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옥미수(玉米穗)
듣기로 일본수상을 지낸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는 손중산에게 가장 좋아하는 세 가지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손중산은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는 혁명, 둘째는 여자, 셋째는 독서. 손중산은 과연 불세출의 위인이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고싶은 말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여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중 하나라고.
손중산은 여자들과 연분이 많았다. 그는 일생동안 혁명사업에 바빴지만 주변에는 항상 여인이 있었다. 본부인 노모정(盧慕貞)은 그와의 사이에 아들딸을 낳아서 길렀다. 그녀는 전통적인 구식여인이었으므로, 그를 따라 동분서주하며 '천하위공(天下爲公)'의 혁명사업을 할 수는 없었다. 노모정은 비록 집밖으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대의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손중산에게 뜻이 맞는 혁명반려를 찾으라고 권했고, 나중에 손중산은 전후로 진수분(陳粹芬)과 송경령(宋慶齡)이라는 두 혁명반려를 만난다. 송경령이전에 기실 손중산은 그녀의 언니인 송애령(宋靄齡)을 좋아했고, 그녀에게 청혼한 바 있다(이 이야기는 손중산, 송미령, 장개석, 장학량과 관계가 가까운 호주인 윌리엄 헨리 도날드가 회고록에 상세히 기록한 바 있다.) 그러나 송씨자매의 부친인 찰리송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나중에 손중산은 다시 그녀의 여동생 송경령을 사랑하게 되어, 찰리송은 대노하고, 그와 절교하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송경령이 손중산의 부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꺽지 못했다. 나중에 손중산은 본부인 노모정과 혼약을 해제하고, 송경령이 결국 '국모'가 된다.
위에서 언급한 몇 사람 외에 손중산이 일본에 있을 때에 처와 첩을 둔 바 있다. 첩의 이름은 아사가 하루(淺田春)이다. 일설에 따르면 당초 일본경찰측에서 손중산의 주변에 심어두고 손중산을 감시하게 한 여인이라고 한다. 다만 또 다른 일본학자는 아사다 하루가 손중산의 통역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손중산을 도와 혁명동지들과 연락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아사다 하루는 아주 젊었고, 손중산과 같이 있을 때 겨우 15살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나중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손중산과의 사이에는 자식을 두지 못했다.
비교적 처참했던 것은 손중산의 일본인처 오쓰키 가오루(大月薰)였다. 오쓰키 가오루가 손중산을 만났을 때는 겨우 11살의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손중산은 한눈에 그녀에게 반한다. 그때 손중산은 요코하마 야마시타쵸의 어느 건물 1층에 거주했는데, 오쓰키 가오루의 일가는 같은 건물의 2층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오쓰키 가오루가 부주의하여 꽃병을 하나 깨트리게 되고, 꽃병에 들어있던 물이 1층의 손중산의 방으로 흘러들어간다. 오쓰키 가오루의 회고에 따르면, 손중산은 당시 친구들과 지도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돌연 집안에서 '비가 내렸다.' 그래서 화가 나있었다. 오쓰키 가오루는 바로 1층으로 내려가서 사과를 했는데, 손중산은 이 귀여운 여자아이를 보고는 화가 풀리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오쓰키 가오루에게 사탕을 하나 주었다.
오쓰키 가오루가 14살이 되었을 때 아사다 하루가 세상을 떠난다. 손중산은 친구인 온병신(溫炳臣)을 보내 오쓰키 가오루의 부친에게 청혼한다. 오쓰키 가오루를 처로 맞이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오쓰키 가오루의 부친은 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대며 완곡하게 거절한다. 그래도 손중산은 포기하지 않게 계속 요구했고, 나중에 두 사람은 1903년 결혼한다.
1906년 오쓰키 가오루는 그녀와 손중산 사이에 딸을 낳게 된다. 처음에는 이름을 후미코(文子)라고 지었으나 나중에 후미코(富美子)로 개명한다. '文'과 '富美'의 일본어발음은 모두 '후미'이다. 완곡하게 손중산의 이름인 문(文)과의 관계를 표시한 것이다. 손중산이 오쓰키 가오루를 처로 취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분서주하며 혁명사업에 바빴다. 오쓰키 가오루와 만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비록 몇번 오쓰키 가오루에게 돈을 부쳐주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그래서 그녀가 후미코를 낳았다는 것조차 손중산이 몰랐을 수 있다. 그리고 그후에 다시는 이 일본인처를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딸인 후미코도 한번도 만나지 못한다.
오쓰키 가오루는 남편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중에 극장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면서 약간의 수입을 얻었다. 그녀가 낳은 딸 후미코는 먼저 자신의 부친의 작은 딸로 호적에 등록한다. 그래서 이들 모녀는 호적상으로는 자매이다. 나중에 후미코가 5살이 되었을 때 요코하마의 한 자녀를 두지 못한 부부의 양녀로 보낸다. 오쓰키 가오루는 개가한다. 그녀의 새 남편은 그녀가 손중산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를 버린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손중산과의 일을 모르는 멀리 떨어진 도치기현 아시카가시의 한 사원주지와 결혼한다. 그리고 그 사원주지와 여생을 보내게 된다.
후미코가 어른이 된 후, 외조부에게서 자신의 생모가 오쓰키 가오루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부친은 바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중화민국의 국부 손중산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놀라면서도 기뻤다. 그녀는 아들 미야가와 도이치(宮川東一)를 데리고 아시카가의 사원으로 가서 오쓰기 가오루를 만난다. 모녀가 다시 만난 것은 이미 50년이 흐른 뒤였다. 오쓰키 가오루는 나중에 죽기 5년전에 카세트테이프에 예전 손중산과 결혼했던 경위를 녹음한다. 그 녹음테이프는 손중산이 초기 일본에서의 생활에 관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오쓰키 가오루는 70년에 사망하니 향년 82세이다. 사후에 남편인 주지와 함께 그 사원에 묻혔다.
후미코와 아들 미야가와 도이치는 1970년대에 타이완으로 가서 손중산기념관을 참관한다. 그리고 손중산의 후손들과 만난다. 미야가와 도이치에 따르면 서로 만나서 기뻤다고 한다. 다만 손중산의 후인(한 증질손)은 그들이 자칭 소위 '손중산의 후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손중산연구에 권위있는 학자는 자세히 역사자료를 검토한 후에 손중산후손이 말한 '소위' 손중산의 일본계 후손은 확실히 손중산의 후손이라고 인정했다. 어떤 사람은 후미코의 아들인 미야가와 도이치에게 왜 유전자감식을 해서 진위를 밝히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미야가와는 만일 누군가 요청하면 기꺼이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나서서 감정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반룡부봉(攀龍附鳳)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에
손중산이 송경령과 결혼할 때는 송경령이 반드시 '일부일처'여야 한다는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그래서 손중산은 본부인과의 혼인관계를 해제했다. 그러나, 손중산이 오쓰키 가오루와 결혼할 때 그녀는 그런 조건을 내걸지 않았다. 손중산은 비록 오쓰키 가오루를 처로 맞이했지만, 그녀를 혁명반려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천하위공'으로 바쁠 때 황학일거불부반(黃鶴一去不復返)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손중산은 솔직하게 여자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그녀가 좋아했던 여자들을 관찰해보면, 하나의 특징이 있다. 모두 그보다 나이가 어리다. 본부인은 나이가 비슷하지만, 진수분은 손중산보다 7살이 어리고, 아사다 하루는 손중산보다 16살이 어리며, 오쓰키 가오루와 송경령은 그보다 20살이상 어리다. 모두 노부소처(老夫少妻)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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