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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손중산)

손중산: 유부남을 사랑해 자식까지 낳은 딸을 강제로 떼어놓다.

by 중은우시 2013. 12. 1.

글: 왕남방(王南方)

 

 

 

위인으로서, 손중산의 여러가지 이야기는 아주 자잘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떤 가정생활을 보냈을까? 부친으로서 그는 자녀의 눈에 어떤 이미지일까? "정밀인생(靜謐人生) - 광동홍콩마카오소장 손중산 차녀 손완(孫婉), 대은새(戴恩賽) 항려문물연합전시회"가 심천박물관에서 개최되었고, 손중산이 사랑하는 딸 손완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가 대중의 시야에 들어왔다.

 

중영가 역사박물관의 초대 관장인 손소(孫霄)는 더더욱 전람회 개막때, "손중산의 딸 손완의 희비인생"이라는 공개강좌를 열었다. 손중산이 가장 사랑했던 딸 손완이 '인간세상의 비환리합(悲歡離合)과 영욕(榮辱)"을 모두 맛본 일생을 우리의 앞에 전시했다.

 

손완은 손중산과 원부인 노모정(盧慕貞)과의 사이에 태어난 둘째 딸이다. 손완의 눈에 손중산은 자애로운 부친이다. 그러나 그녀의 일생이 씻어내기 어려운 원망도 남겼다.

 

1895년 10월, 즉 청나라 광서21년, 광주의거가 실패한 후, 손중산은 향산으로 가서 가족과 만난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이것은 손중산과 가족이 만난 시간이 비교적 길었던 경우이다. 한편으로, 이 때의 손중산은 청나라조정의 추적을 피해서 사방으로 도망다니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혁명은 저조하여, 손중산에게는 경험과 교훈을 되새길 시간이 필요했다. 혁명자금을 모집하고 여러가지 준비를 해야 했다.

 

손완의 생명은 바로 이 시기에 잉태된다. 다음 해, 손중산은 다시 영국으로 가서 혁명을 위하여 분주히 뛰어다닌다. 그리고 그녀가 태어난 것을 몰랐다. 손중산이 막 런던에 도착한 후, 청나라정부의 주영국런던공관에 유인되어 구금당한다. 1896년 11월 12일, 손완이 출생한다. 이 날은 바로 손중산의 생일이다. 그래서, 어린 생명의 탄생을 모든 가족들은 운명이 내린 길조라고 여겼다. 위난에 빠진 손중산에게 운명의 전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들은 몰랐지만, 이때 손중산은 막 런던에서 위험을 벗어났다. 딸의 출생소식을 듣고 손중산은 흥분해 마지 않았다.

 

손완은 손중산의 막내자식이다. 언니인 손연이 병사한 후 손완은 부모의 유일한 딸이 되어, 가족들은 그녀를 더욱 아끼고 사랑했다.

 

손완은 전체 유년시절을 표박무정(漂泊無定)한 세월을 보낸다. 손중산의 혁명의 길에서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부친을 거의 만나지 못한다. 그들의 마음 속에 부친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아주 낯선 사람이다.

 

손완이 출생한 후, 계속 모친을 곁에 있었다. 호놀루루(중국명 "檀香山")에 있는 백부 손미(孫眉)의 집에서 산다. 가족의 생활은 손미가 경영하는 농장으로 유지했다. 여기서 그녀는 12년을 살게 된다.

 

1901년, 손중산은 호놀루루로 돌아와서 가족과 재회한다. 당시 손완은 겨우 5살이었다. 이것은 손완이 처음으로 부친을 만나는 것이어서 아주 기뻐했다. 그녀는 자연히 부친이 의거실패후 다시 망명을 떠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다시 부친과 만난 것은 다시 5년이 지난 후였다. 학계에서는, 손중산이 혁명을 위하여 사방으로 분주히 돌아다니던 시절에, 전후로 호놀룰루에 6번 갔다고 본다. 이는 손중산이 바쁜 혁명활동중에도, 아이와 가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가정, 친정과 민죽국가대의의 가운데 그는 어느 하나를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10년 12월 20일, 손중산은 망명도중 두 딸에게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서 딸들이게 사진을 보내달라고 한다. 그리움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렇게 자신의 아이, 처 및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1912년 2월 13일, 내외의 문제와 여러가지 압력으로, 손중산은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서 사임하고, 원세개에게 넘겨준다. 인심을 회유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서 원세개는 손과(孫科)를 "훈인자제(勳人子弟)"로 대우하여 국비 1만달러로 미국유학을 보내준다. 함께 미국유학을 떠난 사람은 손완이다.

 

그해 손완은 막 16살이었고, 금방 왕백추(王伯秋)와 연애하고 결혼까지 한다. 20살때 그녀는 왕백추와의 사이에 첫번째 아이를 낳는다.

 

왕백추는 일본유학기간동안 동맹회에 가입했다. 그녀와 손완은 학교에서 조직한 유학생빙상활동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왕백추는 이미 국내에 가정이 있었다. 1915년, 손완은 하얀 면사포를 쓰고, 원하던대로 왕백추와 교회에서 결혼식을 연다.

 

손완이 미국에서 왕백추와 결혼한 것을 손중산은 처음에 몰랐었다. 그가 보기에 왕백추는 가슴이 이상을 품고, 신뢰할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손중산은 왕백추가 이미 가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왕백추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손중산은 중국봉건사회가 남긴 일부다처제를 철저히 반대했고, 달이 다른 사람의 첩으로 사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손중산은 딸에게 보낸 서신에서 명확히 요구한다. "완아는 잘 반성해야 하고, 속히 귀숙하여..일을 타당하게 처리해라."

 

손중산의 고집하에,왕백추는 두 아이를 데리고 손완을 떠난다. 나중에, 오빠 손과가 어레인지하여, 손완은 광주군정부에서 일하던 대은새 박사와 결혼한다. 1969년까지, 73세의 고령인 손완 여사는 딸과 얘기를 나누면서, 당시 왕백추와 강제로 헤어지던 때를 얘기하면서 여전히 "나는 네 외할아버지에게 불만이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드러냈다.

 

1979년 6월 10일, 손중산이 가장 사랑하던 딸 손완은 마카오 경호의원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향년 83세이다. 인간세상의 창상을 맛보았고, 인간세상의 영욕을 다 겪은 다음 표연히 떠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