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춘추소력(春秋小歷)
923년, 십일월, 변주(汴州)
성벽은 여러 곳이 무너져 있었고, 항토(夯土)가 갈라진 틈으로 암홍색의 얼음이 보였다. 반쯤 찢어진 양(梁)자 깃발이 성벽에서 너덜거렸고, 북풍에 펼쳐졌다가 말렸다가 하고 있었다. 땅 위에는 부러진 노기(弩機)와 녹슨 화살이 흩어져 있었다. 눈덮인 몇 구의 시신이 깨진 벽돌틈에 반쯤 묻혀 있었고, 성벽의 아래에 쌓여 있는 풀더미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나서, 아침안개와 섞여 전체 성을 감싸고 있었다. 겨울햇볕은 혼탁한 회황색이 되었다.
주우정(朱友貞)이 죽은 후, 후량(後梁)의 군사, 정치 두 방면의 관료들은 대부분 투항을 선택했다. 그래서 이존욱(李存勖)이 변주를 점거하는 과정에서 극히 적은 충돌만이 발발했을 뿐이다.
후량이 멸망한 후, 이존욱의 첫번째 동작은 바로 후당(後唐)의 도성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는 원래 후량의 배도(陪都)이 낙양(洛陽)은 후당의 동도(東都)로 승격되었으며, 핵심도성이 된다. 장안(長安)이 서경(西京)으로 바뀐 후, 하동사람이 성공한 근거지인 태원(太原)은 북도(北都)가 되며, 최종적으로 칭제한 위주(魏州), 하북의 그 도시는 배도로 승격되었다.
이렇게 하니, 후당이 당시 점거한 강역은 기실 아주 컸지만, 그다지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전성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성기의 후당은 동으로는 바다, 서로는 농우(隴右), 북으로는 장성에 이르렀다. 그리고 후당시기에는 유운십육주(幽雲十六州)를 아직 잃지 않았고, 중원정권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남쪽으로는 강한(江漢)을 넘어갔다. 이렇게 방대한 판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대영역(五代領域), 무성어차자(無盛於此者)"(오대에 강역이 이보다 큰 경우가 없었다)
이무정은 심주(深州) 박야(博野)사람이고, 그곳은 오늘날의 하북 여현(蠡縣)이다.
하북은 오대십국시기에 천하가 어지럽지 않더라도, 하북은 어지러웠고, 천하가 어지러울 때는 하북이 가장 어지러웠다. 이무정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다수의 난세에 태어난 젊은이들처럼, 농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당연히 종사할 생각도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농업은 파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무정은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군대에 들어갔고, 일개 병사가 되었다. 서서히 그는 군대내에서 하급장수로 성장한다.
십년농무분회신(十年壟畝焚灰燼)
일령융의과삭풍(一領戎衣裹朔風)
주문주탁군신취(朱門酒濁君臣醉)
비고성희장상용(鼙鼓聲稀將相慵)
장수가 되니 군대내의 생활이 점점 나아지기 시작한다.
아쉽게도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금방 황소(黃巢)의 난이 발생한다.
황소가 장안을 점려하고, 천하가 대혼란에 빠진다. 이무정의 군대는 황소의 반란군을 치도록 파견된다. 이번에는 그냥 시늉만 해서는 안되고,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다행히 이무정은 비교적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잔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았을 뿐아니라, 요행히 황소의 주력부대 하나를 격패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큰 공을 세우고 직접 신책군지휘사(神策軍指揮使)로 발탁된다.
평상시라면 이런 식으로 발탁될 수 없다. 오직 난세였기 때문에 이무정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난세에 인재를 발탁하는 것은 이처럼 파격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황소가 소탕된 후, 대군벌이 무너진다. 그러나 오히려 무수한 소군벌을 탄생시킨다.
우리는 황소가 장안을 점령했을 때, 대당황제 당희종(唐僖宗)은 촉(蜀)으로 피난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도망간 것이다. 황소가 소탕된 후, 당희종은 다시 돌아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황제가 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등극하거나, 제국에 태상황이 있지 않다면, 황제가 재위하고 있을 때, 살아있는 부친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희종은 예외였다. 당희종에게는 부친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바로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는 권신 전령자(田令孜)이다.
이건 필자가 헛소리하는 것이 아니다. <신당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제자광혼(又帝資狂昏), 고정사일위지(故政事一委之), 호위부(呼爲父)"
(또한 황제는 자질이 광망하고 멍청하여, 정무를 모조리 그에게 위임하고 '부친'이라고 호칭했다)
당희종은 매우 멍청하고 능력도 낮으며,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모든 업무를 전령자에게 위임하여 처리하게 했다. 그는 전령자에게 매우 친절했다. 사적으로 전령자를 이름이나 관직으로 부르지 않고 그를 "아부(阿父)"라고 부른 것이다.
당시에 많은 절도사가 있었고, 이런 현상에 불만이 있었다. 그중 주로 봉상절도사 이창부(李昌符), 하중절도사 왕중영(王重榮), 정난절도사 주매(朱玫), 그리고 이존욱의 부친인 하동절도사 이극용(李克用)이 있었다.
이들은 연합하여 전령자가 권력을 농단하는데 반대했고, 병력을 모아서 장안을 공격한다. 전령자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다시 당희종을 데리고 한중(漢中)으로 도망친다.
도망치는 도중에 병력을 이끌고 당희종을 호위한 책임자가 바로 이무정이다.
당연히, 이번에 도주하는 동안 당희종을 호위한 사람은 이무정만이 아니다. 또 다른 신책군지휘사 왕건(王建)도 있었다.
호송에 공로가 있어, 당희종은 매우 감동한다. 그리하여 왕건에게 어의(御衣)를 내리고, 그를 사천통강(四川通江)의 자사(刺史)로 임명한다. 그리하여 왕건은 나중에 촉을 차지하고, 나라를 열고 황제를 칭하는 기반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무정에 대하여도 당희종은 당연히 잘 대해주었다. 이무정의 공로는 더욱 컸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당희종을 호위하여 일신의 안전을 보장했을 뿐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주매가 파견한 추격병을 막는 일까지 했기 때문이다.
당희종이 도망친 후, 주매가 장안을 장악한다. 황소의 경험과 교훈을 받아들여, 그는 이때 당나라의 조정은 이미 운수를 다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백족지충사이불강(百足之蟲死而不僵)이다. 그는 감히 황제에 오르지 못하고, 이당황실의 이온(李熅)이라는 종실자제를 새로운 황제에 앉힌다. 이는 당희종으로 하여금 퇴위하여 태상황으로 물러나라는 것이다.
평상시에 우리는 당희종이 무능하다고 여겼고, 그저 완물상지(玩物喪志)의 멍청한 인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한두번 총명할 때가 있는 법이다.
당희종은 도망가는 과정에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던 이 황제는 예상외로 이극용과 왕중영을 회유하고, 심지어 주매가 가장 신임하는 중요부하 왕행유(王行瑜)까지도 회유하는데 성공한다. 그리하여 형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여러 장수들이 주매를 공격한다. 주매는 금방 죽고, 장안은 해방된다. 당희종은 다시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령자를 타도하려던 집단은 해산했다. 봉상절도사 이창부는 황제에 맞설 생각까지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당희종에게 투항한다. 그리고 황제가 장안으로 돌아갈 때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곳인 봉상에서 황제를 공손히 맞이한다.
당희종이 봉상에 도착했을 때, 처음에 이창부의 태도는 비교적 괜찮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으며, 안부도 물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창부는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당희종이 장안으로 돌아가는 일정을 계속 늦추었다. 그는 당희종을 봉상에 남겨서 황제를 통제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황제가 떠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한다는 것은 삼국시대 조조가 써먹은 방법이다. 난세에 군벌들은 모두 그것을 따라하고 싶어한다.
단지, 당희종은 한헌제보다 통제하기 쉬웠지만, 이창부는 생각해야할 것이 있다. 그는 조조같은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창부의 계획은 주도면밀하지 못했고, 그런 행동은 금방 당희종의 분노를 산다. 당희종은 이무정을 시켜 이창부를 공격하게 한다. 그리하여 이창부는 피살되고 만다.
이는 오대십국시기 많은 중소군벌들이 실패한 근본원인이다. 그것은 바로 책을 많이 읽지 못했지만, 생각이 너무 많았고, 능력은 너무 부족했으며, 꿈은 너무 컸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무정은 당희종의 구세주였다. 대당조정의 구세주였다. 황제는 아주 기뻐했고, 이무정을 봉상절도사에 앉히고, 심지어 농우(隴右)까지도 그에게 하사한다.
변방의 한 하급군인이 기연을 만나 제국의 고위층에 진입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얼마 후, 당희종이 죽고, 황제는 당소종(唐昭宗)으로 바뀐다.
당소종은 포부가 있었고, 비교적 능력도 있었다. 그러나 성격이 문제였다. 그는 의심이 많았고, 우유부단했다. 어느 정도 숭정제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는 적시에 이무정을 처리하지 못하여, 이무정이 기회를 잡고 군대를 일으킨다. 경원(涇原)을 점령하고, 양주(洋州)도 차지한다. 봉주(鳳州)도 차지하여 세력이 갈수록 커졌다. 그리고 그의 세력범위는 장안에서 매우 가까웠다. 그는 황제의 바로 곁에 있는 것이다. 서서히 그는 이렇게 무력으로 개척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고 여겼고, 반드시 조정에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자신의 권력을 한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무정은 중앙조정의 사무에 관여하고 심지어 황제에게도 간섭한다.
당소종은 분노했다. 마음 속으로 네가 과거의 황제를 잘 호위한 충신이어서 모두가 너를 좋은 사람으로 여겼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오늘날 너는 나라를 훔치려는 권신이 되었구나. 그리하여 그는 반드시 이무정을 견제해야겠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당소종은 봉상절도사의 직위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게 하고, 이무정은 다른 곳으로 보내는 명령ㅇ을 내린다.
이무정은 이렇게 대답한다:
"전장은 변화가 너무 빠릅니다. 군대는 통제하기 쉽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함부로 떠난다면 아마도 불측의 사태가 발생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나는 황제의 곁에 있어서, 호위하기 편리합니다. 만일 장안에 혼란이라고 생긴다면 황제께서는 누구에게 호위를 맡기시려고 하십니까?"
듣기는 좋은 말이지만, 실제로는 명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황제의 임명을 거부한 것이다.
이무정의 대답을 들은 당소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한다: 내가 이렇게 계속 능욕을 당할 수는 없다!
당소종이 분노한 것은 이무정이 명을 어긴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말 속에서 이무정의 대당이씨황제에 대한 조롱도 읽혀졌기 때문이다.
이무정은 대당의 황제는 다른 것은 돌볼 틈이 없고, 그저 도망쳐서 목숨만 살아남으려 한다. 걸핏하면 도성을 버리고 각지로 피난간다.
기실, 이무정의 그런 말에 별다른 문제는 없다.
안사의 난 때, 당현종이 도망쳤었고,
토번이 장안을 점령했을 때, 당대종이 도망쳤었고,
경원병변때, 당덕종이 도망쳤었고,
황소의 난때, 당희종이 도망쳤었으며,
주매의 난때, 당희종은 다시 한번 도망쳤었다.
확실히, 당나라의 쇠퇴는 이미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안사의 난에서 어렵사리 부흥을 이루고, 번진의 횡행에서 봉천지난까지, 영정혁신(永貞革新)에서 잠깐동안의 원화중흥(元和中興)까지, 환관당권에서 남아북사(南衙北司)까지, 다시 우리당쟁(牛李黨爭)까지, 제국의 고질은 이미 골수에 스며들어 있었다. 회창중흥(會昌中興), 대중지치(大中之治)같은 것으로 되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물며 뒤이어 당나라말기의 농민반란이 크게 일어나지 않는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소종은 시대를 잘못 만났다. 만일 평화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업적을 남긴 황제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와 당희종의 등극순서만 달랐더라도 아마 사정은 조금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역사는 가정이 없다. 당소종은 결국 모든 것을 떠안아야 했다. "천자구도(天子九逃), 국도육파(國都六破)"(천자가 9번 도망치고, 도성이 6번 함락되다)에 자신이 2번을 추가하게 된다.
이무정은 풍운의 시기에 스스로 큰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나갈 수 있을지는 그저 하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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