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종국(曹宗國)
장거정에 대한 평가는 필자의 생각으로 청나라때의 기윤(紀昀, 기효람)이 <사고전서.제요>에 말한 것이 가장 공정한 것같다. 거기에 장거정은 "진작유위(振作有爲)의 공과 위복자천(威福自擅)의 죄는 모두 서로를 덮을 수가 없다." 어떤 사론과 문학작품에서는 그의 '진작유위'만을 두드러지게 보고, 그의 '위복자선'은 못본척하거나 덮어주며 일률적으로 그를 개혁가로 칭송하는데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
장거정은 확실히 '진작유위'했다. 명나라중후기의 정치가, 개혁가이다. 그는 내각수보로 10년간 있으면서, 일련의 개혁조치를 실행한다. 재정적으로 전답을 측량하여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추진하여 부, 역을 총괄하여 모두 은으로 납부하게 했다. 태창의 곡식은 10년을 쓸 정도였고, 주시에 쌓인 금은 사백여만에 이르렀다. 군사적으로도 척계광(戚繼光), 이성량(李成梁)등 명장을 기용하여 북방을 지켰고, 능운익(凌雲翼), 은정무(殷正茂)을 기용하여 서남의 반란을 평정한다. 관료들에 대하여도 '고성법(考成法)'을 실행하여 각급 관리를 평가했다. 이렇게 하여, '만력신정(萬曆新政)'을 개창한다.
그러나, 장거정의 '위복자천'도 아주 심했다. 그가 정무를 볼 때 비록 명의상 황제는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대권을 장악하여 황제도 아예 눈아래 두지 않았다. 그저 황제를 어린아이로 취급하고, 만천하에 위세를 드러내고, 사치의 극을 달리며 인간으로서의 부귀영화를 누릴대로 누렸다.
장거정은 정치적으로 광망자대하고 오만참월(傲慢僭越)했다. 그는 봉건시대에 보기 드문 권신이다. 당시 누군가 황금으로 대련을 만들었는데, "일월위명(日月爲明), 만국앙대명천자(萬國仰大明天子); 구산위악(丘山爲岳), 사방송태악상공(四方頌太岳相公)"이라고 하여, 태악상공(태악은 장거정이 호이다)과 대명천자를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장거정은 '참월'에도 불구하고 태연자약했다. <만력야획편>>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강릉(장거정을 가리킴)은 천하를 자신의 임무라고 여겼고, 손님들 중에서 그에게 아부하여 상(相)이라 하니, 그는 나는 상(相)이 아니라 섭(攝)이다라고 했다." '섭'은 장거정에게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건 너무 광망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심덕부(沈德符)도 이렇게 말한다: '섭'이라는 말이 강릉(장거정)에게는 틀린 말이 확실히 아니다. 그러나 천구에 오직 희단(姬旦, 주공), 신망(新莽, 왕망) 두 사람인데, 이제 세 명이 되는 것인가? 경진의 봄에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올린 글에서는 '걸휴(乞休)'라 하지 않고, '배수계수귀정(拜手稽首歸政)'이라고 했다. 황상은 바로 주성왕이 된 것이다.
그가 북경에서 고향 강릉으로 부친의 영구를 안장하러 돌아갈 때, 한 관리가 그에게 아주 호화스러운 가마를 선물한다. 앞에는 거실이 있고, 뒤에는 침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로는 복도가 있다. '1실1청'의 움직이는 집인 셈이다. 수행하는 시위들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조총수들이다. 이들은 총병 척계광이 보내준 것이다. 조총은 당시 아주 신기한 화기였다." "장례를 치르러 돌아가는 길에 오보에 정(井)을 하나씩 파고, 십보에 려(廬) 하나를 만들었다." "행렬이 지나가는 곳에 지방관이 모두 교외까지 나와서 영접했을 뿐아니라, 현지의 번왕도 전통을 깨고 집밖으로 나와서 맞이하고 보내며, 수보 장거정과 빈주지례(賓主之禮)를 행했다." <옥대총어>에는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장거정이 성지를 받들어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돌아갈 때, 그거 지나가는 번, 현, 수, 순, 아중 무릎을 꿇는자가 열에 대여섯이었다. 황제의 출행도 이 정도의 규모는 아니다. 장거정은 그러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장거정은 정치적으로 광망하기 그지없었을 뿐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사치의 극을 달린다. 명나라때 문인인 초고(焦叩)는 <옥당총화>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가 성지를 받들어 장례를 치르러 고향으로 돌아갈 때, 연도의 주현에서는 그의 먹고 마시는 것을 어떻게 잘 대접할지를 가지고 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고민했다. "처음에 지나가는 주읍에서 음식을 올리는데 물에서 나는 것과 육지에서 나는 것을 합쳐서 백가지가 넘었다. 그러나 장거정은 젓가락을 가져가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전보(錢普)라는 무석 사람이 오(吳)의 요리를 할 줄 알았는데, 장거정이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내가 이제 겨우 한번 배불리 먹었다." 이 말을 듣고, 오의 요리를 잘하는 요리사들은 모조리 불려갔고, 모두 보수를 넉넉하게 받았다."
장거정은 본인이 향락을 누렸을 뿐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사치의 극을 달린다. 장거정이 이처럼 '위복자천'할 수 있었던 것은 객관적으로 당연히 당시 명신종 주익균의 나이가 아직 어려서 모든 군정대권을 장거정이 주재하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개인적인 품성과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봉건사회의 군신관념이 용납하지 못할 뿐아니라, 현대정치의 각도에서 보더라도 욕먹을 짓이다. 그러므로, 장거정에 대한 평가에서 공과 죄를 분명히 갈라야 한다. 그의 진작유위는 당연히 긍정해야 하지만, 그의 정치적 품성과 인격은 당연히 욕을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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