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最愛歷史)
1688년 1월 부무부타이(布木布泰)라는 이름의 몽골족 할머니가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대청제국의 조야는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 할머니는 당시 재위하고 있던 강희제(康熙帝)의 할머니로, 나중에 사람들은 그녀의 시호에 근거하여 습관적으로 그녀를 "효장태후"라고 부른다.
죽기 전에, 효장은 자신을 계속 모셔온 강희제를 쓰다듬으면서 말한다: "나의 마음은 너의 황부(皇父)와 너를 그리워하니, 차마 멀리 가지 못하겠구나!"
강희제는 효장을 안장하지 않고, 효장이 생전에 거주하던 전각을 해체하여 순치제의 능묘 풍수장(風水墻) 바깥에 다시 건축하고, "잠안봉전(暫安奉殿)"이라고 이름붙인 후, 효장의 관을 그곳에 안치한다.
그렇게 37년이 흘렀다. 옹정3년, 효장의 관은 비로소 지궁에 들어가니, "소서릉(昭西陵)"이라 칭한다. 소서릉은 효장의 남편인 홍타이시(皇太極, 청태종)의 성경(盛京)에 있는 소릉(昭陵)에서 수백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하나의 오래된 스캔들이 효장의 매장문제로 인하여 다시 한번 널리 퍼지게 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효장이 입관(入關, 산해관을 들어와 북경을 점령한 것을 가리킴)후 홍타이시의동생이자 섭정왕인 도르곤(多爾衮)에게 시집간 바 있다. 그래서 사후에 홍타이시와 같이 묻히지 못한 것이고, 아들과 손자에게서 멀리 떨어지기 싫다는 이유를 붙여 청동릉(淸東陵)에 남아있게 된 것이라고.
지금까지 300여년이 흘렀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거론하는 것은 여전히 효장을 둘러싼 스캔들이다.
그러나, 두 소년황제를 보좌한 효장태후가 실질적으로 "대청제일여강인(大淸第一女强人)"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효장과 홍타이시의 혼인은 그 자체로 불가사의한 색채가 있다.
홍타이시는 평생 15명의 후비를 거느렸고, 효장은 방대한 처첩들 중 한명이다. 그녀는 13살에 34살의 홍타이시에게 시집왔다. 시집올 때 홍타이시는 이미 3명의 처가 있었다. 그중 1명은 효장보다 15살이 많은 그녀의 친고모였다. 나중에 홍타이시의 정궁황후(正宮皇后)가 되는 효단(孝端)이다. 즉, 효장은 실제로 자신의 고모부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효장에게는 언니인 하이란주(海蘭珠, 즉 신비(宸妃))도 나중에 홍타이시에게 시집을 갔다.
고모와 조카 3명이 한 남편을 모신 것이다. 이런 혼인관계는 당시의 한인사회라면 일찌감치 패륜으로 인식되었겠지만, 몽골, 만주등 유목민족들에게는 혼인에 있어서의 금기사항이 아니었다. 남녀쌍방이 서로 다른 씨족이기만 하면 혼인이 성립될 수 있고, 배분은 그들의 윤리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
효장이 고모와 조카 3명 모두 홍타이시에게 시집을 가게 된 더욱 근본적인 원인은 부족간의 혼인연맹필요성이다.
누르하치는 말년에 여진의 각 부락을 통일한 후, 몽골부락과 연맹을 맺어 명나라를 함께 공격하고자 한다. 효장의 출신부족은 커얼친몽골부락이다. 건주여진과 가장 가까이 있었으므로 가장 먼저 누르하치와 군사동맹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혼인은 군사동맹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유대였다.
통계에 따르면, 청나라가 입관하기 전에, 커얼친몽골과 만주족황실과의 정략결혼은 33차례 있었다. 21명의 여자가 만주족황실로 시집오고, 만주족황실의 여자 12명을 취했다.
1636년, 홍타이시가 성경에서 황제에 오른다. 국호는 대청이라 하고, 후궁제도를 건립한다. 15명의 후비들 중에서 5명을 독립된 궁전에 거주시키는 "오궁제(五宮制)"를 취한다. 커얼친몽골에서 온 고모와 조카 3명은 모두 오궁의 구성원이 된다. 그중 효단은 정궁황후의 지위에 오른다. 이를 보면, 몽골부족과 만주족황실간의 관계가 얼마나 단단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효장은 오궁 중에서 서열이 가장 낮았다. 그리고 그녀의 언니인 신비는 홍타이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 1637년, 신비는 홍타이시와의 사이에 사내아이를 낳는다(황팔자). 그리고 황팔자는 낳자마자 후계자로 책봉된다. 1년여가 지난 후, 이 사내아이는 불행히도 요절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효장이 아들 푸린(福臨, 황구자)을 낳는다. 그러나, 이 황구자는 홍타이시로부터 그다지 총애를 받지 못한다.
효장은 그후 더 이상 자식을 낳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의 언니인 신비는 1641년에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효장의 첫번째 스캔들식의 전설은 대체로 이때 나타났다. 1642년, 명나라의 계료총독(薊遼總督) 홍승주(洪承疇)를 포로로 잡았는데,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민간전설에 따르면 효장이 나서서, 미색과 인삼탕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는 말로 홍승주를 설득하여 청나라에 투항하게 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청나라의 입관전 정치방식을 조금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군사를 위주로한 제도에서 여하한 여인(황제의 여인을 포함하여)도 정치에 개입할 여지나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이와 반대되는 사례는 누르하치가 병사한 후, 강력한 황비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누르하치의 대비(大妃) 즉 도르곤의 생모가 홍타이시를 포함한 만주의 여러 왕들의 핍박하에 순장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홍타이시가 재위하는 동안 후궁이 군사, 정치에 참여할 가능성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효장이 나중에 순치, 강희 두 황제때의 행동을 보고, 이 여인은 대단하며, 역으로 생각하여 그녀가 홍타이시 시기에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고, 심지어 그가 홍타이시를 보좌하여 천하를 얻는데 힘을 보탰다고까지 추측한 것에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건 역사적인 상황을 벗어난 헛소리에 불과하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이 여자가 능력이 있다고 여기면서도 또한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계속 여성의 몸과 자색을 가지고 얘기한다. 겉으로는 이 여성을 찬양하는 것이지만 자세히 곰씹어보면 그녀를 극히 폄하하는 것들이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청나라가 입관하기 전에, 효장은 만주황족정치에 참여할 가능성이 없다. 하물며, 그녀는 홍타이시가 가장 총애하는 여인도 아니었고, 의사결정권의 핵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쉬는 시간에 충전하는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효장은 자질이 총명하고 "다른 취미는 없고 유독 역사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책을 좋아하는 것은 그녀의 큰 장점이다. 당시 만주황족은 모두 <삼국연의>를 즐겨 읽었는데, 그녀도 따라 읽으면서, 거기에서 모략을 배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천부적인 자질에 공부를 좋아한다. 이 두 가지 특징은 그녀가 나중에 역사의 기회를 받았을 때 여강자로 굴기할 수 있었던 주요원인이다. 전통적으로 인식해온 미색이나 미모가 아니라.
2
1643년, 홍타이시는 청군이 입관(入關)하기 직전에 급사한다. 죽기 전에 후계자를 정해놓지 못했다. 그리하여 대청의 황위계승자가 누가 되느냐가 팔기내부쟁탈의 촛점이 된다.
최종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효장의 아들이며, 나이 겨우 6살인 푸린(福臨, 나중의 순치제)이 즉위한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에 기하여 효장 모자가 최종승자라고 본다. 효장은 이번 황위쟁탈전에서 수완을 펼쳤으니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계속하여 그녀의 스캔들을 얘기하면서 그녀가 같은 30살가량의 홍타이시의 동생인 황위의 유력경쟁자인 도르곤과 감정이 있었고, 감정공세를 펼쳐 도르곤으로 하여금 황위쟁탈전에서 물러나게 하고, 나이어린 푸린의 즉위를 지지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상은 어떠한가?
효장은 후궁에 있고, 게다가 만주황실은 입관전에 후궁의 정치간여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에 효장에 관한 사료는 거의 제로였다.
당시의 팔기제도를 보면, 각 기는 각자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기주(旗主)를 황위승계인으로 만들고자 했다. 각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상황하에서 홍타이시가 죽은지 6일이 지났지만, 팔기 기주들은 법정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결국 절충방안을 취하여 긴장상태이던 내부권력투쟁은 완화된다.
이미 고인이 된 상홍규(商鴻逵)의 분석에 따르면, 홍타이시가 죽은 후, 그의 14째동생인 예친왕 도르곤과 그의 장남인 숙친왕 하오거(豪格)는 당시 한창 나이였고, 또한 각자 자신의 기로부터 추대를 받아서, 두 사람간에 대치상태를 이룬다.
하오거는 홍타이시가 생전에 직접 이끌던 양황기(상황기, 정황기)와 정남기의 지지를 받는다. 도르곤은 양백기(상백기, 정백기)의 지지를 받느다. 상남기의 기주인 지르하랑(濟爾哈朗)은 세력이 가장 약했다. 그리하여, 양홍기(상홍기, 정황기)를 장악한 예친왕(禮親王) 다이샨(代善)의 태도가 특히 중요했다.
다이샨은 홍타이시의 형이고, 일찌기 홍타이시와 황위를 다툴 자격이 있었으나 양보했었다. 그리하여 그는 명망이 아주 높았다. 다이샨의 아들이 그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이미 예왕(도르곤)을 옹립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이샨은 그저 '허허'라는 말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하에서, 도르곤은 자신이 다수의 기수, 대신들로부터 지지받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차선책을 강구하여, 홍타이시의 아들중 나이가 어린 푸린으로 하여금 황위를 승계하도록 한다. 이 제안은 일석삼조라 할 수 있었다: 첫째, 홍타이시의 아들을 선택함으로써 양황기와 정황기의 이익이 보호될 수 있으니, 그들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홍타이시의 막내아들을 세워 장남 하오거를 황위쟁탈전에서 물러나게 만든다. 셋째, 어린 황제가 즉위하면 섭정이 필요하다. 도르곤은 섭정왕의 자리를 차지해서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
과연, 이 절충방안이 나오자, 널리 환영받는다. 푸린은 운좋게 선택되어 대청이 입관한 후 첫번째 황제가 된다.
다만, 홍타이시는 일생동안 11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왜 굳이 푸린을 세웠을까? 설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푸린의 모친인 효장이 도르곤과 감정관계가 있어서 이루어진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진실한 역사는 그렇지는 않다.
홍타이시의 11명 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남 하오거와 당시에 이미 사망한 황2자, 황3자, 황8자를 제외하고, 서비(庶妃)가 낳은 황4자, 황5자, 황6자, 황7자, 황10자를 제외하면, 진정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는 "오궁"후비의 황자는 오직 두명이다. 효장이 낳은 황9자 푸린과 인지궁귀비(麟趾宮貴妃)가 낳은 황11자이다.
그러나, 인지궁귀비의 신분은 비교적 복잡하다. 그녀는 원래 만주의 정치적 적수인 차하르몽골 린단칸(林丹汗)의 비였다. 린단칸이 홍타이시에게 격패당한 후, 그녀는 전리품으로 홍타이시의 후궁이 된다. 이런 신분에 기하여, 그녀의 아들은 다른 기주들로부터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결국, 푸린만이 유일하게 적합한 후보라 할 수 있었다.
이를 보면, 푸린이 대통을 계승한 일은 팔기의 역량이 상호견제한 결과였다. 효장이 힘을 쓸 여지는 없었다.
사람들이 한 사람을 칭송할 때, 왕왕 그/그녀의 모든 과거경력을 재구성하여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다. 효장이 일부 사학자에 의하여 당연히 아들의 황위계승과정에서 비범한 모략을 시전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기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한 사람의 위대함은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될 필요는 없다. 그저 어느 시간대 혹은 심지어 어느 순간에 위대함을 보여주면 충분한 것이다.
사실대로 위대함을 드러내기 전의 무능함이나 무력함을 쓴다고 하여, 그 역사인물의 이미지를 훼손시키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 사람을 더욱 진실되게 보여줄 수 있다.
3
설사 효장이 황태후의 신분으로 자금성에 진주한 후에도, 아주 오랜 기간동안, 그녀는 여전히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도르곤이 섭정한 7년동안, 이 정치, 군사강자는 대청의 통일대업에서의 일련의 승리를 거두면서 개인의 명망과 권세가 급격히 제고된다. 봉호도 "숙부섭정왕"에서 "황부섭정왕"으로 바뀐다. 그의 정치적 적수인 하오거는 연금되었다가 죽는다. 공동으로 보정(輔政)하던 지르하랑도 죄를 뒤집어 씌워 제거한다.
도르곤의 권력이 천하를 뒤흔들 때는 실제로 그가 이미 대청황권의 유일한 대리인이 되었다.
이 7년간, 효장은 어쩔 수 없이 나이어린 푸린과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다. 이는 확실히 도르곤이 효장이 황제를 이용하여 정치에 간여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효장모자는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그저 꾹 참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도르곤 생명의 마지막 한 해 즉 순치7년(1650년)에 강남에서는 효장태후가 도르곤에게 시집갔다는 추문이 돌았다. 지금까지도, 사학계는 이 사건에 대하여 아직 최종적인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이는 대청 입관후의 첫번째 의안(疑案)이라 할 수 있다.
추문은 남명의 반청투사 장황언(張煌言)이 쓴 시에서 비롯되었다:
상수상위합근존(上壽觴爲合卺尊)
자녕궁리난영문(慈寧宮裏爛盈門)
춘궁작진신의주(春宮昨進新儀注)
대례공봉태후혼(大禮恭逢太后婚)
시에서 묘사하는 것은 효장태후가 살고 있는 자녕궁에서 거행된 혼례광경이다. 사람들은 이를 효장이 도르곤에게 시집갔다는 증거라고 믿는다. 그외에 다른 증거도 있다:
도르곤을 "황부섭정왕"으로 존칭했는데, 이는 효장이 개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순치는 그를 "황부"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주족이 입관하기 전에는 아직 형사취수의 혼인습속이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효장이 도르곤에게 시집갔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런 일련의 증거는 마치 효장태후가 도르곤에게 시집갔다는 것을 확실하다고 말하는 것같다. 청사전문가인 상홍규도 이렇게 본다: "효장은 일찌기 도르곤과 결혼했다. 이 일은 확증이 부족하긴 하지만, 흔적들은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효장이 아들의 황위안전을 위한 것이고, 임기응변할 수 있어서, 정치적 수단이 고명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다만, 맹삼(孟森), 정천정(鄭天挺)등 저명한 역사학자들은 효장이 도르곤에게 시집갔다는 이야기는 순전히 근거없는 말이라고 본다. 그들은 이렇게 지적한다. 장황언은 반청인사이고, 시는 소문을 가지고 청나라의 난륜을 조롱하는 것이어서, 역사증거로 삼을 수 없다. 순치제가 도르곤을 "황부"로 존칭한 것은 고대에 "상보(尙父)"라고 존칭하는 것처럼 순치제가 부친으로 인정한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기실 우리는 일련의 역사적 세부사항을 통해, 효장이 시집가지 않았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효장이 거주하는 자녕궁은 순치10년(1653년)에 이르러 비로소 완공된다. 그후 효장태후가 들어가서 살게 된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도르곤이 죽은지 3년이 지난 후이다. 이를 보면 장황언이 말한 자녕궁대혼광경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한가지 가능성은 도르곤이 순치7년 정월 강제로 하오거의 미망인을 취한 것이다. 이 혼사가 장황언이 살고있는 절강동부까지 전해지면서, 일찌감치 도르곤이 황태후를 취했다는 추문으로 변형되었을 수 있다. 장황언은 더 이상 증거를 찾아보지 않고, 소문에 기해 효장태후가 시집갔다는 시를 지어 청나라황실을 풍자한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사실의 진상에 가까운 해석이 아닐까 싶다.
순치7년, 겨울, 39살의 도르곤이 돌연 새북(塞北)에서 사냥하던 도중에 죽었다.
도르곤이 죽은 후, 효장은 여러해동안 꾹 참아왔던 여강인(女强人)의 이미지를 진정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해에 순치제는 겨우 13살이었다. 아직 소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르곤에 대한 청산작업은 황제의 명의로 진행되었지만, 실제로는 효장이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효장의 계획에 따르면, 도르곤의 영구가 북경으로 돌아온 후, 순치제는 먼저 조서를 내려 국장을 거행한다. 이어서 명을 내려 그의 왕부에서 옥새(玉璽)를 회수한다. 10여일후에는 친정(親政)을 선포한다. 겨우 2달이 지난 후에 정친왕(鄭親王) 지르하랑(濟爾哈朗)이 도르곤의 황위찬탈혐의를 고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도르곤의 역사청산사건이 서막을 연다. 도르곤은 결국 작위를 박탈당하고, 분묘가 파헤쳐진다. 이 과정에서 효장은 뇌려풍행(雷厲風行)했다. 도르곤을 타도함으로써 소년순치의 권위를 수립하고, 황권을 공고히 했다.
이때 조정은 알아차린다. 원래 침묵으로 일관하던 황태후가 이처럼 과감하고 대단한 여자라는 것을.
1659년, 정성공(鄭成功)이 장황언과 연합하여 북벌항청을 시작하여, 한때 남경이 함락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순치는 이 소식을 듣고, 관외로 물러날 생각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효장은 순치제에게 나약해서는 안된다고 질책한다. 이를 보면 효장은 강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장이 옛날 정략결혼할 때, 커얼친몽골에서 만주황실로 시집왔다. 이제 그녀는 계속하여 이 정략결혼의 네트워크를 이어가야 했다. 순치제때, 그녀가 주재한 혼인은 20건이 넘는다. 순치제의 두 명의 황후도 효장의 친정 조카딸과 조카손녀딸이었다.
그외에 효장은 정략결혼의 방식으로 일부 권신들과 손을 잡았다. 예를 들어, 그녀느느 자신의 조카손녀딸을 정친왕 지르하랑의 아들 지두(濟度)에게 시집보낸다. 그리하여 지두와 순치제는 인척관계가 되고, 지르하랑의 가족은 더욱 마음을 다하여 막 친정을 시작한 소년순치를 보좌하게 된다. 당시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던 한족 왕인 오삼계(吳三桂), 상가희(尙可喜), 경정충(耿精忠)등에 대하여도 효장은 역시 정략결혼의 수단으로 통제했다. 이 정략혼인네트워크는 나중에 중대한 사건시 대체불가능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효장도 정략결혼의 쓴맛을 보아야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장한 순치제는 모친인 효장과 조화하기 힘든 갈등을 겪게 된다. 폭발점은 순치제가 효장이 선택한 황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애정이 없었다. 그가 사랑한 여인은 자신의 동생의 미망인인 동악비(董鄂妃)였다. 이번 애정사건으로 인하여 순치지는 오랫동안 모친 효장을 보러 가지 않게 된다.
최근 들어 어떤 학자는 효장과 순치간의 모자갈등에서 아들의 혼사는 그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더욱 심층적인 원인은 두 사람의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는데서 찾는다. 순치제는 어른이 된 후, 유가문화의 영향을 받아, 조정에서 한화개혁을 추진한다. 이는 효장을 위시한 수구파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모자관계가 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1660년 동악비가 불행히도 사망한다. 애정과 정치에서 이중타격을 받은 순치제는 의욕을 잃고 불문에 귀의할 생각을 한다.
다음 해, 순치제는 우울한 가운데 천연두에 걸려 병사하니, 향년 24세이다.
효장은 비통하기 그지없었고, 순치제의 장례식에서 "극히 슬프게 곡을 했다(哭極哀)" 그녀는 영원이 자신의 유일한 자식을 잃은 것이다.
4
그러나, 감정상의 비통은 효장의 이성적인 행동을 막지는 못했다. 대청은 다시 한번 권력교체에 직면했고, 이번에 그녀는 국외인이 아니라, 바로 결정권자였다.
친왕들과 의견을 나눈 후에, 그녀는 신속히 두 가지 결정을 내린다:
첫째, 황위계승자를 확정한다. 순치제는 병사하기 전에 자신의 당형제(堂兄弟)로 하여금 황위를 잇게 하려 했다. 그러나 효장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순치제의 셋째아들이며, 나이 겨우 8살의 현엽(玄燁, 즉 강희제)이었다. 이유는 현엽이 이미 천연두를 앓아서, 이 공포스러운 전염병에 면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둘째, 순치의 유조(遺詔)를 발표한다. 이건 '궤이'한 유조이다. 1000여자에 달하는데, 순치제가 친정한 이래 청나라조정의 한화(漢化)를 추진한 것을 포함한 14개의 '죄상(罪狀)'을 나열한다. 마치 순치제가 임종전에 참회서를 쓴 것처럼. 공직적으로 이 유조는 순치제가 임종전에 구술한 것이고, 대신이 눈물을 흘리면서 받아쓴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효장이 대폭 수정한 것이다. 효장은 아들의 입을 빌어, 아들의 행위를 부정했고, 이를 통해 모자간의 정치적견해차이는 마침표를 찍게 된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48세의 효장은 확실히 박력있고 강력한 여강인이다.
그녀의 손자 현엽이 등극하면서, 효장은 황태후에서 태황태후가 된다.
사학자들은 보편적으로, 효장이 순치조와 강희조때 큰 역할을 한 것이지만, 그녀의 가장 큰 역사적 공헌은 강희대제를 배양한 것이라고 말한다.
강희제는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궁밖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음식, 언어, 독서, 생활습관은 모두 효장의 가르침아래에서 양성된 것이다. 효장은 책을 읽는 습관이 있어, 강희제도 영향을 받는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침저녁으로 독송하고, 덥거나 춥거나 가리지 않는다'는 좋은 습관을 기른다. 효장도 수시로 나이어린 강희제에게 근정애민(勤政愛民)하는 좋은 황제가 되라고 당부했다.
한번은 그녀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강희에게 묻는다: "천하의 주인으로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강희제는 낭랑하게 대답한다: "신은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그저 천하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잘 살고, 함께 태평성대의 복을 누리는 것뿐입니다."
강희제는 나중에 업적을 많이 세우는 황제가 된다. 그것은 효장의 가르침과 배양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강희제도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조모 태황태후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성취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날로 성장하는 강희제가 성취를 거두려면 먼저 반드시 보정대신 오배(鰲拜)라는 산을 넘어야 했다.
순치제가 죽은 후, 강남의 수재가 북경으로 와서 상소를 올려, 효장에게 수렴청정을 청한다. 다만 효장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평생동안 그녀는 그저 중요한 순간에 태후의 신분으로 정치에 참여했을 뿐 그녀가 전면에 나서서 임조청정할 생각은 없었다. 원인은 당연히 여러가지이다. 만주의 조종지법의 제한도 있고, 한족사회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이야기등도 있다. 다만 효장은 자신의 명성을 중시했고, 시비에 휘말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효장은 친왕들과 강희제를 위하여 4명의 보정대신을 둔다. 도르곤이 권력을 찬탈한 교훈을 되새겨, 이번에는 4명의 보정대신중 종실은 한명도 없었다. 누구도 황권을 쟁탈할 명망이나 자격은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외에 4명의 생각을 검증해본 결과 그들은 효장과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경향이었다. 그렇게 하여, 강희제의 즉위초기, 4명의 보정대신에 의해 이전의 한화조치는 모조리 폐지되고, 만주제도로 복귀하게 된다.
다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4명의 보정대신중 오배가 강력하게 등장하여, 다른 보정대신들을 누르고, 제2의 도르곤이 된다. 이는 효장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같은 정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권신의 탄생을 막을 수는 없었던 걳이다.
강희제가 만12살이 되었을 때, 효장은 그의 혼사를 준비한다. 기억해야할 점은 혼인연맹은 효장이 가장 잘하는 정치수완이다. 그녀는 4명의 보정대신중 소니(索尼)의 손녀를 황후로 책봉하고, 어비롱(遏必隆)의 딸을 황비로 책봉하며, 오배가족의 여인은 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 효장은 이를 통해 4명의 보정대신을 회유하고, 분리시켰다. 동시에 오배를 고립시켰다.
강희제가 오배를 체포하기 2년전에, 효장은 강희제의 둘째 누나를 오배의 조카에게 시집보낸다. 이를 통해 오배를 안심시키게 했다. 그가 여전히 대국을 장악하고 있다고 여기고 경계심을 늦출 수 있도록.
이어서 강희7년(1668년), 순치제의 능묘가 완공되고, 강희제는 부친의 비문을 써서, 재위기간의 업적을 칭송한다: "시만한여일체(視滿漢如一體), 우문무무중경(遇文武無重輕)"(만주족과 한족을 하나로 보았고, 문관과 무관을 누구도 경시하거나 중시하지 않았다). 이는 우회적으로 순치제의 한화조치를 긍정한 것이었다. 이런 재평가는 효장이 순치제의 유조에서 순치제의 정책을 전면부정했던 것과는 상반되었다.
이 점은 아주 재미있다. 역사학자 유로(劉潞)의 분석에 따르면, 강희제의 이 비문은 효정의 윤허를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순치제에 대한 재평가는 효장의 태도변화를 말해준다고 본다. 강희초기 4대보정대신은 한화를 부정하고, 구제도를 실행했다. 그 결과 사회는 안정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더욱 흔들렸다. 효장은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녀는 순치제의 '명예를 회복'시킴과 동시에 자신에 대하여 더더욱 4명의 보정대신에 대하여 만주만 숭상하고, 한족을 폄하하는 방식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린다. 비문을 보면, 똑똑한 조정대신이라면 태황태후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몇년 후, 60세의 효장은 강희제로 하여금 그녀를 위해 만주어번역본 <대학연의(大學衍義)>(남송의 이학자 眞德秀의 저작)를 부탁한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효장의 사상변화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대단한 점이라면 효장이 고집스럽고 완고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아들 순치와 정치적견해가 달랐을 때는 거의 조화될 수 없는 것같았는데, 이제 그녀는 젊은 손자 강희제의 조정개혁을 지지해주고 있는 것이다. 강희제와 효장의 감정은 계속하여 좋았다. 이는 초기에 조모의 교육을 받고 길러준 것외에 조손 두 사람의 정치적견해도 일치하였다는 것이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효장의 태도변화는 당시 더욱 현실적인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녀는 더 이상 수구적인 권신 오배등과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 해, 강희8년(1669년), 오배는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강희제의 "소년씨름단"에 의해 체포된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 있다가 사망한다.
16세의 강희제는 이때부터 친정을 시작한다.
4년후, 삼번의 난(三藩之亂)이 발발했고, 효장이 당시 구축한 정략결혼은 오삼계의 반란에 어느 정도 억제작용을 했다. 반란을 평정하는 8년동안, 효장은 직접 의사결정에 참여했고, 또 다른 차하르몽골의 내란도 진압했다. 모든 반란이 진압된 후, 강희제는 조모의 장기적 안목과 지지에 매우 감격하며 두 차례에 걸쳐 그녀를 "궁중요순(宮中堯舜)"이라고 불렀다.
효장은 강희제가 이미 박력있고 능력있는 제왕으로 성장한 것을 보고, 내심 안심한다. 그후에는 내궁에 머물면서 더 이상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말년의 효장
5
1688년 1월, 75세의 효장이 병사한다. 병이 위중했을 때, 강희제는 정성껏 모셨고, 밤낮으로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만 효장이 병사한 후, 어떻게 조모를 안장할 것인지는 현실적인 난제가 된다.
효장의 유언에 따르면, 순치, 강희라는 아들과 손자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으니, 순치의 효릉부근에 자리를 정해 안장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친의 능이 아들의 능의 곁에 있는 것은 만주족의 예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족의 예제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효순한 강희제는 골치가 아팠다. 결국 최종적으로 효장이 생전에 거주하던 자녕궁의 동쪽 전각을 철거한 후 효릉의 풍수장 바깥에 건축하고, 효장의 관을 그곳에 안치한다. 그렇게 안치한 후 37년이 흘러 옹정이 즉위한 세번째 해에 지궁에 매장되며, '소서릉(昭西陵)'이라 칭한다.
효장의 사후에 일어난 통상적이지 않은 안배는 오랫동안 묵혀져 있던 스캔들이 다시 전파되고 해석되게 만든다. 사람들은 효장이 도르곤에게 개가한 적이 있기 때문에, 사후에 홍타이시를 볼 면목이 없어, 홍타이시와 합장하지 않으려 했다고 말한다.
역사학자인 유로는 이렇게 말한다. 효장의 장례는 통상적이지 않은데, 그것은 주로 강희제 시기에 만주족의 장례개혁때문이다. 만주족의 전통은 화장(火葬)이었다. 누르하치부터 홍타이시, 순치에 이르기까지 3명의 황제는 모두 화장되었다. 그러나 강희제에 이르러, 유가의 토장(土葬)관념이 성행하기 시작한다. 만일 화장하려면 강희제 본인조차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만일 토장을 한다면, 그녀를 홍타이시와 합장시킬 수가 없었다(토장은 관을 사용하고, 화장은 유골함을 사용한다). 강희제는 할 수 없이 잠안봉전을 만드는 방식으로 후임자가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면, 효장이 홀로 소서릉에 매장된 것은 도르곤과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일이다.
평생동안, 효장은 은인할 줄 알았고, 박력이 있었다. 능력도 있으면서 물러날 줄도 아는 여정치가였다. 그녀는 두 소년황제를 보좌했고, 두 차례에 걸처 청나라의 위기를 넘기도록 도왔다. 그러나 시종 권력욕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며, 일생동안 진퇴를 자유자재로 했다. 시종일관, 그녀는 수렴태후라는 명칭조차 얻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두 황제의 모친이자 조모였을 뿐이다.
한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 것이 어떤 때는 그/그녀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았느냐에 있다.
그녀는 권력을 가지고 놀 수 있었고, 호화사치스럽게 살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면에 나설 수 있었고, 수렴청정할 수 있었고, 진정한 제국의 여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완강하게 존재감을 떨칠 수 있었고, 역사에 그녀의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효장이 역사상 다른 여강인들보다 높이 평가받는 원인일 것이다.
재미있는 점이라면, 청나라는 초기와 말기에 두 태후가 탄생했다. 효장과 자희(서태후). 두 태후의 경력, 자격과 수명은 모두 비슷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사람을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다만, 그녀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사상궤적이다.
자희는 일찌기 조정의 혁신파(예를 들어 공친왕 혁흔)의 세력에 의존하여, 보정팔대신을 위시한 보수파를 몰아내면서 정치전면에 나선다. 그녀는 개혁의 수혜자이자 지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그녀는 날로 보수화되고, 결국 광서제의 변법사업을 말살시켰다. 이는 사상이 혁신에서 수구로 돌아가는 통상적인 궤적이다.
효장은 정 반대이다. 그녀의 초기 정치적 성향은 수구였다. 순치의 한화개혁에 반대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그녀는 강희제의 개혁을 지지했다. 이는 사상이 수구에서 혁신으로 바뀌는 비통상적인 궤적이다.
이를 보면, 자희는 권력욕에 날로 침식되어 타락한 인생이라 할 수 있고, 효장은 권력욕을 억압하고, 잘못을 알면 바로 고치고, 스스로 전진하는 인생을 살았다. 두 사람중 누가 높고 누가 낮은지는 바로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효장에게 덧씌워진 각종 추문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역사의 미스테리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운 명성에 전혀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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