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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오대십국)

곽위(郭威): 치정황제(痴情皇帝), 황위까지 처조카에게 물려주다.

by 중은우시 2024. 11. 26.

글: 고금논사(古今論事)

고대에 치정황제는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광무제 유수, 수문제 양견, 명태조 주원장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황제들도 한 사람과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는 황후가 사망한 후 평생 다시 황후를 두지 않았을 뿐아니라, 더더구나 황위까지 황후의 조카에게 물려준다.

그는 바로 북주(北周)의 개국황제 곽위(郭威)이다.

곽위가 가장 낙담했을 때, 평생의 사랑 시씨(柴氏)를 만나다

곽위는 오대십국의 난세에 태어난다. 그의 부친 곽간(郭簡)은 진왕(晋王) 이극용(李克用)의 휘하대장이고, 여러번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전공으로 순주자사(順州刺史)가 되어 순주(順州)에 주둔했다.

나중에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유인공(劉仁恭)이 이극용을 공격했고, 곽간은 순주를 굳게 지키며, 유인공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인다. 그러다가 결국 병력부족으로 성을 함락당하며 전사한다.

다행히 곽간은 사전에 처로 하여금 어린 아들 곽위를 데리고 떠나게 했고, 자신은 유인공의 주력부대를 유인한다. 이렇게 하여 곽위모자는 성공적으로 도망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곽위의 모친 왕씨는 몸이 허약했고, 도중에 병사한다. 나이어린 곽위는 혼자서,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모친의 언니인 한씨(韓氏)를 찾아간다. 한씨의 남편은 봉성군사(捧聖軍師) 상사(常思)였다. 곽위는 부친의 복수를 위하여 어려서부터 상사에게 무술을 배워 무예를 익힌다.

곽위는 어른이 된 후, 계속하여 남의 밑에서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밖으로 나가기를 선택한다. 그는 큰 일을 해내고 동시에 부친의 복수를 꾀한다.

상사는 그에게 남기를 권유했지만, 곽위는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그는 여러 곳을 전전하며 최종적으로 택로절도사(澤潞節度使) 이계도(李繼韜)의 휘하에 들어간다. 이계도는 곽위의 신체가 건장하고 무술이 뛰어난 것을 보고 아주 좋아하여 그를 친병으로 거둔다.

곽위는 당시 나이도 젊고 혈기왕성했으며, 싸우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자주 다른 사병들과 싸웠다. 그러나 항상 책망받는 것은 상대편이었고, 곽위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이를 보면 이계도가 얼마나 곽위를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곽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는 성격이다. 그리하여 매번 전투에 나설 때마다 용감하게 적진으로 돌진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이계도를 구해준다. 그러자 이계도는 더욱 곽위를 중시하고 그를 친아들처럼 대했다.

곽위는 원래 유인공에 대한 원한을 생각했고, 기회를 잡아 부친의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가 손을 쓰기도 전에 유인공은 자신의 아들에게 시해당하고, 전체 유주세력이 소탕되어 버린다.

이제 곽위의 마음 속의 응어리 하나는 사라진 셈이다. 이제는 전심전력으로 이계도를 따르며 남정북전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이계도는 자신의 딸을 곽위에게 시집보내려 한다.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곽위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계도가 전사한 것이다.

이계도는 후당장종(後唐莊宗) 이존욱(李存勖)의 손에 죽었다. 곽위는 비통해했다. 그는 하늘이 왜 자신에게 이렇게 불공평하게 대하는지를 한탄했다. 자신의 부친도 전란에 죽고, 그가 부친처럼 여기던 이계도도 전란에 죽었다. 그는 왜 이렇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기실 이때는 오대십국으로 누구도 무대 위에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한명이 올라가면 다시 그를 다른 사람이 끌어내리고 올라간다. 황제의 목숨도 초개와 같았다. 하물며 황제 수하의 무장은 더할 나위도 없다.

이계도에게 승리한 후 이존욱은 그의 군대를 접수한다. 친병을 포함해서. 이렇게 하여 곽위는 이존욱의 친병이 된다. 이때 곽위의 마음 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기회를 잡아 이계도의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다리는 기회가 오기도 전에, 이존욱도 부하들이 반기를 들어 흥교문지변(興敎門之變)으로 사망해버린다.

이때의 곽위는 방향을 찾지 못하게 헤맨다. 그는 살아갈 목적을 잃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몰랐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평생 사랑 시씨를 만난다.

이존욱이 죽은 후, 곽위는 후당을 떠나, 사방을 유랑한다. 이때의 그는 뿌리없는 나뭇잎같았다. 그는 가정을 이루고 싶었고, 자신을 포용하고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가족을 원했다.

그는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그와 시씨가 처음 만난 장면을.

그 날은 큰 비가 내렸다. 그는 역도의 곁에 있는 작은 객잔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마침 시씨도 가족들과 이 작은 객잔으로 왔다.

시씨의 촐현은 곽위의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든다. 마치 암담하고 빛이 없던 세계에 돌연 색채가 생긴 것같았다. 그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원래 시씨는 이존욱의 비빈이었고, 이존욱이 죽은 후, 시씨는 집으로 돌려보내진 것이었다.

황궁의 비빈으로 뽑힐 정도면 그녀의 용모가 분명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씨도 이 젊은이를 만나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확실히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 반한다. 한 사람이 첫눈에 반하는 것은 별 것이 아니지만, 두 사람이 서로 첫눈에 반한 것이다. 이건 하늘의 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시씨는 그 자리에서 부모에게 말한다. "아버님, 어머님, 딸은 저 사내에게 시집가겠습니다." 그녀는 먼 곳에 있는 곽위를 가리킨다.

시씨의 부친은 달갑지 않았다. 곽위는 그저 가난뱅이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말리며 말한다: "딸아, 너는 어쨌든 황궁에 들어가서 황제를 모신 사람이지 않느냐. 네가 시집을 간다면 최소한 절도사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어찌 저런 가난뱅이에게 시집간단 말이냐!"

그러나, 시씨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는 비록 지금 낙백해 있지만, 장래에 분명 앞날이 엄청날 것입니다. 하물며 절도사에게 시집가는 건 별로 좋은 일도 아닙니다. 요즘 죽어나간 절도사가 얼마나 많습니까? 딸은 저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습니다."

계속 말려도 소용이 없자, 시씨의 부모는 할 수 없이 혼사에 동의하게 된다.

곽위는 자신이 사모하는 여자가 자신에게 시집오겠다고 하는 것을 듣자,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린다. 두 사람은 이 소객잔에서 간단히 혼례를 올리고, 곽위는 시씨를 데리고 떠난다. 시씨부모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처가 피살되고 곽위는 반란을 일으킨다.

비록 당시에 생활은 힘들었지만, 곽위부부의 결혼후 생활은 아주 달콤했다. 현재 곽위는 마침내 가정을 가진 것이다. 이제부터 그의 모든 것은 가족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이다.

그와 시씨는 여러 곳을 전전한다. 나중에 자신이 이전에 알고 지내던 유지원(劉知遠)이 석경당(石敬瑭)에게 중용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그는 가족과 함께 유지원에게 간다.

유지원은 곽위를 잘 알았다. 그는 곽위가 감정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았고, 처를 데리고 자신에게 왔다는 것은 상대방이 진심으로 자신을 도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곽위의 성격상 절대로 가족을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유지원은 그를 형제처럼 대한다. 유지원은 시씨를 여동생처럼 여겼다. 곽위의 아들은 유지원이 자신의 조카처럼 대한다. 두 집안의 관계는 아주 친밀했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곽위는 유지원에 충성을 다했고, 유지원의 칭제하는데 곽위의 공로가 적지 않았다.

황제에 오른 유지원도 곽위에게 보답을 한다. 곽위를 추밀부사(樞密副使), 검교사도(檢校司徒)로 봉하며, 곽위는 후한(後漢)조정에서 실권자가 된다. 그리고 유지원이 곽위에 대하여는 안심한 이유는 곽위의 뜻이 조정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곽위가 유지원에게 한 모든 것은 한편으로는 보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처자식을 위해서였다. 그는 조정의 권력쟁탈에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서 처, 자식과 어울려 놀았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아름다운 군신간에 화목한 이야기로 남는다.

곽위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나날이 계속된다면 괜찮을 것같다."

아쉽게도 그건 그저 망상일 뿐이었다. 오대십국의 난세에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건 그저 잠시의 일이다. 혼란이야말로 오대십국의 상태(常態)이다.

그동안의 전투로 유지원은 일찌감치 정력이 고갈되었다. 그는 황제에 오른 후 몇년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임종때, 그는 곽위를 고명대신으로 임명하고, 특별히 그에게 자신의 아들 유승우(劉承祐)를 잘 보좌해달라고 당부한다.

이에 대하여, 곽위는 다른 이견이 없었다. 유지원은 그와 그의 가족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그 곽위는 은혜는 반드시 갚는 사람이다. 유승우를 보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승우가 등극한 후, 곽위는 추밀사로 승진하여, 후한의 대부분 병권을 장악한다.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공로를 내세워 자만하지 않고, 모든 일에서 황제의 뜻을 따랐다.

당시 유승우는 나이가 어려 많은 무장들이 그를 무시했다. 그리하여 속속 자신의 병력을 거느리고 독자적으로 행동한다. 곽위는 조정대군을 이끌고 전후로 하중절도사 이수정(李秀貞), 영흥절도사 조사관(趙思綰), 봉상절도사 왕경숭(王景崇) 세 사람의 반란을 평정한다.

곽위의 이런 성과로 조정은 위엄을 되찾는다. 더더구나 딴 마음을 품고 있던 다른 장수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후한은 와해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

비록 조정에서의 권세는 중천에 뜬 해와 같았지만, 곽위는 그 모든 것을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계속하여 일이 있으면 일을 하고, 일이 없으면 처, 자식과 어울렸다. 그는 처자식이 더 이상 전란의 고통을 겪지 않고, 안정된 환경 속에서 생활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가 몰랐던 것은 그를 향한 위기가 조용히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유승우는 자신이 나이어려 사람들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조정의 실력파들을 매우 꺼렸다. 어쨌든 오대십국은 '천자를 돌아가면서 맡는다'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유승우가 가장 꺼린 사람은 바로 곽위이다. 어쨌든, "황제는 병력이 강한 자가 맡는다"는 것이므로 모든 무장들 중에서 곽위의 실력이 가장 강대했기 때문이다. 유승우는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게 된다.

그리하여, 유승우는 각지의 절도사들에게 밀명을 내려, 함께 곽위를 토벌하고자 한다. 동시에 사람을 보내 곽위의 일가족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황제가 자신을 꺼린다는 것을 알고 곽위는 상소를 올려 해명하고, 심지어 고로환향(告老還鄕)까지 고려한다. 어쨌든 그는 추밀사같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처자식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생각을 바꾼다. 곽위는 은원이 분명한 사람이다. 유승우가 불인하면, 내가 불의하다고 뭐라하지 말라. 곽위는 즉시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곽위가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자, 각지의 무장들이 속속 그에게 호응한다. 이들은 곽위의 명성을 흠모했거나 혹은 곽위를 따라 함께 싸운 적이 있는 장수들이다. 어린 황제와 비교하면, 곽위가 훨씬 정과 의리가 있는 사람이다.

이들의 지지하에, 곽위는 손쉽게 조정대군을 격파한다.

결국 유승우는 피살당하고, 곽위는 후주(後周)를 건립한다.

죽은 처를 생각해서 평생 다시 여자를 취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처의 조카에게 황위를 물려준다.

유승우는 죽었지만, 곽위의 처자식은 다시 살아돌아올 수 없다. 그는 황제가 된 것이 기쁘지 않았고, 오히려 하루종일 눈물로 지새운다.

다만 대신들의 계속된 권유로 그는 억지로 힘을 내기 시작한다.

곽위는 무슨 야심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가 된 후에 모든 일에서 관대하게 처리한다. 이는 오대십국시기에 보기 드문 일이다. 동시에 그는 백성들에게 도 부담을 가중시키지 않고, 모든 것은 간소하게 처리했으며, 자신도 낡은 옷을 기워서 입었다.

그리고 처 시씨를 위해 곽위는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 시씨를 황후로 추봉한다.

이건 별 것도 아니다. 유사한 일이 고대에는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관건은 그후 곽위가 다시 다른 황후를 책봉하지 않은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황후의 자리는 오로지 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사랑하는 처 시씨이다.

그리고, 곽위는 비록 일부 비빈을 두었지만, 후궁을 장식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는 시씨이외의 다른 어떤 여자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곽위의 이런 전정(專情)은 고대에 아주 드문 일이다. 황제중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어쨌든 황제는 왕왕 후사를 이을 것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곽위는 원래 황위에 흥미가 없던 사람이고, 그는 그저 처와 지내고 싶었을 뿐이다.

두번째 일은 바로 시씨의 후손을 찾아서 그들을 궁안으로 데려와 잘 대우해준다.

시씨집안은 그다지 큰 집안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방의 호족이다. 그래서 인원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 한 소년이 곽위의 눈에 들어온다.

그는 바로 시씨의 조카인 시영(柴榮)이었다. 혈통을 놔두고 본다면, 시영은 문도무략에 정통했고, 황위계승자로서는 최선의 후보였다.

그리고 곽위는 굳이 아들을 낳아서 황위를 계승하게 할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황위를 처의 조카에게 전해준다. 이런 흉금, 박력은 일반인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954년, 곽위는 죽은 처를 그리워하다가 큰 병이 들어 병석에 눕고, 결국 세상을 떠난다. 임종때, 그는 특별히 시영에게 당부한다: "내가 죽은 후, 황후와 함께 묻어달라. 그외에 너는 좋은 황제가 되어라.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이 전란의 시대를 끝내라."

시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즉위후, 모든 것을 곽위가 당부한 대로 처리했다. 그의 통치하에, 후주는 국부민강하게 되었고, 절도사들은 조정에 대항할 실력을 잃는다. 모든 것은 곽위가 바라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영은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성공을 거의 거둘 수 있는 시점에. 결국 오히려 조광윤이 과실을 챙기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이미 곽위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곽위가 신경쓰는 것은 영원히 처 시씨와 함께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