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만루(金滿樓)
"2차혁명"이 실패한 후, 황흥(黃興)은 도쿄(東京)로 가서 손중산(孫中山)과 만난다. 양대 혁명영수가 다시 만났을 때, 서로 마주하며 말이 없었다.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침중했을지는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후 "2차혁명"이 실패한 원인을 검토할 때, 두 영수간에는 심각한 의견차이가 있었고, 격렬한 싸움이 발발한다. 손중산은 혁명실패원인이 당내조직이 느즌하고, 당원들이 지휘를 듣지 않고, 엄격한 기율이 없기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손중산은 이번 혁명은 완전이 자신에게 패한 것이지, 원세개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 황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2차혁명"은 어쩔 수 없는 혁명이었고, 완전히 원세개가 혼자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혁명이 실패한 주요원인은 적아쌍방의 역량이 너무나 차이났고, 적이 지나치게 강대한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황흥은 손중산이 즉시 3차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략을 축적하여 다시 거사를 도모해야한다고 여겼고, 즉시 의거를 일으키는 것은 혁명역량을 그냥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손, 황 두 거두의 다툼은 동시에 혁명당내에 심각한 의견차이를 발생시킨다. 정잠(程潛)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한번은 진기미(陳其美)와 이열균(李烈均)이 군사실패문제를 논의할 때, 진기미가 돌연 실패이 책임을 모조리 황흥에게 떠넘겼다. 당원들이 손중산의 의견을 따르지 않아서, 빠른 시일내에 난을 일으킬 수 없어서 실패가 그렇게 빠르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열균은 그 말을 듣고 반박했다. 국민당이 개조된 이후, 사권(事權)이 하나가 아니어서, 이번 혁명이 실패한 것이다. 황흥이 어찌 혼자서 책임을 져야 하겠는가? 하물며, 신해혁명이후, 동맹회의 일부 동시는 이익에 눈이 어두워, 모두 도독이 되고자 했고, 일시에 무수한 제멋대로의 도독들이 나타나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마음대로 행동했으며, 당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것을 황흥이 책임져야 한단 말인가? 진기미는 "제멋대로 도독"이라는 말을 듣고는 화가나서 얼굴이 벌개지고, 화를 벌컥낸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헤어진다.
황흥의 소극적인 태도에 대하여 손중산은 불만이 컸다. 그는 그후 도쿄에서 단독으로 정당개조업무를 시작한다. 손중산은 혁명이 참담하게 실패한 것은 당내에 "혁명이 성공하면 혁명당은 없어진다"는 사조가 팽배했기 때문이며 동맹회가 국민당으로 개조된 후, 성분이 복잡하고, 조직이 혼란하며, 당내기율이 전혀 없어, 전체 당의 상하는 모래알과 같았으며, "당원들은 모두 독단독행하고, 각자 스스로가 옳다고 여겨서 통일이 되지 않았다....식자들은 우리 당의 실패를 논하면서 모두 마음이 흩어진 것으로 돌렸는데, 그것이 확실히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원세개를 격파하고 북양정권을 전복시키려면, 반드시 이 형동허설(形同虛設)의 국민당을 철저히 개조해야 한다. 손중산의 소위 "훼당조당(毁黨造黨)"은 원래의 국민당을 새로 개조하여 신당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14년 7월 8일 일본에서 성립한 중화혁명당이다.
사실을 얘기하자면, 중화혁명당은 여전히 옛날 동맹회의 기반에 의존하고 있다. 송교인이 국민당을 조직할 때 합병해온 그 역량이다. 당시에는 이미 명존실망(名存實亡)의 상태였다. 이번에 아예 떼어낸 것이다. 그 외에, 손중산은 당을 만들 때 혁명절차를 "군정(軍政), 훈정(訓政), 헌정(憲政)"의 3단계로 나누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손중산이 처음으로 내놓은 점진이론이다. 이것은 나중에 국민당의 시정에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중화혁명당의 창건과정에서, 가장 사람들에게 지적받는 것은 손중산이 제창한 준극권체제(準極權體制)이다. 그것은 바로 당내에 무조건적으로 '당괴(黨魁, 즉 손중산 자신)'을 옹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의 모든 고급간부는 선거로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 당괴가 직접 임명하는 것이다; 당원은 3개의 급별로 나누는데, "수의당원(首義黨員), 협조당원(協助黨員) 및 보통당원"이다. "무릇 당원이 당을 배신하는 행위를 하면, 본인을 처벌하는 외에, 소개인도 과실책임을 진다", "혁명이 성공하는 날, 수의당원은 모두 원훈공민(元勳公民)이 되어 일체의 참정,집정의 우선권을 가진다; 협조당원은 유공공민(有功公民)이 되고, 선거 및 피선권리를 가진다; 보통당원은 선진공민(先進公民)이 되며, 선거권리를 가진다." '당원이 아닌 사람은 혁명시기내에 공민자격을 갖지 못한다."
그외에, 모든 입당당원은 반드시 서약을 해야 하고, 지문날인을 해야 한다. "자신을 희생하고, 손중산 선생에 복종하며, 다시 헉명을 일으킨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다래와 같이 선서하여야 한다: "1. 종지를 실행한다. 2. 명령에 복종한다. 3. 직무를 다 한다. 4. 비밀을 엄수한다. 5.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한다." 서약의 마지막에는 "만일 다른 마음을 품으면 극형을 달게 받겠습니다."라는 말이 덧붙어져 있었다.
이 서약과 의식에 대하여 많은 원로동지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찬성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손중산은 혁명실패는 기율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이에 대하여 전혀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손중산은 말했다. "첫째, 혁명은 반드시 유일(숭고하고 위대한)한 영수가 있어야 한다. 그후에 비로소 깃발을 들 수 있다. 팔에게 시키면 팔이 시키는데로 움직여야 강력한 단체인격이 된다; 둘째, 혁명당은 군룡무수(群龍無首) 혹은 서로 우두머리를 다투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유일한 영수의 아래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셋째, 손중산은 나를 대표한다. 나는 전제를 전복시키고, 공화를 건립하는 것을 먼저 제창하고 실행하여 온 사람이다. 만일 나에게서 떨어져서 공화를 논하고, 민주를 논한다면 그것은 남원북철(南轅北轍)이다. 충성스러운 혁명동지는 '개인에 복종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반드시 동지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은 많은 경우 알지 못하고, 견식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나를 맹종해야 한다. 나는 절대로 동지들에게 책임질 것이다. 절대로 동지들을 이끌어 실패의 길로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 몸으로 수천년독재인치의 낡은 체제를 끝장내고, 억만년 민주법치의 큰 기초를 닦고자 한다; 넷째, 다시 혁명을 일으키는데 내가 없으면 안된다. 동지들이 다시 혁명을 일으키려면, 나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양보할 여지가 없다....나는 감히 나 이외에 혁명스승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지문날인에 관하여 손중산은 마찬가지로 천경지의(天經地義)라고 여겼다. 조그만치도 고칠 생각이 없었다. 당시 방관하고 있던 당무부장(黨務部長) 거정(居正)의 회고에 따르면, "총리의 의지가 강했고, 태도는 확실했다. 남산은 옮길 수 있어도, 이 것은 건드릴 수 없었다." 사실상, 손중산 자신도 선서하고 맹세해서, 장중함을 보였다.(다만 지문날인은 하지 않았다)
손중산은 혁명과정에서 강호방파의 방식을 도입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일찌기 1911년 5월, 손중산은 미국에서 자금을 모을 때, 당시에 이런 결정을 한다: 동맹회와 치공당(致公黨)을 합병하고, 동맹회에 가입하고 치공당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일률적으로 치공당에 가입한다. 치공당에 가입하고 동맹회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일률적으로 동맹회에 가입한다."
손중산의 이런 방식은 더 많은 화교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혁명을 위하여 자금을 더욱 많이 모집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많은 동맹회원들은 이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했다. 그들은 치공당이 그저 강호방파일 뿐이라고 여긴다. 입회때 비밀날인해야 하고, 암어를 외워야 하고, 무릎을 꿇고 훈시를 들으며, 피를 빼서 맹세를 한다. 이런 종파미신의 방식은 혁명종지와 많이 달라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다만, 손중산은 미신은 회원을 단결시키는 좋은 방법이라고 여긴다. "설사 향과 촛불이 공급되지 않더라도, 자신이 향과 촛불을 만들어 이 미신을 유지해야 한다." "일단 이 미신을 버리게 되면, 아마도 모조리 흩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지금 만일 하나하나 따져본다면 백년전의 손중산은 이 정치의 본질을 아주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원이 선서하는 것은 아무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다만 당원에게 "자신의 생명, 자유, 권리를 희생하여, 손중산에 부종(附從)하여 다시 혁명을 일으킨다"는 무조건충성과 적나라한 개인독재방식은 혁명당인들이 계속하여 추구해온 민주,자유원칙과 남원북철이다. 동맹회의 일부 원로급인물은 실망하고 불만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비록 압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손중산이 자신의 위치를 너무 높이 끌어올린다고 생각하였다. 여러해동안 친구였던 궁기도천(宮崎滔天)조차도 개인적으로 다른 의견을 얘기한다. 당시 손중산의 태도는 "다른 중국인은 다 안된다. 나 혼자만이 된다. 나는 중국의 구성(救星)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후,궁기도천의 중국혁명에 대한 열정은 점점 식어간다. 이것은 뒷얘기이다.
혁명진영의 2인자인 황흥은 공개적으로 손중산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멀리 유럽으로 떠난다. 진형명(陳炯明)은 당시에 남양에 있었다. 손중산이 몇번 서신을 보내어 그에게 도쿄로 오도록 청하였으나, 진형명은 들은체 만체 한다. 손중산을 여러 해동안 따랐던 왕정위(汪精衛), 주집신(朱執信)등도 모두 이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시종 입당수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사실상, 중화혁명당은 1914년 7월에 성립된 후, 진기미, 대계도, 장인걸, 장개석, 등갱, 임삼등이 입당선서에 지문날인한 외에, 영향력이 있는 혁명당인인 황흥, 이열균, 백문울, 오치휘, 채원배, 담인봉, 뉴영건등은 대부분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여 당괴에 부종하는 것은 굴욕으로 보고, 입당을 속속 거절한다. 손중산이 개인집권을 추진하려던 독재수법은 결국 동맹회의 분열을 다시 한번 불러오고, 많은 동지들이 결렬하고 떠나버린다.
거정의 회고에 따르면, 일부 당원은 가입의식을 적절히 수정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중화혁명당에 다시 가입하는 동맹회원은 그저 손중산 선생에게 구두로 가입을 원한다고 표시만 하면 다른 절차를 면제해주는 것등이다. 그외에 서약에서 "손중산에 부종(附從)"을 "총리에 복종(服從)"으로 바꾸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거정이 이들 의견을 손중산에게 전달하자, 손중산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지문날인을 하고 개인에 충성하는 방식은 혁명당의 내부분열을 가져온다. 많은 혁명당인은 멀리 떠나거나, 업무수행을 거부한다.그리하여 결국 중화혁명당은 역사상 무슨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성립대회를 한번 열었을 뿐, 몇번의 실패한 작은 거사가 있었을 뿐, '2차혁명"후의 민국정국에서 기본적으로 주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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