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거정)

장거정(張居正)과 이태후(李太后)는 무슨 관계였을까?

by 중은우시 2018. 3. 1.

글: 군령여산(軍令如山)


민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장거정과 이태후에 관한 것인데, 장거정이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후, 과거합격자중 꼴찌의 이름이 애자수(艾自修)인 것을 보고는 이런 대련을 만들어 조롱했다고 한다: "애자수(艾自修, 자수물수(自修勿修), 백면서생배호방(白面書生背虎榜)" 과거에 1등, 2등, 3등으로 합격하면 '장원(狀元)' '방안(榜眼)' '탐화(探花)'라고 부르는데, 용호방(龍虎榜)이라고도 부른다. 방의 꼴지를 '배호방'이라고 부른다. 애자수는 이에 분노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중에 장거정은 수보(首輔)가 되었는데, 애자수는 장거정이 이태후와 관계가 깊은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감을 얻어 장거정에 반격하는 하련을 만든다: "장거정(張居正), 거정물정(居正勿正), 흑심재상와용상(黑心宰相臥龍床)" 이 대련은 대장이 공정하고 교묘하여 시로 멋진 대련이다. 그래서 <중국고금교대묘련대관>에 수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순전히 날조한 것이다. 애자수는 만력28년에 진사가 되었고, 명나라후기의 저명한 학자이다. 이때는 장거정이 죽은지 이미 여러해가 지났다. 그래서 둘은 얘기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계속 민간에 전해져 내려왔다. 이를 보면, 장거정과 이태후간의 '애매'한 관계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바람이 없으면 파도가 일지 않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둘 사이는 도대체 어떻게 '애매'한 관계였을까? 만력신정(萬歷新政)이 순조롭게 진행되는데에는주로 세 사람의 역할이 컸다. 한 명은 수보 장거정이고, 다른 한명은 사례감장인 풍보이고, 다른 한명이 바로 자성황태후 이씨이다. 장거정은 신정의 총설계사이고, 만력제 초기의 전면계혁의 기획과 집행을 담당한다. 풍보는 외정과 내궁의 주요 연락인이다. 정령이 창통하게 했다. 이태후는 만력제의 생모로서, 황제에게 개혁을 진행하도록 가르치고, 장거정의 말은 모두 따랐다. 이 '삼두마차'가 잘 협력하면서, 십년동안 "궁중부중(宮中府中), 구위일체(俱爲一體)"의 좋은 국면이 형성된다. 그리하여 황권과 상권의 상호견제가 없어 장거정은 개혁의 이상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장기간의 정치연맹 과정에서 장거정과 이태후간에 감정이 생겼을까? 필자의 생각에 감정은 있었다. 다만 선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첫째, 두 사람은 분명 공동언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황제를 가르쳐 개혁을 진행하게 하는 것이다. 장거저은 개혁의 주도자이고, 이태후는 출신이 빈한하여 백성의 고통을 잘 알았으며 장거정의 개혁이 백성들에게 이로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장거정의 말이라면 다 따랐다. 심지어 그녀는 만력제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서른살 전에는 모든 일을 장선생이 하자는대로 해라!" 즉,만력제는 서른살이 되기 전에는 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태후의 장거정에 대한 신뢰의 의존을 표시하는 것이지만, 점점 커가고 있는 만력제에게는 중대한 타격이다. 그래서 장거정은 만력제 친정의 거대한 장애물이 되었다.


둘째, 두 사람은 함께 정치풍우를 겪었다. 장거정은 융경제가 황제에 오르기 전 유왕부(裕王府)에 있을 때부터 구신이다. 이태후는 융경제가 유왕부에 있을 때부터 사랑하는 비였다. 두 사람은 일찌감치 알았고, 개인적인 교분이 있다.융경제가 즉위한 후, 이씨는 황귀비에 책봉되고, 장거정은 내각차보(內閣次輔)가 된다. 융경제가 붕어하면서, 9살이 만력제가 등극한다. 수보 고공(高拱)은 비록 개혁적인 인물이지만 사람됨이 패도적이었고, 일처리가 급공근리(急功近利)했다. 동시에 9살의 황제와 당시의 이귀비(나중에 자성황태후에 봉해짐)를 무시했다. 심지어, "9살짜리 어린아이가 어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라는 말까지 한다. 이는 이귀비와 만력제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한다. 사례감장인태감 풍보의 협력하에 이귀비, 풍보, 장거정은 권력탈취음모를 꾸미고, 결국 고공을 사직시키고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장거정은 그제서야 수보의 자리에 앉는다. 그후 10년동안 두 사람은 서로 도와주고 서로 의지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추론했다. 한 사람은 28살짜리 젊은 과부로 마른장작같고, 한 사람은 장년의 대장부로 맹렬한 불과 같은데, 두 사람이 같이 만나면 사단이 일어나지 않겠느냐고. 그게 가능한가? 융경제는 아주 호색하는 황제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복상사했다. 이를 보면 이태후는 분명 자태가 뛰어났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후궁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거정도 용모가 뛰어났다. <명사>에도 기록이 있다. 이렇게 보면 장거정과 이태후는 주련벽합(珠聯璧合), 천생일대(天生一對)이다.


이런 추론은 나름대로 이치에 맞고, 사람들의 정리에도 부합한다. 그러나 빠트린 것이 있다. 장거정과 이태후는 모두 정치인이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은 개혁변법에 유리한가를 기준으로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 장거정과 같은 대정치가와 이태후와 같이 정치적 두뇌를 가진 여인은 모두 조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마도 반대파는 이를 근거로 개혁변법을 공격할 것이고, 만력신정는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만력제의 황제 자리도 지켜낼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두 사람은 천하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일거일동은 개혁변법의 성패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조심했을 것이고, 잘못된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다른 사람이라면 확실히 가능성이 있다. 다만 장거정과 이태후라면 가능성이 크지 않다. 게다가 명나라 황궁은 경계가 삼엄하다. 두 사람이 이런 도덕적인 선을 돌파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정치가도 사람이다. 그리고 이렇게 재상화 태후가 같이 어린 황제를 보좌하다가 스캔들이 난 것은 장거정-이태후뿐만이 아니다. 도르곤-효장황태후도 있다. 필자는 이런 추론이 한 가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본다. 도르곤과 효장황태후는 만주족, 몽골족이다. 시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것도 가능한 풍습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르곤은 죽은 후, 순치제에 의하여 잔혹하게 청산당한다. 이를 보면, 재상과 태후가 어린 황제를 보좌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최후가 좋지 않은 법이다.


이에 기하여 장거정과 이태후간의 감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혁변법전선에서의 동지의 정, 합작의 정일 것이다. 그들은 상호신뢰하고, 상호존중했다. 서로 아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선을 넘을 수 없었다. 개혁변법의 성공을 위하여 그들은 개혁변법에 불리한 여하한 일이나 남에게 약점으로 잡힐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만력10년, 장거정이 사망한다. 만력제는 장거정에 대하여 미친듯한 청산을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은 깨닫는다. 이는 개혁반대파의 반격이라고. 기실 더욱 중요한 것은 만력제의 개인적인 뜻이다. 만력제의 의지가 없었다면, 반대파가 청산을 전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력제는 그의 스승이자 재상에게 어떤 태도를 지녔을까? 장거정의 행위는 기본적으로 황제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재상이 아니라, 섭정이다.(我非相, 乃攝也)" 공고개주(功高蓋主)는 항상 화근이 된다. 장거정의 권세는 만력제로 하여금 그의 황제로서의 존엄에 대한 엄중한 도전으로 여기게 만든다. 장거정을 청산한 것은 첫째, 만력제가 제왕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말할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장거정과 이태후의 특수한 관계이다. 이는 만력제로 하여금 더욱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태후가 장거정을 신임하면 할수록, 의지하면 할수록, 존경하면 할수록, 만력제는 더욱 반감을 갖는다. 그가 계속 자라면서 반감은 점차 원한으로 변한다. 그래서 장거정을 청산할 때, 만력제는 그렇게 잔혹하고 변태적이었던 것이다. 장거정 일가는 굶어죽은 자가 십여명이고, 장남은 자살했다. 이런 것들은 반대파의 생각을 벗어났다. 어쨌든 그들은 10년간 모범적인 군신이 아니었던가. 가련하게도 일대명상이 이런 최후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