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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무협작가 예광(倪匡)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by 중은우시 2025. 3. 27.

글: William Leung

홍콩의 저명한 무협, 판타지작가, 영화극작가 예광이 이전에 돌아가셨을 때, 삼안양지(三岸兩地)에서 복잡한 감정들이 나타났다. 개인의 성취로 보자면, 예광은 홍콩문화발전의 황금시대에 이름을 떨쳐, 그 시대를 이끈 중요한 인물중 하나이다. 홍콩문화가 당시 강력하게 외부로 뻗어나갔기 때문에, 예광의 작품은 전세계 중국계의 공동기억이 되었다. 위사리(衛斯理), 육지금마(六指琴魔), 독비도(獨臂刀), 원진협(原振俠)등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름이다. 예광 선생이 자랑스러워하던, "여러번 장철(張徹)을 대신하여 극본을 써주었고, 일찌기 김용(金庸)의 소설을 대필했다"는 개인이력소개가 있다. 이들은 공동으로 중국인세계에 거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다만, 글을 쓰는 데 있어서의 재능이 뛰어난 점 이외에, 예광은 또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레테르가 붙어 있다. 그것은 바로 확고하게 '반공'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사후 그에 대한 평가는 양극화되게 된다.

홍콩, 대만 그리고 다른 나라의 중국인들은 예광의 별세에 깊은 유감을 표했고, 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러나 유독 중공이 통치하는 중국대륙에서는 그가 대륙을 떠난 후 반공신념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입장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중공의 충성스러운 호위무사들은 그를 공격했다. 그리고 유언비어까지 만들어 예광 선생에 대한 악독한 인신공격을 감행한다. 심지어 예광선생의 소설, 영화계의 성취와 공헌은 모조리 부정하며, 예광의 별세를 세상사람들은 통쾌해 한다고까지 말했다. 중국인들은 돌아가신 분을 받든다는 신조를 수천년간 유지해 왔지만, 중공의 충성스러운 부추들에게 그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고, 주인의 권세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예광선생은 생전에 널리 교유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그의 별세이후 적지 않은 문화오락계 유명인사들이 추도글을 실어 존경을 표시했다. 비록 이들의 추도글에 정치적 의미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지만, 펀홍(粉紅)들의 불만을 불러와 이들 유명인사들에 대하여도 공격을 감행하며,'홍콩독립(港獨)'이라는 레테르를 붙인 후에 만족하여 흩어진다.

죽은 사람 한명에 대하여 중공의 호위무사들이 이처럼 크게 화를 내게 만들었다는 점만 보더라도, 예광선생이 필생을 지켜온 가치인 반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한다고 할 것이다. 필자는 심지어 이렇게 생각한다. 예광선생은 중공의 이슈에 있어서, 세상사람들에 대한 예언이며 경고이다. 이는 그가 우리에게 남긴 소설이나 영화보다도 훨씬 가치가 큰 유산이라고 할 것이다.

예광은 홍콩의 토착인은 아니다.예광은 광동말도 그다지 잘 하지 못했다. 그래도 광동어프로그램을 주재할 수 있었고, 그 누구도 그가 홍콩인이 아니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예광은 상해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열혈이 비등하며, 한 마음으로 구국을 생각한 중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중공이 정교하게 포장하고 대외적으로 선전한 진보, 평등, 자유,민주의 이미지에 속아서 학교를 퇴학하고 중공에 가입한 바 있다. 그는 먼저 화동인민혁명대학에서 훈련을 받았고, 나중에 공산군에 들어가 하급장교가 된다. 중공내부에서, 예광은 원래 공산군이 세상사람들을 속이던 관병평등(官兵平等, 장교와 사병은 평등하다)이 거짓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공산군내부에서도 등급차이는 분명했고, 특권이 횡행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상검증보고는 성격상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던 예광을 크게 실망시킨다.

예광이 중공의 마조(魔爪)를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정말 사소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당시 예광은 몽골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현지의 겨울은 날씨가 매우 추웠다. 바람과 눈이 온 하늘을 뒤덮었고, 연료공급에 영향을 끼친다. 예광등은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다. 예광의 주둔지 부근에는 작은 시냇물이 흘렀는데, 작은 시내에는 간이한 나무다리가 있었다. 한겨울에 이미 시냇물은 동결되어 나무다리는 필요없게 되었다. 예광은 그리하여 먼저 나무다리를 해체하여 난방을 하여, 추위를 넘긴 후에 다시 나무로 다리를 지으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사람목숨이 더욱 중요한 것이니까. 그러나, 그의 합리적으로 보이는 거동에 대하여 반혁명죄라는 죄명을 씌워버린다. 원인은 아마도 예광이 이전에 길렀던 개가 현지의 공산당서기를 물어, 서기가 그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무한히 확대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친구가 미리 귀뜸을 해주어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예광은 도망가기로 결정한다. 예광은 신붕증과 도장을 위조하여 먼저 말을 타고, 다시 기차를 타고 남하하여 광주로 간다. 마지막에는 마카오를 거쳐 홍콩으로 밀항한다. 당시의 홍콩영국정부는 이미 홍콩에 도착한 중국난민에 대해 관용적이었고, 밀항하여 넘어오기만 하면 신분증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예광은 홍콩공민이 된 것이다.

예광의 밀항은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다. 당시 중공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조치들을 취하고, 인간본성을 말살하는 시정을 펼쳐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어서, 중국에서 홍콩으로 밀항하는 난민이 백만이 넘었다. 오늘날의 이초인(李超人, 리카싱(李嘉誠)을 가리킴), 애플데일리의 오너인 리즈잉(黎智英)등의 인물들도 당시 모두 밀항한 난민들이었다. 그들은 맨손으로 시작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홍콩의 자유로운 환경 덕분에 상업계의 거물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홍콩인은 아마 최소 절반이상이 중국난민의 후손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광의 독특한 점은 그가 밀항할 용기를 가졌다는데 있지 않고, 그에게는 외부환경이 어떻게 바뀌든지 간에, 중공이 본질을 꿰뚫어보는 지혜를 가졌다는 점에 있다. 생사를 도외시하고 홍콩으로 밀항한 중국난민들은 절대다수가 예광과 마찬가지로 중공의 잔혹과 악독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부득이하게 밀항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대다수는 일단 어느 정도 편안하게 사는 시기가 지난 후에는 서서히 예전의 고난을 잊어버리고, 한차례 또 한차례 중공의 선전과 거짓말에 속아넘어가게 된다.

1978년, 중공은 개혁개방을 선언했다. 이로 인하여 상처가 낫고 고통을 잊은 홍콩난민들은 조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간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홍콩자본이 중국외자의 절반을 차지했다. 나중에 홍콩의 미래문제가 전면으로 등장했을 때, 등소평(鄧小平)이 홍콩의 각계대표를 만나서, 민주회귀를 약속하고, 일국양제가 오십년불변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때 이미 홍콩의 최고부자가 된 리카싱은 고향으로 돌아가 투자하고, 전전긍긍하면서 등소평에게 물었다. 50년후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등소평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오십년동안 바뀌지 않았으니, 오십년후에는 더더욱 바뀌는게 불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건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견실한 약속이고, 홍콩인의 민심을 크게 안정시켰다. 그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믿었을 것이다. 중공이 정말 바뀌었다고. 중공이 정말 서서히 개방을 하고, 민주, 자유, 다원사회로 나아가고 있다고. 같은 홍콩의 저명한 작가이자 예광과 같은 고향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취에 있어서는 예광보다 위라고 볼 수 있는 김용은 최고지도자를 만나본 후, 중공이 자신의 부친을 죽인 원수라는 것도 잊고, 중공과 협력하여 소위 기본법기초위원회에 들어간다. 그리고 소위 민주회귀를 한 마음으로 기대한다. 김용선생은 아마도 당시 홍콩의 주류의견을 대표한다고 할 것인데, 다시 한번 중공의 교묘한 말장난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일찌감치 1983년, 당시의 예광은 이미 그의 소설 위사리시리즈의 <추룡(追龍)>에서 이를 경고한 바 있다. 예광은 은유적으로 지적했다: 동방의 한 대도시가 곧 훼멸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쓴다: "하나의 대도시를 훼멸시키려면, 그건 반드시 천재지변때문만은 아니고, 인재로도 생길 수 있다. 인재는 반드시 전쟁만이 아니고, 몇 사람의 몇 마디 말, 몇 사람의 우매무지한 행동도 대도시를 철저히 죽여버릴 수 있다. 대도시의 건축물을 파괴할 필요도 없다. 대도시의 여하한 주민도 죽일 필요도 없다. 심지어 겉으로 보기에는 이 대도시가 예전과 완전히 같지만, 도시의 원래 장점은 상실되어버리고, 그것을 훼멸시켜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예광은 나중에 직설적으로 말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홍콩이라고. 지금 보면, 예광선생이 1980년대에 겉으로 보기에는 중공이 개명해 보이던 시기에도 이미 완전히 깨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좋은 시기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1989년 중국내부의 학생운동이 벌어지고, 학생들이 반관도(反官倒), 반탐부(反貪腐), 요민주(要民主), 요자유(要自由)를 외쳤다. 홍콩의 상하도 고무되어, 모두 중국의 민주전환이 이제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겼따. 오직 예광만이 정곡을 찔러서 말했다: "학생항쟁에서 심지어 '공산당타도'이라는 구호조차 내놓지 않았지만, '반혁명폭동'이라고 규정하는데, 이후 중국이 홍콩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실로 생각하기조차 두렵다." 나중에 중공은 과연 총으로 진압했고, 홍콩인은 다시 한번 원래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한떄 민주회귀에 열중했던 김용선생은 더더욱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후회해 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6.4도살이후, 홍콩에서는 이민붐이 일어난다. 당시 사람들은 1997년을 홍콩의 "구칠대한(九七大限)"이라고 보았다. 국제제재와 우려가 속속 나타나면서, 중공은 이때 다시 기만한다. 등소평은 1992년 남순강화를 시작하고, 개혁은 뒤돌아가지 않는다, 누구든 개혁에 반대하면 그는 하야해야 한다고 말하고, 내부에서 졸렬한 연극을 벌이면서 세상사람들을 속였다. 같은 해, 예광선생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그러면서 더욱 직설적으로 말한다: "공산당이 다 죽어버리지 않으면, 나는 돌아오지 않겠다." 다른 문예계의 주요인사들과 비교하면, 예광의 반공의 길은 확고하고 굳건했다. 그는 단지 한번만 속았다. 다시는 속지 않았다. 실제로, 중공은 시종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홍색강산이 천추만대를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이 목표를 거스를 수 없다. 만일 거스른다면 아무런 망설임없이 죽여버릴 것이다.

홍콩은 한동안 정적이 흘렀고, 중공도 조금은 유연해진 것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들은 다시 얼마전에 발생한 참극을 잊었다. 당시의 가왕 허관걸(許冠傑)은 "화지니97(話知你97)"이라는 노래를 썼다. 설사 홍콩주권이 이전되더라도 뭐 겁낼 것은 없으며, 홍콩은 이전과 똑같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서서히 홍콩시민계층의 목소리를 대표하게 된다. 예광은 당시 전혀 망설임없이 지적했다: "과거 몇년 여러분들은 환상을 가졌따. 공산당통치를 받아들이더라도 별 것이 아닐 것이라고. 최악의 일은 아닐 것이라고. 왜냐하면 과거 몇년간 중공은 이런 거짓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아주 진보된 것처럼, 아주 개방된 것처럼, 개혁을 위해 계속 노력하면서 중국을 좋게 만들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현재(64도살), 가면을 완전히 벗어버렸다." 아쉽게도, 그가 당시 생각지 못했던 것은 설사 중공의 가면이 한번 또 한번 벗겨지더라도, 그들은 다시 새로운 가면을 시대에 맞게 고쳐쓰면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 속으로 환상을 품고, 반항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계속하여 중국의 연극에 호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97년이후에도 홍콩이 바뀌지 않은 것처럼 생각했고, 이후에도 역시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다시 홍콩으로 되돌아갔다. 홍콩인들의 이런 환상은 2014년이 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리즈잉조차도 08년이전까지는 당과 국가를 사랑했고, 당과 국가가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진보할 것이라고 믿었었다.

예광은 중국을 떠난 후, 더 이상 중공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대륙에 한발짝도 내딛지 않았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예광은 이런 말도 했었다고 한다: "기녀(妓女)도 공산당보다는 믿을 만하다." 그러나, 예광은 바로 우스개처럼 말한다: "기녀와 공산당을 비교한 것은 근본적으로 기녀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는 은연중에 중공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다. 그는 1994년에 출판된 위사리 시리즈 <틈화(闖禍)>라는 책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천성적으로 노예근성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다. 이런 상황이 반세기동안 지속되었는데,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앞에서 굴복하며 온갖 추악한 짓을 하는 사람들은 바퀴벌레보다도 역겹다." 그는 더더욱 일국양제를 믿는 사람은 너무 천진난만하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홍콩이 중공의 통치를 받은 후, 공산당은 자신의 통치원칙이 있다. 현재 사람들이 일국양제가 파괴될 것이라고 토론하는데,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들이 너무 천진난만하다고 말한다....나는 근본적으로 일국양제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무슨 파괴니 아니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런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산당이 말하면 끝이다. 그런데 무슨 일국양제냐. 일국양제는 공산당이 말하는 것인데, 공산당이 말하는 것을 언제 믿을 수 있었던가?" 그는 애국을 하려면 반드시 반공해야한다고 말했다. 반공이야말로 애국이라는 것이다. 그는 일찌기 홍콩의 펀홍들에게 그가 중국인인지 아닌지, 애국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질문을 받은 바 있다. 예광의 답은 이러했다: "나는 당연히 중국인이다. 나는 당연히 애국한다. 만일 애국하지 않는다면 반공해서 뭐하겠는가?"

그러나, 예광은 자신도 "만절불보(晩節不保)"했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의 부인은 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홍콩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부인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예광은 부득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맹세를 깨고, 홍콩으로 돌아와 거주하게 된다. 그는 부득이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소위 '아녀정장(兒女情長), 영웅기단(英雄氣短)"(아녀자같은 애정이 많고, 영웅의 기개가 적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이미 유감이 없다. 생사도 도외시했는데, 뭐가 더 겁나겠는가. 예광의 지명도와 통일전선전술의 가치를 생각하여, 중공의 고관들은 계속 예광이 대륙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고층빌딩을 보여주면서 중공의 통치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예광의 태도는 확고했다. 그는 우스개처럼 대답한다: "만일 5명에서 10명의 진정한 '반공작가'를 모아서, '반공작가귀국고찰단'을 조직한다면' 가겠다고. 중공도 할 수 없이 포기하게 된다.

예광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바로 한 부의 '중공반구복설사(中共反口覆舌史)'이다(반구복설은 광동말로 약속위반이라는 뜻이다). 그가 예언한 많은 중공에 관한 말은 유감스럽게도 증명된다. 그래서, 그는 중공을 가장 잘 아는 중국인중 한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광의 멋진 글들은 세상사람들에게 좋은 계시가 된다. 그것은 바로 중공이 뭐라고 말하든, 모두 믿지 말라는 것이다. 자유세계에서 생활하는 사람이건 아니면 중공통치하에서 생활하는 사람이건 각성하지 않으면, 그저 전철을 되밟을 수밖에 없다. 홍콩의 경험은 '후인들이 애통해 하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다시 그 후인들로 하여금 다시 애통해하게 만들게 된다'는 철칙과 비극이다. 자유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중공의 침입과 삼투를 막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광이 남긴 가장 고귀한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