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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오늘

전문23호(前門23號): 천안문광장앞 저택의 이야기

by 중은우시 2025. 6. 5.

글: 해대부부부(海大富富富)

북경의 심장지대인 천안문광장은 유명한 랜드마크로, 국가의 위엄과 역사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건물이 하나 조용히 서 있다 .이름은 전문23호(前門23號)이다. 그 건물이 천안문처럼 유명하지 않지만, 이곳은 지리적인 우세를 모두 점하고 있으며, 천안문광장을 이웃하고 있어 위치는 모든 사람들이 욕심을 내는 곳이다. 그럼 이 전문23호는 도대체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이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전문23호의 기원은 청나라말기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그때, 중국은 열강들로부터 굴욕을 받는 세월을 겪었다. 1860년, 제2차아편전쟁이 끝난 후, 청나라정부는 <북경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고, 외국열강들은 북경성내에 공사관을 두게 된다. 동교민항(東交民巷)은 이렇게 사관구(使館區)로 획정된다. 1862년, 미국공사관이 동교민항의 남측에 자리잡는다. 진정한 큰 사건을 뒤에 일어난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이 발생하면서, 북경의 외국공사관은 55일간 포위되어 버린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힘들게 지내야 했다. 미국공사 Edwin Hurd Conger는 그때 가족들을 데리고 이곳을 지켰다. 그는 미국내전을 거친 노병이고, 1898년에 중국에 공사로 왔다가 이 난국을 맞이한 것이다. 팔국연합군이 1900년 8월 북경으로 쳐들어오면서, 공사관의 포위는 풀린다. Conger는 이곳이 너무 낡았다고 보고 새로운 곳을 찾는다.

1901년 <신축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공사관은 동교민항23호로 옮겨간다. 1903년, 새 건물이 완공되는데, 설계사는 미국의 건축가 Sid H. Nealy이다. 이 건물은 약 1만여 평방미터를 점하고 있으며, 중간에는 3000여평방미터의 잔디밭이 있으며, 주위를 5동의 저층건물이 둘러싸고 있다. 건축은 신고전주의 스타일이며, 회색석재로 외벽을 마감했다. 기둥과 조각은 서양스타일이며, 창문에는 채색유리를 넣었다. 안쪽의 바닥은 나무로 만들었고, 벽난로가 있어서 아주 기세가 있었다. 그후 전문23호는 미국의 대중외교에서 총본산이 된다.

중화민국시대가 되면서, 국면이 바뀐다. 1928년, 국민정부가 수도를 남경으로 옮기면서, 북경의 지위는 일락천장한다. 동교민항의 사관구는 예전처럼 활발하지 않았다. 전문23호는 미국공사관으로 계속 쓰고는 있었지만, 중요성은 예전만 훨씬 못했다. 게다가 전란이 빈발하면서 북평(北平, 그때 북경의 명칭)은 점점 쇠락한다. 이 지역의 건축도 서서히 황폐되기 시작한다. 길거리에는 잡초마저 자라기 시작한다. 일찌기 번성했던 모습은 단지 기억에 의존해야 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때의 전문23호는 매우 참담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아무도 수리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묵묵히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아주 중요하다. 천안문의 건너편이라는 이 위치는 잃어버리려고 해도 잃을 수가 없는 것이다. 1949년이 되면서, 신중국이 성립되고, 이 곳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신중국이 성립되자, 정부는 동교민항의 사관구를 수습하기 시작한다. 전문23호의 이 오래된 건물은 정부에서 접수하여 새로 수리한 다음 전문빈관(前門賓館)으로 바꾸고, 조어대국빈관(釣魚臺國賓館)에서 관리했다. 이건 보통의 호텔이 아니었다. 전문적으로 외빈을 접대하는 국빈급 장소였다. 1950년대, 북경의 접대능력은 한계가 있어서, 전문빈관에 투숙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대단한 외국손님들뿐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문빈관은 외교활동의 중요무대가 된다. 가장 유명한 경우는 1971년 7월, 주은래가 이곳에서 미국의 국가안전고문 헨리 키신저를 접견한 것이다. 그때 미중관계는 얼어붙어 있었고, 키신저는 비밀리에 북경을 방문했다. 이는 파빙지려(破氷之旅)의 첫걸음이었다. 회담은 전문23호의 한 회의실에서 개최된다. 쌍방은 대만문제, 월남전쟁을 이야기하고, 세계국면도 이야기했다. 몇 시간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이번 만남은 1972년 닉슨의 방중에 길을 닦은 것이니 의미가 적다고 할 수 없었다.

1972년 2월, 닉슨이 정말 북경으로 왔다. 비록 그가 전문빈관에 투숙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일부 접대업무를 담당했다. 그 몇년간 전문23호는 미중관계가 적대관계에서 완화되는 역사적인 전환을 목격했으니, 자신이 가장 잘나간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전문빈관의 사명은 거의 끝난다. 북경의 현대화가 가속화하면서, 새로운 호텔들이 많아졌고, 이 오래된 건축물은 점차 외빈을 접대하는 무대에서 퇴출당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버려지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곳은 아니었다. 1980년대말에 이 건물은 북경시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고, 1995년에는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고 정부에서 유지보수하기 시작한다.

2003년에 이르러, 리징한(李景漢)이라는 미국화교가 이곳을 눈여겨 보게 된다. 그는 변호사 겸 식당주인이었고, 두뇌가 영민했다. 전문23호라는 좋은 장소를 단순히 문물로 놔두는 것은 너무 아깝다고 여겼다. 이곳을 활발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The Legation Quater회사의 이름으로 이 건물을 임차한다. 그리고 2005년 개조를 마친다. 개조할 때 설계팀은 특히 조심했고, 건축물의 역사적인 맛을 남겨두면서,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유리벽, 중앙에어컨등.

개조후의 전문23호는 철저히 바뀌었다. 그 안에는 여러 개의 고급식당이 들어선다. 예를 들어, 프랑스식당, 이탈리아식당 Sadler, 스페인식당 Agua, 일본식당 Shiro Matsu, 그리고 파텍 필립(Patek Philippe)의 북경플래그십 스토어, 상무구락부, 천안시간당대예술센터등등. 2008년, 미쉘린 3성 요리사 Daniel Boulud가 이곳에 프랑스식당 Maison Boulud a Pekin을 연다. 그러나 아쉽게도 2013년에 문을 닫는다. 같은 해 파텍 필립의 플레그십스토어가 이곳에 들어온다. 나중에 2014년 파텍필립북경원저로 개명한다. 2010년대초, 운남식당 화마천당(花馬天堂)이 이곳에 개업한 후 한때 인기를 끈다.

예술센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꼭대기층에는 커피숍을 열고, 가운데 잔디밭에도 소극장, 강좌, 화가살롱등을 연다. 2015년, 천안시간당대예술센터가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 다만 전문23호의 인기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현재 이곳은 관광객들이 들르는 좋은 장소일 뿐아니라, 역사와 현대적인 분위기가 하나로 엮여 있어 아주 재미있는 곳이다.

전문23호는 위치가 좋다는 것이 가장 큰 자랑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는 그 배후의 역사이야기이다. 청나라말기의 미국공사관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굴욕사와 관련이 있다. 의화단의 난, <신축조약>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울해진다. 그러나 전문23호는 그것을 견뎌왔다. 신중국이후 이곳은 외교무대가 되었고, 미중관계의 관건적인 순간을 목격했다. 지금, 이곳은 문화예술센터로 바뀌었으며, 역사의 뿌리는 잊지 않으면서, 시대와 발걸음을 함께하고 있다.

다시 건축 자체를 보면, 신고전주의의 스타일인 동교민항에서 아주 두드러진다. 회색돌벽, 채색유리창, 나무바닥, 벽난로, 이런 오래된 물건들이 남아 있어 사람들이 한번 보면 바로 이곳에는 이야기가 있겠다고 여기게 된다. 개조할 때, 설계팀은 매우 신경을 써서, 함부로 뜯어고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감도 남아 있고, 현대적인 기능도 추가되었다. 이런 균형은 쉬운 일이 아니고, 칭찬할 만하다.

유명인물과의 연원을 얘기할 것도 없디, Conger는 이곳에서 의화단의 포위를 견뎌냈고, 주은래는 이곳에서 키신저와 미중관계의 서막을 여는 회담을 했고, 닉슨이 방중했을 때도 역시 일부 역할을 했다. 이런 일들은 전문23호에 적지 않은 광환을 더해주고, 북경성내에서 독특한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지금 전문23호는 이미 더 이상 차가운 공사관이나 호텔이 아니다. 그곳은 여러 얼굴을 가진 것같다. 한편으로 역사를 지키면서, 한편으로 현대생활을 끌어안고 있다. 그 안에 있는 파텍 필립 플래그십스토어, 고급식당은 적지 않은 부자와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예술센터와 잔디밭에서의 활동은 문화예술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2025년 2월, 중국문화예술발전촉진센터는 이곳에서 업무회의를 열었다. 이를 보면 문화권에서의 지위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곳은 현재 "고대상(高大上)"이 지나치다. 일반백성들이 지나가면서 외벽을 보고, 사진을 찍지만 그 안의 소비수준은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도 별로 뭐라고 할 것은 아니다. 어쨌든 천안문 건너편인데, 무슨 일을 하더라도 조금은 행세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문23호의 이야기는 동교민항이라는 이 위치와 떨어져 얘기할 수 없다. 동교민항의 역사는 더욱 길다. 원나라때는 강미항(江米巷)이라고 불렸고, 식량을 운송하는 세무소(稅務所)의 소재지였다. 상인들이 운집했고, 매우 북적였다. 명나라때는 외국사절을 접대하는 곳으로 바뀐다. 청나라때는 열강들에 의해 사관구로 된다. 1900년의 의화단의 난때는 이 골목이 전투의 최전선이었다. 길은 막히고, 총소리가 나서 혼란이 극치에 이르렀다. 민국시대에는 조용해지고, 신중국이 성립된 후에는 새로운 모습이 된다.

전문23호가 오늘날처럼 될 수 있었던 것은 동교민항의 기복과 관계가 없을 수 없다. 이 거리는 원나라의 양식도로, 명청시기의 외교창구, 그리고 근현대에는 사관구였고, 마지막으로 문화거리가 되었다. 그 자체는 중국역사의 축소판이다. 전문23호는 그중에서도 빛나는 하나의 장소이다.

전문23호의 이 건물은 청나라말기에서 오늘날까지, 적지 않은 비바람을 겪었다. 그곳은 천안문 건너편의 호화주택일 뿐아니라, 더더욱 중국근현대사의 목격자가 된다. 열강의 압박에서, 신중국의 굴기까지, 그리고 다시 현재의 문화부흥까지, 모두 조류를 따라갔다. 이 위치가 중요하지 않은가? 필자의 생각에 지리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아니라, 역사문화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다음에 천안문을 지나면 고개를 들어 건너편의 전문23호를 보라. 그 배후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그러면 약간은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곳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역사교과서이고, 과거를 잊지 말라고 일깨워주고, 또한 현재의 모습이 얼마나 어렵게 이루어진 것인지를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