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最愛歷史)
975년 초겨울, 서현(徐鉉)은 다시 한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당(南唐) 사신의 신분으로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의 앞에 섰다.
이때는 남당의 도성 금릉(金陵)이 송군에 포위된지 10개월째였다.
서현은 말솜씨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처음에 조광윤은 이욱이 봉조입조(奉詔入朝)하지 않는 것을 이유로 남당을 정벌할 때, 서현이 한번 온 적이 있다. 이 중원웅주의 앞에서도 서현은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당당하게 논리를 펼쳤다:
"이욱(李煜)은 죄가 없습니다. 폐하의 전쟁은 명분이 없습니다. 이욱은 땅과 같고, 폐하는 하늘과 같습니다. 이욱은 아들과 같고 폐하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하늘은 땅을 덮을 수 있고, 아버지도 아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조광윤이 웃으면서 한 마디 했다.
"부자라면 왜 서로 떨어져 살고 있는가?"
서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 와서도 서현은 역시 같은 논리였고, 간절한 말투로 이욱을 위해 해명하면서, 잠시 전쟁을 멈춰서 "일방(一邦)의 명(命)"을 보전시켜달라고 애걸한다.
조광윤은 처음에는 지난 번과 같이 대응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것도 귀찮았다. 그리하여 몸을 일으켜 검을 뽑으면서 말한다. 강남은 확실히 죄가 없다. 그러나 천하는 일가(一家)이다. 그후에 천고의 명언을 남긴다:
"내 침대 옆에서 누군가 코를 골며 자고 있다면, 그걸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臥榻之側, 豈容他人鼾睡乎)"
서현은 "황공해 하면서 물러갔다(惶恐而退)"
반달 후, 송나라의 명장 조빈(曹彬)의 공격하에 남당후주 이욱은 항복하게 된다.
남당은 "십국(十國)"중 영토가 가장 넓고, 인구도 가장 많고, 실력도 가장 강한 나라였다. 19개주, 108개현, 65만호를 가졌다. 병력도 있고, 명장도 있으며, 능신도 있었다. 건국은 송나라보다 20여년 빨랐고, 부유한 강남의 절반이상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중원처럼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런 기반을 가지고, 사분오열된 할거국면에서, 남당은 원래 중원을 차지할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건국부터 멸망까지, 불과 3세 3제 39년간 존속했을 뿐이다.
겉으로 보면, 이런 역사의 답안지를 내놓은 것에 대하여 남당의 국군을 어떻게 조롱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실제로 남당이 망했지만, 화하에 대한 공로는 천추에 남아 있다:
북송에서 남송까지, 한인들은 모두 이 겉으로 보기에 약한 닭같았던 소국에 감사해야 한다.
남당의 판도
1
우선 남당의 첫번째 황제인 이변(李昪)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남당이 건립되기 전에, 이변이라는 이름을 천하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 남오제왕(南吳齊王) "서지고(徐知誥)"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당시 오태조(吳太祖) 양행밀(楊行密)이 호주(濠州)를 공격할 때, 호주의 개원사에서 당시 나이 7살의 소팽노(小彭奴)를 붙잡는다. 당시는 용모로 먹고살던 시대여서, 얼굴이 잘 생겼기 때문에, 소팽노는 양행밀의 주의를 끌게 된다. 양행밀도 마음에 들어해서, 그를 양자로 삼는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고대의 후궁비빈들간에는 질투가 심했다. 그건 아들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중에 유산쟁탈전을 벌일 경쟁자가 하나 더 늘어나게 되자, 양행밀의 아들들은 크게 불만을 가지고, 감정을 풀다보니, 양행밀이 어쩔 수 없이 소팽노를 자신의 심복대장에게 넘겨준다. 그 심복대장이 서온(徐溫)이다.
소팽노는 원래 성이 이(李)씨인데, 출신이 미천했고, 어려서 부친은 실종되고, 모친은 사망했다.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이제 서온이 길러주게 되니 성을 서(徐)로 바꾸고 이름을 지고(知誥)로 하게 된다.
아무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소팽노는 뛰어난 용모를 가지고 양행밀의 주목을 끌고 다시 서온의 양자가 되었다. 그건 정말 조상대대로 쌓은 운이 폭발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온의 세심한 지도하에 소팽노는 금방 "책을 좋아하고, 활을 잘 쏘는" 젊은이로 성장하여, 서온의 오른팔이 되어 함께 양행밀을 보좌한다. 옛날에 마음에 두었던 소팽노가 이렇게 잘 성장한 것을 보자, 양행밀은 마음 속으로 기뻐했다:
"지고는 준걸이다. 여러 장수의 자제들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
보스의 이 한 마디는 소팽노의 미래를 밝게 했다.
양행밀이 죽은 후, 지도자를 잃은 남오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각 세력간의 투쟁 과정에서 서온이 점점 두각을 나타내어 남오의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소팽노는 서온의 가장 아끼는 간장이자, 가장 뛰어난 아들로서 역시 몸값이 올라, 부친의 뒤를 이어 남오의 2인자가 된다.
927년, 서온이 사망하고, 소팽노는 성공적으로 남오의 국정을 장악한다. 그의 주재하에, 남오의 국주 양부(楊溥)가 마침내 황제에 오른다.
괴뢰국군이 괴뢰황제로 승진한 것이다. 그럼 아예 괴뢰황제를 제거하고, 직접 황제가 되면 되지 않겠는가?
10년후, 모든 것을 갖춘 소팽노는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오른다. 그는 국호를 제(齊)로 바꾼다. 그리하여 고아에서 일국지군으로의 화려한 변신을 완성한다. 이때부터 서지고의 이름은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다시 2년이 지나, 서지고는 원래의 성인 이(李)를 회복하고, 이름은 변(昪)으로 고친다. 국호도 제에서 당(唐)으로 바꾼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남당이다.
2
오대십국은 고대 중국에서 아주 엉망이었던 역사시기이다. 그중 가장 엉망이었던 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국군이 특히 많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변은 그중에서 아주 정상적이었다.
어린 시절의 고난을 거쳐 서온의 집에서 수십년간 양자로 지내다보니, 이변은 인정세고(人情世故)를 잘 알고, 또한 민간질고(民間疾苦)도 잘 알았다.
일찌감치 지방을 통치할 때 이 성격이 온순한 서씨집안의 도련님은 문예를 제창하고, 유학을 숭상하고, 관료통치를 정돈했으며, 백성의 생활을 잘 보살폈다. 그리하여 친민애민의 좋은 관료로서의 이미지를 쌓았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남오말기부터 남당건립까지, 이변은 모든 일을 "부드럽게(柔)" 처리했다.
중원분쟁은 무인천하이고 무장이 권력을 잡으며, 형법은 가혹했다. 그러나, 이변은 이문치국(以文治國)했다. 이런 국책하에 문인, 유학자들이 북방에서 남하하여 남당으로 많이 왔다. 육유(陸遊)의 <남당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열조(이변)이 선비들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선비들중 피란하여 실직한 사람은 당으로 귀순했다."
그리하여, 이변과 여러 문인의 통치하에, 남당은 "경직세자(耕織歲滋), 문물빈환(文物彬煥)"의 모습이 나타났고, 전쟁이 빈번한 중원과 비교하면 천상인간이었다.
문화가 번성하는 곳에서는 무력을 사용하는데 아주 이성적이다
건국초기, 여러 문인, 무장들이 공명을 세우기 위해 이변에게 여러번 영토를 확장하도록 권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군대생활을 되돌아보면서 탄식을 했다. 그가 보기에 진시황, 한무제같은 '불세의 공업'을 쌓는 것보다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나는 어려서 군대에서 잘랐고, 병사들이 백성을 해하는 것이 심하다는 것을 보았다. 차마 다시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상대방의 인민이 안정되면, 우리의 인민도 안정된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무장들은 인명을 초개와 같이 여긴다. 이변은 이렇게 말한다:
"백성들은 모두 부모가 낳았다. 어찌 성을 차지하고 땅을 넓히기 위해 백성이 다른 지방의 초야에 묻히게 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이변은 한 마디를 던진다:
"토벌의 건은 다시 말하지 말라!"
그렇게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생각을 막아버렸다.
이렇게 하여 중원외에 최대국이면서 남당은 '보경식민(保境息民)'했고, 주변에 국력이 남당에 미치지 못하는 소국들 예를 들어 오월(吳越), 민(閩), 초(楚)등과도 사이좋게 지냈다. 심지어 이웃의 국군이 죽거나 국가가 혼란에 빠지면, 이변이 그 위기를 틈타 빼앗을 생각을 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위문하고, 부족한 것을 도와주었다."
이변에 대한 육유의 평가는 이러했다:
"인후공검(仁厚恭儉), 무재양민(務在養民), 유고현왕지풍언(有古賢王之風彦)"
3
이변같은 인군(仁君)을 만나니, 백성들은 감사해 마지 않았다. 남당이 송에 멸망한 후, 이변의 은혜에 감사하는 남당의 유로유소들이 강남에 수도 없이 많았다. 오랫동안, 이는 송나라조정에 큰 압박이 되었다: 어쨌든 모범의 이미지가 너무나 대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나라에 이로운 것(利國)이 반드시 백성에게 이롭지 않고(利民), 백성에게 이로운 것이 반드시 나라에 이롭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단어를 같이 쓰지만 많은 경우 '이국'과 '이민'은 둘 가 갖기가 힘들다.
이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어떤 때는 '이국'을 위하여 백성들을 동원해야 하고, 현재 백성을 소모시켜, 미래의 수익을 도모해야 한다. 그리고 백성을 동원하게 되면 일정기간동안 '이민'은 힘들어진다. 진나라장성을 쌓아야 했을까 쌓지 말아야 했을까? 대운하를 팠어야 했으까, 파지 말았어야 했을까? 진, 수의 백성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이것이 바로 '이국불이민(利國不利民)'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제갈량의 북벌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든지 알고 있다. 당시 촉국의 국력으로는 분명 위국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다만 제갈량이 한 지방을 다스리는데 만족하여, 공격을 포기하고 수비를 하였다면, 아마도 제갈량이 살아있을 때 촉국은 내부소모로 위국에 먹혀버렸을 것이다.
오대십국시기의 남당은 마치 삼국시기의 촉국과 같다. 만일 격류용진(激流勇進)하지 않고, 그저 보경수토(保境守土)에 만족하고, 한 지방에 편안히 있기만 한다면 그것은 중원정권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이 단지 시간문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전쟁에서는 승자만 안전하다.
그리고 승자는 오직 하나이다.
서온이 사망한 때로부터 계산하여, 남오말기부터 남당초기까지, 이변의 문치노선아래에서 실력이 작지 않았던 남당은 군사적으로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다. 그 십여년동안 중원은 여러번 정권교체가 일어나고, 분쟁이 무수히 발생한다. 그러니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이변은 백성들을 힘들게 하면서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는 확실히 좋은 황제이다. 다만 시대에 맞지 않는 순수 문치정책은 이미 남당의 멸망에 화근이 될 수밖에 없었다.
4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나 반대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들 이경(李璟)이었다.
943년, 이변이 임종하기 전에, 그의 앞에 엎드려 있던 태자 이경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덕창궁(德昌宮)에 융기금백(戎器金帛)이 칠백여만이 보관되어 있으니, 너는 수성(守成)하고, 이웃국가들과 잘 지내어 사직을 보전해라"
유언의 형식으로 자신의 후계자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우리는 돈이 많다. 너는 계속하여 나라를 지키면 된다. 사방에 싸움을 걸지 말고
그러나 중주(中主) 이경이 즉위하자, 금방 부친의 가르침을 잊어버린다. 이 신황제는 군사에 열중했다. 전쟁을 생각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고향인 장안까지 쳐들어갈 생각을 한다. "중원을 평정하고, 옛 수도를 되찾을 생각이 있었다."
이경이 보기에, 계속 문치로 수성하는 것은 난세에 살아남을 수 없다. 중원의 큰 나라들은 천하통일의 뜻을 품고 있으니, 우리가 단지 지키려고만 한다면 기세에서 그들에게 밀리게 된다. 그러면 조만간 끝장날 수밖에 없다.
즉위한지 1년만에 남쪽의 민국이 혼란에 빠진다. 이경은 그것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군대를 보내 민국을 공격한다. 2년간 싸워서 결국 민국을 멸망시킨다.
951년, 초국에 다시 내란이 일어난다. 이경은 크게 기뻐하며 병력을 보내 초를 공격했고, 일거에 섬멸했다.
이렇게 하여 남당은 두차례의 대외전쟁에서 성공적으로 두 나라를 멸망시킨다. 남당의 판도는 이때 사상최대에 이른다. 이경의 공적은 아주 보기 좋았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익을 놓고 보면, 남당은 그다지 이익을 얻지 못했다. 복건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장주(漳州), 천주(泉州)일대에는 지방할거정권이 있었다.초의 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입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뱉어내야 했다. 그러니 아무런 수익도 없었다.
이는 마치 제갈량이 강대한 위나라는 놔두고서, 북벌할 힘을 남정에 쓴 것과 같다. '오출기산(五出祁山)'이 아니라 '오차도로(五次渡瀘)'한 셈이다.
더욱 가슴아픈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난다.
남당이 초를 멸망시킨 해에, 중원에서 후주가 건립된다.
후주의 개국황제 곽위(郭威), 2대황제 시영(柴榮)은 잠시 북한(北漢), 요(遼)의 위협을 해결한 후, 주세종 시영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강남을 향한 것이다.
3년동안 북쪽국경에서 전쟁이 계속되었고, 후주군대와 싸우면서 남당의 군대는 궤멸된다. 이때의 이경은 더 이상 중원을 수복할 꿈을 꿀 수 없었다. 황제칭호를 버리고 다시 국주(國主)로 격하시키면서, 후주에 칭신(稱臣)하며, 장강을 경계로 한다.
강(江, 장강을 가리킴)을 지키려면 회(淮, 회수를 가리킴)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지금 강회의 땅을 이미 잃었다. 남당은 전략적으로 결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959년, 후주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간담이 서늘해진 이경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자만 금릉에 남기고 자신은 홍주(洪州, 남창)로 도망쳐 버린다.
당시의 홍주는 금릉과 비교하면 땅도 좁고, 사람들도 가난하다. 이경은 우울함에 빠지고 자신의 황제생애를 되돌아보면 슬픔이 밀려온다.
함담향소취엽잔(菡萏香銷翠葉殘), 서풍수기녹파간(西風愁起綠波間)
연꽃이 지면서 향기가 사라지고, 연잎도 시들었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 푸른 물결 사이로 부니 슬픔이 올라온다.
홍주에서 2년간 우울하게 지내다가 그는 죽고만다.
이때의 중원은 이미 조(趙)씨가 차지했다.
5
자고이래로 황제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어떤 사람은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차시환혼(借屍還魂), 유명무실하게 했다.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속에서, 황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고, 대다수는 경쟁과정에서 조역으로 바뀌거나 희생자가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행운으로' 하고 싶지 않아도 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이욱같은 사람이다.
937년, 칠석에 이욱이 태어났다. 이씨집안에서 이욱은 이경의 여섯째아들이다. 그러면, 황위가 그에게 전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늘의 조화인지 이욱의 앞에 있는 5명의 형이 차례차례 죽어버린다. 결국 이욱은 여섯째에서 실질적인 첫째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1순위 황위계승자가 되었다.
이전 태자가 죽은 후 이경은 이욱을 태자로 세우고자 한다. 그때 대신 종모(鍾謨)가 이렇게 진언한다: 여섯째 이욱은 경부방종(輕浮放縱)하니 일곱째 이종선(李從善)을 태자로 세우십시오. 이경은 대노하며 종모를 좌천시키고, 이욱을 태자에 앉힌다.
'운'이 밀려올 때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다.
이렇게 하여 중주 이경이 사망한 후, 이욱이 왕위를 승계한다. 그가 이후주(李後主)이다.
금릉으로 돌아온 이욱이 직면한 것은 부친이 남겨놓은 엉망진창이 된 국면이었다: 강북의 땅도 빼앗겼고, 국력도 예전만 못하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는 그래도 중원정권과 겨룰 실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부처의 보우를 빌자.
여러 망국지군들 중에 이욱의 이미지는 오락에 빠져서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욱은 노력했었다. 단지 그의 정무능력은 문예능력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조광윤은 막 시씨집안의 천하를 빼앗은 후, 어떻게 강산을 통일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남당은 당시 최대의 할거왕국이었다. 땅도 넓고, 인구도 많았다. 이론적으로 보면 대송과 맞서싸울만한 능력이 가장 큰 나라이다. 남당에 대하여, 조광윤은 항상 우려하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다른 나라와 싸울 때, 남당이 배후에서 등을 찌르는 것이다.
그러나, 조광윤은 금방 안심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당의 후주가 전혀 야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떄문이다.
이욱은 겁을 먹고 사람을 동경으로 파견하여, 스스로의 존호를 삭탈하고, 조씨황제가 직접 그의 성명을 불러줄 것을 청한다. 조광윤은 아주 기뻤지만, 겉으로는 손을 흔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라고 한다.
그래도 이욱은 마음이 불안했다. 그가 보기에 송에 대하여 순종하는 모습만 보이면 송의 황제에게 양해를 얻어, 남당의 종묘사직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욱은 송나라를 정삭(正朔)으로 받들었을 뿐아니라, 남한(南漢)까지도 끌어들여 스스로 송나라를 지지한다; 나머지 할거세력들이 송나라에 의해 하나하나 흡수될 때도 그들은 계속하여 송나라편에 선다. 설사 나중에 송나라가 배를 만들어, 남당을 치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났음에도, 이욱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송을 모셨다. 송에서 만드는 전선을 기습하에 불태워버리자는 의견도 거절하고, 스스로의 규격도 낮추어, 실제행동으로 송을 부친으로 모시겠다는 뜻을 표시한다
그러나, 본문의 첫부분에서의 일막이 그대로 발생한다.
어쨌든 조광윤의 입장에서 "천하는 일가"였기 때문이다.
6
패전하고 투항한 이욱은 포로가 되어 송나라의 도성 동경으로 끌려왔다.
39년의 남당은 한명의 '고지현군(古之賢君)'과 2명의 '문예군주'를 거쳐 멸망한 것이다.
송나라는 남당을 얻은 후 순식간에 졸부가 된다. 3세 이씨가 경영해온 남당과 나중에 송에 귀순한 오월은 대송의 돈주머니이자 쌀창고가 된다.
강남의 돈과 양식을 가지고 송나라는 이후이 국면에서 요나라와 싸울 자본을 마련하게 되고, 그런 자본을 가지고 서하와의 무역전에서 서하를 고갈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요,송,하의 국면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1127년, 역사는 윤회한다.
북송에도 문예부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욱 비참했다. 송휘종, 송흠종 두 황제는 금나라의 "객인(客人)"으로 끌려가 처지가 아주 처량했다.
조구(趙構)가 건염남도(建炎南渡)하여 강남의 부유함에 의존하여 남송은 금, 몽(원)과 근 1세기반을 버틸 수 있었다.
이욱은 송에 멸망한 후 2면후에 인생의 끝을 맞이한다.
978년, 칠석, 이욱은 42세 생일을 맞이한다. 옛신하 서현(徐鉉)이 찾아오자, 이현은 무너져버린다.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예전에 멍청하여, 변법강국을 주장하던 반우(潘佑), 이평(李平)을 죽였었는데, 이욱은 가슴을 치면서 장탄식을 했다: "당시 반우, 이평을 죽인 것이 후회된다"
이 말이 당시 황제 조광의의 귀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날 밤, 이욱은 급사한다. 사인은 부성촉영(斧聲燭影)처럼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임화사료춘홍(林花謝了春紅), 태총총(太匆匆).
무내조래한우만래풍(無奈朝來寒雨晩來風)
연지루(臙脂淚), 상류취(相留醉), 기시중(幾時重)
자시인생장한수장동(自是人生長恨水長東)
숲속의 꽃은 이미 졌구나.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이 너무 빠르다.
어찌하랴 아침에는 차가운 비가 내리고 저녁에도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을...
비맞은 붉은 꽃은 여인의 뺨에 흐르는 눈물과 같아,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언제나 다시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인생은 한스러운 일이 너무나 많다. 마치 장강의 물이 동으로 계속 흐르면서 끝이 없는 것처럼.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오대십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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