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인문지광(人文之光)
중국고대사에 난세는 많았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난세에 희망과 서광이 보이지 않는 것일 것이다. 전형적인 사례는 서진(西晋)이 붕괴된 후의 3세기에 걸친 대난세이다. 오호난화(五胡亂華)에서 남북난세까지 삼백년가량의 기간동안 몇대의 사람들은 천하대란을 겪으면서 난세의 사람들은 전혀 평화롭게 살아갈 희망을 볼 수 없었다.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동란정도는 오호난화를 훨씬 초월했다. 다만 다행히 오대십국의 동란은 겨우 50여년간 지속되었고, 북송에 의해 끝난다. 그렇다면, 당말에서 북송초기까지 살았던 사람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오늘은 그 시기를 살았던 후익(侯益)에 관해 얘기해보기로 한다.
1. 농가출신
당희종(唐僖宗) 광계(光啓)원년(885년), 후익은 산서(山西)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난다. 후익의 집안은 거의 몇대에 걸쳐 농사를 지었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후익도 평생 그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보통 농부로 살았을 것이다.
태평세월에도 농민은 수탈대상이었다. 성당시기에도 농민들은 여전히 착취와 약탈을 당했다. 당말의 난세에는 농민이 말년까지 평안하게 살수만 있어도 그것은 승리라 할 수 있다.
후익은 그런 시기에 농민으로 태어났고, 기실 그중 99%는 불행했다. 후익은 1%의 행운아였다.
후익은 어려서 이미 깨닫는다. 농사를 지어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군대에 들어간다. 그에게 적합한 길을 찾은 것이다. 당시 그는 이극용(李克用)의 군대에 들어간다. 많은 사람들은 후익이 이극용을 선택한 것은 그가 나중에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으로 더욱 큰 원인은 후익이 산서사람이고, 산서주변에서 세력이 가장 큰 사람이 이극용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의탁한 것일 것이다.
아마도 양행밀(楊行密), 왕심지(王審之)같은 세력은 후익이 아마 들어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2. 후익의 충성
이극용의 휘하에서 후익은 전투에 용맹했다. 그리고 전투에서 확실히 적지 않은 전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이극용은 후익을 주목하게 되고, 점점 좋은 위치로 승진하게 된다. 후익은 그리하여 이극용집단의 중요장수가 된다.
이극용이 죽은 후, 이존욱(李存勖)이 이극용의 세력을 승계한다. 그리고 중원의 주씨양조(朱氏梁朝, 오대의 후량)를 무너뜨리고, 사타당조(沙陀唐朝, 오대의 후당)를 건립한다. 이존욱이 황제에 오른 후기 사타당조에 내란이 발생하고, 이존욱은 난전에 휘말려 사망하며, 이사원(李嗣源)이 황위를 계승한다.
일찌기 이존욱 재위말기에 많은 사타당조의 장령들은 이사원의 편에 선다. 유독 후익만이 이존욱에 충성했다. 이존욱이 곧 세력을 잃을 것이 분명해졌음에도, 후익이 충성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이사원이 황제에 오른 후, 후익을 존중한다. 알아야 할 것은 오대십국같은 난세에 후익같이 충성스러운 무장은 기실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3. 후익의 변신
그후에도 중원은 분쟁이 계속되었다. 이사원이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타당조는 석씨진조(石氏晋朝, 오대의 후진)로 대체된다. 석씨진조의 황제 석경당(石敬瑭)은 후익을 상당히 존중했다. 그러나 후익은 마음을 잡지 못한다. 이런 난세에 정말 진정으로 충성을 바칠 대상이 없단 말인가?
석경당이 죽은 후, 진출제(晋出帝) 석중귀(石重貴)와 거란의 관계가 악화되고, 거란과 석씨진조간에 전쟁이 발생한다. 석중귀가 엉망으로 지휘하다보니 거란이 개봉을 점령하고, 석중귀는 투항한다. 후익도 이에 따라 거란황제의 부장(部將)이 된다. 당연히 거란인드의 중원통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변고가 발생한다; 장수 유지원(劉知遠)이 앞장서서 거란인을 중원에서 쫓아낸다. 유지원도 황제에 로르고 사타한조(沙陀漢朝, 오대의 후한)를 건립한다.
후익은 이 변고에 망설인다. 왜냐하면 유지원은 비록 후익을 받아주겠다고 하였지만, 후익은 걱정이 있었다: 자신이 거란의 책봉을 받은 일에 대하여 유지원이 끝까지 책임추궁을 하지 않을지 여부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파촉(巴蜀)에 할거하고 있던 맹씨촉국(孟氏蜀國, 십국중 후촉)의 황제 맹창(孟昶)도 후익에게 연락하여 촉국에서 후익을 받아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후익은 촉국에 귀순하기로 결정한다. 어쨌든 촉국으로 가는 것이 보다 안전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유지원도 그 소식을 듣고, 유지원은 후익의 방어지구에 사람을 보내어 후익으로 하여금 경성으로 와서 대한황제를 알현하도록 요구한다. 만일 후익이 거부하면, 무력으로 토벌하려는 것이다. 당시 이 일을 책임진 사람은 왕경숭(王景崇)이다.
왕경숭은 군대를 이끌고 사타한조와 맹씨촉국의 군사분계선으로 온다. 그리고 이 구역에서 활동하는 촉군을 궤멸시킨다. 목적은 바로 후익을 겁주기 위함이다.
후익은 촉군이 의지할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촉국에 의탁할 생각을 버린다. 이때 유지원이 죽고 한은제(漢隱帝)가 즉위한다.
후진은 그 틈을 타서 경성으로 가, 사타한조에 귀순할 것이고, 배반할 생각이 없음을 표시한다. 이때 한은제는 일을 하나더 만드는 것보다는 일을 하나 줄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그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
당연히, 후익은 왕경숭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그리하여 조정의 일부 대신들과 연락하여 왕경숭의 죄악이 크다는 소문을 퍼트려 곡 왕경숭이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왕경숭은 후익이 방어지구일대에 있었는데, 이를 알고 후익의 가족 70여명을 죽여버린다.
후익이 거란에 귀순하고, 맹씨촉국과 결탁하고, 다시 왕경숭을 모함한 수단을 보면, 후익이 이때는 이미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말년
한은제 재위후기 곽위(郭威)가 한은제를 몰아내고, 곽씨주조(郭氏周朝, 오대의 후주)를 건립한다. 곽위는 후익이 이극용시대에 하동집단을 위해 목숨을 걸고 공헌했던 점에 감사히 생각했다. 어쨌든 사타당조부터 중원에서 왕조가 여러번 교체되었지만, 거란을 제외하면 나머지 조정은 모두 하동집단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곽위는 노장군을 존중하여 후익에게 초국공(楚國公)의 작위를 내린다.
곽씨주조가 멸망한 후, 조광윤(趙匡胤)이 북송왕조를 건립한다. 조광윤도 여전히 후익의 곽씨주조때의 대우를 유지해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우를 재상급으로 올려준다.
후익의 일생은 전체 오대십국에 걸쳐 있고, 창상을 모두 겪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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