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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손중산)

손중산의 "도(道)"와 "술(術)"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유우명(遊宇明)

 

손중산은 위대한 혁명선구자이다. 동시에 그는 구체적인 개인이기도 하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손중산 선생의 '술'을 보면 조급하게 혁명을 성공시키려는 급박한 심정이 엿보인다; 그러나 정치가로서의 책략에 대하여는 하나하나의 건을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중국현대사상, 손중산은 의심의 여지없이 위대한 인물이다. 그의 위대함은 비범한 영향력에 있다. 중국을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으로 만드는 것을 추진했고, 혁명이라는 목표를 하루빨리 실현시키기 위하여 한때 앞장서서 총통의 자리를 양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인물로서 손중산에게는 여러가지 한계도 보인다. 예를 들어, 그는 자주 혁명에 대한 갈망으로 절차적정의, 국가의 장기적 이익을 희생시켰다. 바꾸어 말하면, 손중산의 일부 구체적인 행위에서는 "도"(최종목표)만 정당하며 되었다. "술"(과정)은 정당하든 말든 특별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1922년 6월 16일, 건국이념의 의견차이로, 진형명의 수하인 월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월수산의 아래에 있는 총통부를 포위하고 손중산의 하야를 요구한다. 당시, 손중산은 사전에 월군 제3사단 사단장 위방평의 통보를 받아 이미 주소를 떠나서, 황포구에서 영풍함에 올랐다. 그러나 총통부내의 수비대가 무기를 내놓지 않자, 쌍방간에 격전이 벌어지고, 오후에 월군이 총통부를 점령한다. 손중산은 진형명의 행위에 아주 화가 나서, 함대에게 명령을 내려 광주성을 향헤 함포를 발사하게 한다. 다음 날, 다시 한번 함포를 마구 발사한다. 두번의 함포사격으로 광주시민 백명이상이 사망한다.

 

손중산이 한 또 하나의 사건은 더욱 선을 넘었다. 1913년, 2차혁명이 실패한 후, 손중산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일본에 망명한다. 그는 중화혁명당은 재조직하여, 다시 한번 무장투쟁을 벌일 준비를 한다. 혁명에는 돈이 필요하다. 자금마련을 위하여 손중산은 일본인들과 자금조달을 위해 회의를 여러번 가진다. 적시에 일본에서 돈을 조달하기 위하여, 손중산의 몇 가지 약속은 국가의 주권을 해하는 정도에 이른다. 1914년 5월 11일, 손중산이 일본수상 대외중신(大隗重信)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일본이 중국의 혁명을 도와주면, 중국은 "전국시장을 개방하고, 일본공상에 혜택을 주겠다"고 말한다. 같은 해 8월 24일, 손중산은 견양의(犬養毅)에게 자신은 현재 거병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때 만일 중국내지에 동란이 발생하면, 반드시 일본외교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일본정부는 중국혁명을 지원해야 한다. 이 점을 각하께서 살펴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군비조달상황을 얘기하면서 손중산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이번에 소요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설사 여하한 부가조건이 붙더라도, 각하가 일본에서 자금조달해주는데 의지하겠다." 1915년말, 손중산은 비밀리에 일본육군참모총장 상원용작(上原勇作)을 만난다. 그는 상원용작과의 담화에서 일본이 중국혁명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내놓은 조건은 피끓는 중국인으로서는 경악할 내용이다. 손중산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구는 매년 증가하고, 동북삼성은 광활한 평야가 있어 개척하기 좋다. 일본은 원래 자원이 부족하지만, 만주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자원이 풍부하다. 일본이 이 땅에 눈독을 들이는 것이 당연한 국책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 중화혁명당원은 충분히 양해한다. 그래서 만주를 일본의 특수지구로 하여, 일본이민과 개척의 우선권을 인정하겠다." "만주뿐아니라, 중국본토의 개발도 일본의 공업, 기술, 금융역량에 의존하겠다." "일본이 정말 상호부조의 정신으로 성심성의껏 중국의 혁명통일을 원조하고, 상호제휴하여, 아시아의 독립과 부흥을 위하여 적극 협력한다면, 중일양국의 국경을 없애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당연히, 손중산은 동시에 이렇게 성명하기는 했다: "동삼성은 중국영토이다. 주권은 여전히 중국에 속한다." 다만, 동삼성에서 일본에 이렇게 많은 특권을 부여하면, 중국이 주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겠는가? 비록 원세개 사후인 1917년 9월 15일 손중산이 일본사회활동가 하상청(河上淸)과의 담화에서 여전히 표시한다. 일본이 "무기, 군수물자 및 대량의 대출"을 해주기 희망한다고. 그는 특별히 설명을 덧붙였다: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기쁘게 만주를 일본인이 관리하도록 넘기겠다고. 1918년 11월 16일, 손중산은 일본인 송영안좌위문(松永安左衛門)과 회견하면서, 다시 한번 "영유만몽(領有滿蒙)"을 조건으로 일본의 도움을 바란다고 말한다. 그는 말했다: "현재 중국의 남북대립은 일본이 조장한 것이다. 일본이 만일 북방파를 원조하는 정책을 바꾼다면, 북방파는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일본이 남방파를 지원한다면, 일본에게 '만몽'의 영유를 인정하겠다."

 

일부러 덮어주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쉽게 손중산사상에서의 중대한 결함을 발견할 수있다. 진형명이 정변을 일으켜, 손중산의 하야을 핍박한 것은 당연히 잘못한 일이다. 손중산이 이에 대하여 분노한 것은 당연히 히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원수가 아무리 불만이더라도, 함대로 하여금 자신의 인민들에게 함부로 포를 쏘게 명령해서는 안되지 않는가. 아마도 그가 계속 혁명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표시하려고 한 것일지는 몰라도, 백여명의 무고한 인민은 이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다. 이런 방식을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손중산이 일본에서 자금을 빌린 수단도 유감스럽다. 한 지도자가 혁명에 종사하려고 하면서 외국에서 돈을 빌리는 것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이율을 약간 높게 약속하더라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국가영토주권을 가지고 거래한다는 것은 터무니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