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초기)

진영화(陳永華): <녹정기(鹿鼎記)> 진근남(陳近南)의 원형

중은우시 2024. 10. 15. 16:36

글: 자귤(紫橘)

김용(金庸)의 <녹정기(鹿鼎記)>에 진근남(陳近南)은 대영웅로 나온다. 어떤 사람은 "평생불식진근남(平生不識陳近南), 종칭영웅야왕연(縱稱英雄也枉然)"(평생 진근남을 모른다면, 영웅이라고 칭하는 것도 헛된 일이다). 진근남이 실존하는 인물인지는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명말민족영웅 정성공(鄭成功)의 군사(軍師) 진영화(陳永華)야말로 진근남의 원형(原型)이라고 본다.

  1. 진근남과 진영화

진근남을 정사사서에서 찾아보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명나라말기 진영화가 진근남의 원형이라고 말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진근남이 바로 진영화가 사용한 가명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온웅비(溫雄飛)의 <남양화교통사(南洋華僑通史)>에 이런 말이 나온다. 진근남은 정성공의 부장(部將) 진영화의 자칭(自稱)이다. 정성공이 대만으로 물러난 다음 민간업무를 진영화에게 처리하게 맡겼다. 정성화는 청나라의 국운이 날로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힘으로 이기기 힘들다고 보았다. 게다가 인심이 흩어질까 우려하여 비밀단체를 창립하여 사방에 반청사상을 전파하게 된다. "천지회(天地會)라는 것은 진영화와 정지룡(鄭芝龍, 정성공의 부친)의 부곡(部曲)이 조직한 것이다." "그는 지식계급으로 망국의 한을 침통하게 여긴 사람이다. 명나라인물들 중에서 안목과 학식으로 이 큰 임무를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은 시종 정성공을 보좌했던 진영화뿐이고, 그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성도환구망(星島環球網)>에 따르면, 대만의 홍문(洪門)은 진근남이 바로 정성공의 군사 진영화라고 인정한다. 당시 진영화는 병법에 정통하여, 정성공을 따라 대만으로 왔으며, 그후 진영화는 다시 대륙으로 되돌아갔고, 가명으로 진근남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근남이 바로 진영화일까?

2. 진영화의 사적(事迹)

<녹정기>에서 총타주 진근남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며 아주 잘 생겼고, 충의로 뭉쳐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역사상의 진영화는 1634년에 태어났고, 복건(福建)사람이다. 거인(擧人) 진정(陳鼎)의 아들이다. 정성공이 동안(同安)을 점령했을 때, 진정을 현교유(縣敎諭)로 임명한다. 영력2년, 청군이 복건 동안을 함락시킨다. 진정은 현학 명륜당에서 목을 매어 순국한다. 이때 진영화는 겨우 15살이었다. 당시 정성공은 하문을 지키고 있었고, 반격을 도모하고 있었으며, 천하의 인재를 모으고 있었다. 진영화는 정성곡의 막료로 들어간다. 정성공은 진영화가 올린 글을 보고 그가 당대의 와룡(臥龍, 제갈량)이라고 여긴다.

대만학자는 정말 진영화가 제갈량식의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문으로는 나라를 다스리고, 또한 무로는 운주유악(運籌帷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료를 살펴보면, 진영화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 아니다. 첫째, 역사상 그 어느 전투에서도 진영화가 직접 지휘한 경우가 없다. 양영(楊英)의 <종증실록(從證實錄)>을 보면, 정성공의 군대생활에 관한 중요문헌이 기-재되어 있는데, 진영화라는 이름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정성공이 남경을 수복했을 때, 동으로 대만을 거두었을 때에도 진영화는 후방을 지키고 있었다. 정경(鄭經)시대에 정경은 하문, 동산(銅山)등지에서 네덜란드와 함작하여 청나라조정과 싸운다. 진영화는 여전히 후방에서 가족들을 보호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1674년,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고, 정경이 병력을 이끌고 도우러 간다. 7년의 삼번지란때 진영화는 동녕총제사(東寧總制使)를 맡아 대만업무를 책임졌다.

진영화는 두 차례 군사에 관한 의견을 냈을 뿐이다. 제1차는 정성공이 실력이 가장 강대했을 때인데, 병력이 20만에 이르고 휘하에 장수가 수두룩했을 때이다. 북벌하여 남경을 광복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정성공의 내부에서 논쟁이 일어나,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진영화는 북벌하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만일 북벌하지 않는다면 설사 제갈량이 다시 태어나더라도 현재의 국면을 회복할 수 없다는 명목으로 논쟁의 대치를 타파한다. 그러나 남경수복에 실패하면서 정성공은 병력의 열중 육,칠을 잃는다. 대장들도 죽거나 투항했다. 이후 전략적으로 정성공은 그저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는 정성공이 대만을 수복할 것이냐의 점에 관하여이다. 부하들 사이에 논쟁이 발생한다. 진영화는 그저 중간파로서의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 대만을 점령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해득실을 얘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만을 점령하는 것에 대한 이해득실을 얘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번주(정성공)께서 정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대만점령을 주장하던 양조동(楊朝棟)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진영화는 군사분야에서는 아무런 업적이 없다. 이 방면으로 말하자면, 진영화는 기실 진근남과 차이가 크다.

3. 진영화의 문직능력(文職能力)

청나라때의 하림(夏琳)은 <민해기요(閩海紀要)>에서 진영화를 왕좌지재(王佐之才)이며, 정경의 문신중 제일이라고 말했다. 군주를 보좌하여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사람을 잘 기용하고, 잘 발탁해야 한다. 1657년 정성공이 북벌을 결정했을 때, 일찌기 사람을 영력제(永歷帝)에게 보내어, 영력제의 조정이 서남에서 진격해서 정성공의 부대와 협력하여 공격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진영화는 양정세(楊廷世)를 추천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양정세는 말재주가 뛰어나서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양정세는 과연 뛰어난 외교능력을 발휘하여, 영력제가 정성공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물었을 때, 양정세는 이렇게 대답한다. "선박이 천척이고 장수가 수백명이며, 20여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으며, 군량은 비록 현지에서 조달하지만, 그래도 여송, 일본, 섬라, 교지등의 국가에서 외국선박으로 운송하고 있습니다." 영력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그리하여 정성공을 연평군왕(延平郡王)에 봉하고, 상방보검을 하사하여, 편의행사(便宜行事)할 수 있게 한다. 그외에 구본(邱輝)는 원래 밑바닥 출신이고, 전문적으로 대륙에서 부녀자를 납치하여 대만으로 끌어오는 일을 했었다. 그후 그는 정경에 투항한다. 대다수의 관리들은 그의 출신때문에 반대하지만, 진영화는 다른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휘를 받아들인다. 그후 정경이 서정하여 삼번의 난에 참가했을 때 구휘가 힘껏 도와준다. 청군이 대만을 공격할 때, 구휘는 앞장서서 청군을 막는데, 그는 명정(明鄭)의 마지막 수호자가 된다.

다음으로, 진영화는 소하(蕭何)의 후방을 지키는 것같은 모습을 보인다. 정경이 서쪽을 정벌하는 기간, 정경의 여러 동생들이 위법한 행동을 하여 백성등의 원성이 자자했다. 진영화는 그들을 말로 말려보았지만 듣지 않자, 자신의 16살짜리 사위 정극장(鄭克臧)을 감국(監國)으로 추천한다. 정극장은 과감한 성격에 정성공과 같은 성품이었다. 감국기간 권력귀족들에 대하여도 엄격하게 법을 집행한다. 정씨자제들도 그를 두려워하게 된다. 정극장이 감국으로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정경의 앞에서 능력을 보여준 것이고, 정경은 그를 후계자로 여기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진영화는 확실히 문신이고, 내정분야에서는 소하, 제갈량같은 모습을 보였다.

4. 품성문제

진영화는 정씨일가를 20여년간 보좌한다. 그는 정씨정권의 제일보신(輔臣)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재상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겸손하고 신중했으며 교만이나 조급을 경계했다. 진영화는 사람들과 쉽게 어울렸고, 스스로에게는 엄격했다. <대만통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진영화가 관직을 떠나 있을 때, "베옷을 입고 투박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담담했다." "그의 행동거지는 경구완대(輕裘緩帶)의 기풍이 있었다."

가풍은 한 사람의 품성을 나타낸다. 기록에 따르면, 진영화집안의 가풍은 엄격하고 신중했으며 가정이 화목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부부간에 서로 절을 하고, 존중했다. 그의 딸은 정극장에게 시집간다. <대만부지>에 따르면 그녀는 "책을 읽고 예절을 잘 알았다. 귀족집안의 딸로 자처하지 않았다."

진영화는 정씨정권의 재정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의 생활은 청빈했다. 정경은 일찌기 그에게 상선대를 하나 주어 집안을 위해 쓰도록 했으나, 그는 완곡하게 거절한다. <십칠세기대만영국무역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진영화는 영국에 개인적으로 65냥을 빚지고 있었다. 당시 그는 동녕통제사였고, 정경을 대리하여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만일 직무상의 편의를 이용하려고 마음먹으면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가 죽은 후 영국상인은 할 수 없이 불량대출러 처리해야 했다. 비록 빌린 돈을 갚지 않은 것은 좋은 일이 아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진영화는 공사가 분명했고, 청렴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론

진영화가 진근남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필자는 진영화가 확실히 진근남의 원형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진근남은 풍석범(馮錫範)과 정극상(鄭克爽)의 권모술수에 당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역사상 확실히 진영화는 풍석범의 권모술수에 당했다. 풍석범은 권모술수에 능했고, 진영화의 직위를 빼앗는다. 비록 진영화는 은퇴했지만, 여전히 각계인사들에게 존중받았다. 진영화는 대만에 있는 동안 대만의 개화를 촉진했다. 그리하여 진영화가 병사했을 때, 대만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집으로 달려가서 조문했다. 심지어 청나라가 대만을 수습한 후인 건륭15년 대만백성들은 여전히 그를 기념했고, 대만의 공묘 부근에 영화궁(永華宮)을 짓는다. 당시 살마들이 평가하기를, "진영화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펼쳤고, 대만인들이 그를 생각하는 것은 사천인들이 제갈량을 생각하는 것과 같았다." 그를 촉의 제갈량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