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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거정)

장거정(張居正)과 이태후(李太后), 풍보(馮保)의 관계는......?

by 중은우시 2020. 11. 16.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고대인들은 재상의 역할을 8글자로 개괄했다: "좌이론도(坐而論道), 협리음양(協理陰陽)". 앉아서 도리를 얘기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자면 방침과 정책을 제정한다는 것이다; 음양을 협리한다는 것은 거시적으로 각 방면의 관계의 평형을 맞춘다는 것이다. 재상이 만일 지나치게 구체적인 사무에 집중하면 전체국면을 통할하는 능력을 약화된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재상은 사람을 잘 써야 하고, 일을 잘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능력있는 인물에게 일처리를 하게 하고, 자신은 일처리 잘하는 사람을 관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양호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장거정의 용인술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주로 그가 어떻게 개혁의 엘리트집단을 양성하여 강력한 지도계층을 형성했는지 봐야 한다. 다만, 개혁을 성공하려면, 엘리트집단만으로는 부족하다. 어쨌든 장거정은 황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조직한 엘리트집단을 장악할 수 있다. 다만 그는 동시에 반드시 신중하게 황실과의 관계를 처리해야 한다. 명사(明史) 학계에는 이런 견해가 있다. 만력신정(萬曆新政)의 성공은 3명에 달려 있었다: 한명은 장거정이고, 한명은 황제의 생모인 이태후였으며, 또 다른 한명은 대태감 풍보였다. 이 세 사람은 권력의 철삼각(鐵三角)이라 할 만하다.

 

이 세명을 보면, 이태후는 황권을 대표한다. 왜냐하면 당시 황제가 어려서, 건청궁에 들어갈 때 이태후가 그의 후견인이었다. 동시에 들어간다. 당시, 황상의 거의 모든 말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해야 나왔다. 장거정은 상위(相位)를 대표한다. 조정문관계통의 1인자이다. 회사의 지배구조로 말하자면 이태후는 회장의 직위이고, 장거정은 사장의 권력을 가졌다. 이 두 사람간의 교량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사례감장인태감 풍보이다. 

 

이들 두 사람과 관계를 잘 유지하고, 컨센서스를 유지하는 것은 장거정에 있어서 아주 곤란한 일이었다. 먼저 풍보를 얘기해보자. 그는 "소면호(笑面虎)"라는 별명이 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살기를 품고 있다. 그는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갚는다. 그리고 재물을 탐한다. 다만 풍보에게는 장점도 있었다. 내정(內廷)의 장고(掌故)을 아주 잘 알았고, 전체 공문제도도 손바닥보듯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하를 잘 통제하고 대국을 살필 줄 알았다. 그가 동창(東廠)을 장악하고 있을 때, 왕대신안을 이용하여 고공(高拱)에 독수를 쓴 것을 제외하면 거의 직권을 남용하지도 않았고, 억울한 사건을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풍보의 성격은 아주 복잡하다. 만일 장거정이 서생기(書生氣) 충만한 인물이었다면, 해서(海瑞)처럼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자였다면 근본적으로 풍보와 잘 지낼 수 없다. 일단 풍보에게 밉보이게 되면, 태후, 황제와 연결하는 끈을 잃게 되는 것이다.

 

장거정은 그 이해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풍보와 타협했고, 그가 뇌물을 수수하는 것에 대하여 한눈은 뜨고 한눈은 감으면서 모른체 해주었다. 이점으로 인하여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다만 그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단순히 평판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면, 풍보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지 않고 그와의 관계에 선을 그을 수도 있다. 다만 좋은 관료가 되려고 했다면, 조정과 백성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했다면, 그는 그렇게 해서는 안되었다. 그는 반드시 위곡구전(委曲求全)해야 했다.

 

장거정은 잘 알고 있었다. 풍보와 같은 사람과 교류하려면 유리유절(有理有節)해야할 뿐아니라, 유통유변(有通有變)해야 했다.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동류불합오(同流不合汚)"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관리가 풍보에게 뇌물을 주고, 양회염운사(兩淮鹽運使)라는 요직을 얻으려 했다. 풍보는 장거정에게 그를 추천한다. 장거정은 그가 탐관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풍보가 그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응락한다. 이에 대하여 그의 엘리트집단의 관료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누군가 그에게 묻는다: "부패를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부패관리를 중용하시는 겁니까?" 장거정이 한마디 한다: "만일 내가 탐관오리를 기용하면, 그것으로 인해 돌아오는 댓가는 더 많은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기용해야겠는가 말아야 겠는가? 필요할 때는 궁부(宮府)간에 거래를 해야 한다."

 

궁(宮)은 궁정, 대내이다. 부(府)는 바로 내각이다. 내각은 명나라때 정부(政府)라고 불렀다. 전체 명나라때, 궁부간의 모순은 비교적 두드러졌다. 그리하여 국가와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겪는다. 심지어 혼란이 초래되기도 했다. 소위 고위층의 정치는 황권과 상권의 다툼이 있으면서, 외상(外相)과 내상(內相)의 다툼도 있었다.

 

장거정이 풍보를 회유하면서 일률적으로 타협만 하지는 않았다. 어떤 때는 견제도 하고 제약도 했다. 대내의 재정은 원래 호도장(糊塗賬)이다. 24감국(監局)은 하나같이 돈을 뜯어낼 통로가 있었다. 그리고 공적재산을 집어삼키기도 쉬웠다. 환관들은 재물을 지키면서 스스로 훔쳤다. 설사 누군가 고발하더라도, 외정의 사법기관이 간섭할 권한이 없었다. 태감들의 자체기구인 내관감(內官監) 혹은 동창에서 처리해야 했다. 다만 이들 기구는 원래 공정하게 법집행을 하는 기관이 아니다. 그러므로, 태감들의 특권은 왕왕 외정의 관리들보다 컸다.

 

경성의 각 대형 사묘도관(寺廟道觀)의 대시주(大施主)는 일반적으로 모두 궁안의 주의태감(朱衣太監)들이다. 소위 '주의'라는 것은 감국의 1급장인태감이 입는 옷의 품급이다. 당시 경성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자랑했다: "나는 궁안에 아는 사람이 있다." 이는 그가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장거정은 취임후, 대내의 여러 불법행위를 징치하고자 한다. 특히 재정의 헛점에 대하여. 다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을 잘못 처리하면, 오히려 돌맹이를 들어 자신의 발등을 찍는 격이라는 것을. 그리고 풍보의 협조가 없이는 그가 징치하고자 해도 징치할 수 없다는 것을.

 

장거정은 그리하여 여러번 태후와 황상의 앞에서 풍보를 칭찬한다. 그가 얼마나 청렴하고 공적인 일을 잘 처리하는지. 그러고 난 후에 예부의 급사중에게 내정의 재정문제에 대한 글을 황상에게 올리게 한다. 그러면서 관리상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내정의 각종 물품의 잭를 조사하여 하나하나 새로 등기하자고 한다. 태감들이 '빌려'간 것은 모조리 기한을 정해 반환하도록 한다. 황상은 이 상소문을 내각으로 보내 장거정에게 처리하게 한다. 장거정은 처리하기 전에, 풍보를 찾아서 상의한다. 풍보는 비록 외관이 내정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지만, 장거정의 태도가 우호적이니, 내정의 재무를 정리하는데 동의한다.

 

황상의 지시가 있은 후, 내정의 재무에 대수술을 벌인다. 되찾아온 자기만 1만여건에 이른다. 이번 정리를 통해, 내정의 씀씀이도 적지 않게 줄어든다. 원래, 내정의 재정과 국가의 재정은 비록 명목상 분리되어 있지만, 황상은 자주 명을 내려 호부에서 돈을 가져갔다. 장거정이 취임한 후, 확실히 분리하도록 견지한다. 내정의 비용지출, 황상이 비빈을 위해 만드는 악세사리나 궁녀에게 내리는 하사품등은 모조리 내정의 재정에서 지급하게 한다. 국고의 태창은은 관리의 봉록, 수리의 건설, 군비의 지출등등에 사용한다.

 

내정의 돈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나는 황상의 가진 장전(莊田)의 수입이다. 둘은 전국광산의 채광수입이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모든 광산수입을 황실에 넣는다면 그 수입은 엄청날 것이다. 다만 명나라때, 광산은 모두 규모가 적었다. 그러므로 수입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국고의 태창은 수입은 주로 민간의 각종 부세에서 나왔다. 풍보의 협조하에, 장거정은 황실과 외정의 재정상의 분리를 완성한다. 이는 대단한 발전이다. 실제로는 황실의 권리를 제한한 것이다. 가천하를 국천하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큰 개혁조치가 실현될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해 보자면 풍보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워준 것이 뭐 그다지 중요하다고 할 수도 없다.

 

장거정의 또 다른 난점은 이태후와의 관계를 처리하는 것이다. 이태후는 기실 정치에는 욕심이 없었다. 단지 역사가 그녀에게 그런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그녀는 역사에 순응해서 정확한 선택을 했다. 대량의 사료를 보면, 그녀가 장거정을 지지한 것에는 사적인 요소가 없었다. 장거정은 그녀의 특징을 잘 파악했고, 명석한 결정을 내린다. 예를 들어, 태후의 봉호(封號)문제에서, 장거정은 약간의 혁신을 취한다. 원래 새 황제가 등극하면, 죽은 황제의 황후는 배분이 올라가서 황태후가 된다. 이 봉호에는 법도가 있다. 선황의 황후는 일률적으로 황태후에 봉한다. 그리고 선황이 비빈중 아들이 황위를 승계하게된 비빈도 황태후에 봉해질 수 있다. 다만 황후에서 오른 황태후와는 구별이 된다. 즉 황후에서 황태후에 오르면'황태후' 앞에 두 글자를 추가한다. 그러나 황제의 생모에게는 앞에 아무 글자도 붙이지 않고 '황태후'라고만 불린다.

 

풍보는 이 일을 가지고 장거정과 상의한다. 황상의 주요 후견인은 그의 생모인 이귀비(李貴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그녀와 진태후(陳太后)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예부에 내려보내 토론할 때, 예부의 관리들은 하지 않으려 한다. 조상의 봉호제도에 그런 선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거정이 보기에 이는 아주 작은 일이다. 아무런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 그저 약간의 명예를 더할 뿐이다. 장거정은 예부상서 여조양(呂調陽)에게 지시하여, 반드시 이 일을 잘 처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직접적인 간여하에, 진황후에게는 "인성황태후(仁聖皇太后)"라는 봉호를 올리고, 이태후에게는 "자성황태후(慈聖皇太后)"라는 봉호를 올린다. 봉호가 반포되는 날, 이태후는 자신의 신분이 진황후와 동등하게 된 것을 보고 아주 기뻐한다. 장거정이 일처리를 잘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장거정에 대한 신뢰는 더욱 커진다. 이는 장거정이 그녀에게 해준 첫번째 일이고, 그녀는 아주 만족해 한다.

 

두번째 일은 이태후가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 경서를 인쇄하고, 불상을 만들고, 돈을 내서 사묘를 짓는다. 자주 이런 비용을 썼다. 그녀는 보시를 아주 많이 했다. 개인돈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풍보는 장거정에게 와서 태창은을 그녀에게 주어서 불사에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장거정은 그렇게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아이디어를 하나 낸다. 보화점(寶和店)을 이태후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이 보화점은 황실재산이다. 황실의 조달센터이다. 베이징총점외에 전국의 여러 도시에 분점이 있다. 규모가 적지 않은 상업집단이다. 보화점이 이태후에게 넘어가는 것은 정부에게 아무런 손실이 없다. 단지 황제의 주머니에 있던 돈을 이태후의 주머니로 옮겨준 것일 뿐이다. 이렇게 하여 이태후의 불교관련 비용을 일거에 영원히 해결해주게 된다. 그러면서 장거정은 자신이 만든 재정개혁의 원칙도 어기지 않았다. 이것이 진정한 윈윈이다. 이태후는 장거정이 그녀를 생각해준다고 여겼고, 그를 더욱 신임하게 된다.

 

셋째 일은 이태후가 오대산에 절을 하나 짓는데, 완공식때 찬송하는 글을 장거정이 직접 써준다. 수보(首輔)가 직접 글을 써서 이태후의 공덕을 칭송해준다. 그녀는 자신의 체면이 살았다고 여긴다. 이처럼 국가재정도 파괴하지 않고, 체제를 흔들지도 않으면서, 국가제도와 조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일을 장거정은 아주 빠르고 적확하게 처리해 주었다.

 

풍보는 창주(滄州)에서 풍수길지를 하나 고른다. 자신이 죽은 후에 묻힐 장소로 정하고자 했다. 공사를 시작할 때, 장거정은 백관을 이끌고 풍보에게 축하를 하고 그에게 글을 써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표시한다. 장거정과 같은 고관이 이렇게까지 이태후와 풍보에게 아부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게 아부하지 않으면 정말 안되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한명이 황제를 대표하고, 한명이 내정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모두 밉보여서는 안되는 인물들이다. 장거정은 자신의 도덕적인 청고(淸高)를 희생해서, 그들과 협력하는 것을 선택한다. 심지어 계속 그들을 칭찬하고, 그들을 위하여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어 그들이 만력신정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만든다. 이는 소아를 희생하여 대아를 성취한 것이다. 천하를 위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식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을 희생하는 것일 것이다. 다만 장거정은 이를 해냈다. 여기에는 자신의 몸을 호랑이 밥으로 희생하는 용기가 필요하면서 또한 일종의 '도(道)'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이런 파악은 불가에서 말하는'계(戒), 정(定), 혜(慧)' 삼자간의 통융(通融)이다. 후세에서 장거정에 대하여 가장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장거정과 이태후, 풍보의 관계일 것이다. 다만 당시의 상황을 보면 장거정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그의 부국강병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그가 이태후, 풍보와 협력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일을 제대로 하겠다는 관념으로 보고, 도덕의 관념으로 형량하지 않으면, 이 세 사람의 협력은 아주 성공적이다. 그들의 협력은 만력초기의 중흥을 이끌어 냈다. 세 사람의 공정(公情)과 사의(私誼)는 모두 심후했다. 장거정이 사망한 후, 풍보는 그를 아주 그리워했다. 그리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장거정이 남긴 개혁인재를 보호했다. 장거정의 죽음으로 그리고 만력제가 장거정을 잔혹하게 청산함으로 인해 이태후는 만념구회(萬念俱灰)하며, 그후로 정치를 완전히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