독살하려 한다.

그러나 장위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군주를 독살하면서 살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 그리고 독주를 마시고 죽는다.

사마덕문은 유유가 자신에게 좋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저비(褚妃)와 같은 방에 머물면서, 모든 음식을 저비가 직접 만들었다.

유유는 음식으로 그를 독살할 수 없게 되자, 암살을 기획한다.

그는 저비의 두 오빠로 하여금 사마덕문을 찾아가게 만든다. 저비가 두 오빠들과 만나는 틈을 타서, 유유의 자객이 담을 넘어 들어가, 사마덕문에게 독약을 준다.

사마덕문은 이것이 유유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았고, 반항한다. 그는 자객과 철학을 논한다: "불교에 이르기를 자살을 하면 육신을 다시 얻을 수 없다고 했다." 독살이 힘들다고 보고 자객은 솜이불을 이용하여 그를 질식시켜 죽인다. 그후, 송무제는 문무백관을 이끌고 가식적으로 3일간 애도한다.

남조때, 문벌사족의 세력은 이미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그러나 유유가 만든 황권정치는 이미 문벌정치를 대체했고, "왕여마, 공천하"의 국면은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송무제 유유는 이렇게 동진 문벌정치의 굴묘인(掘墓人)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