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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손중산)

손중산의 3명 대내시위(大內侍衛): 서로 다른 길, 서로 다른 운명

by 중은우시 2019. 1. 5.

글: 시기(屎記)


우리는 알고 있다. 초기의 국민정부는 손중산 선생이 이끌었다는 것을. 그때 그의 수하에는 겨우 몇 명이 있었고, 나중에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하여 손중산의 대내시위라고 부른다. 그들은 당시 손중산 수하의 2명의 영장(營長)이었다. 설악(薛岳), 섭정(葉挺) 그리고 장발규(張發奎)가 그들이다. 그러나 나중에 이 세 명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고, 마지막에 그들의 최후도 서로 크게 달랐다.


1921년 손중산과 당시의 계계(桂係)의 우두머리인 육영정(陸榮廷)이 싸우고, 바로 이때 계계가 국민정부에서 떨어져 나간다. 손중산의 수하에 의존할 수 있는 무력은 겨우 월군(粤軍)만 남는다. 당시 월군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일치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중산의 안전을 위하여 경위단(警衛團)이 설립된다. 원래 단장은 등중원(鄧仲元)이 맡으려 했는데, 그는 일이 너무 많다보니, 그 중임을 자기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인 진가옥(陳可鈺)에게 넘긴다.


경위단이 명성을 떨친 전투는 1922년이다. 당시 진형명(陳炯明)은 이미 병력을 이끌고 손중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경위단의 설악, 섭정, 장발규 세 명의 장령은 일치단결하여 손중산의 안전을 보호해냈고, 3명의 장령은 이로 인하여 이름을 떨친다. 나중에 손중산이 죽은 후, 경위단은 다시 제1사단으로 돌아간다.


3명의 대내시위의 정의(情義)도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나중에 섭정은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과감하게 남창의거(南昌義擧)를 일으킨다. 장발규와 설악은 부득이 자신의 옛전우와 싸우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 세 사람은 이때부터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장발규는 나중에 왕정위(汪精衛)를 따른다. 비록 적지 않은 전공을 세웠지만, 시종 왕정위로부터 중용되지 못한다. 오랫동안 비교적 한산한 상태로 있다가 해방전쟁이후 장발규는 홍콩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조용하게 생을 마친다. 일대의 장령이 이런 최후를 맞이한 것은 그저 장발규가 처음에 잘못 선택한 때문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섭정은 나중에 출국한다. 항전때 섭정은 귀국하여 신사군(新四軍)의 군장을 맡아 항일전쟁에서 적지 않은 공을 세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애국장령은 마지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섭정이 나중에 연안으로 날아가는 도중에 발행히 사고를 당하고 만다.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 세 명중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은 설악이다. 설악은 나중에 장개석(蔣介石)을 끝까지 따른다. 항전시기에는 더더욱 장개석의 중용을 받는다. 그는 전구사령관이라는 직위까지 오른다. 그러나 나중에 해방전쟁에서 패배한 후,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갔다. 그리고 대만에서 사망한다. 향년 103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