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흑난간(紅黑亂侃)
많은 사람들은 도르곤(多爾衮)의 동모제(同母弟) 도도(多鐸)을 얘기할 때 그가 청태조 누르하치의 막내아들(幼子)이며,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이는 당시 후금에 "막내아들이 집안을 지킨다(幼子守竈)"의 전통때문이며, 그리하여 누르하치에게서 가장 많은 우록(牛錄)과 거의 모든 개인재산을 승계하여 청나라초기 가장 실력이 강력한 기주(旗主)중 하나가 되었다고 하였다.
사서에서도 청태종 홍타이시(皇太極)과 섭정왕 도르곤이 도도라는 동생을 언급할 때, "유자(幼子)", "계제(季弟)"로 칭했다. 그 뜻은 도도가 그들의 가장 어린 동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도도는 누르하치의 가장 어린 아들이 아니다.
누르하치에게는 모두 16명의 아들이 있고, 도도는 15째이다. 그의 뒤에 누르하치가 62세때 낳은 열여섯째아들이 있다. 그의 이름은 피양구(費揚果)이다.
그러나 이 피양구는 일반적인 황실의 유자들처럼 총애를 받는 대우를 누리지 못했을 뿐아니라, 종실에서 제명되고, 평생의 사적도 사서에서 지워져 버린다.
인위적으로 "소실"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까?
어떤 사람은 이것이 아마도 누르하치시기의 도색(桃色)스캔들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한다.
- 오리무중의 신세내력
청나라초기의 사서에는 누르하치의 앞의 15명 아들, 8명 딸의 생모는 모두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다. 별볼일없는 서비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모두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유독 기록이 없는 것은 누르하치가 62세때 얻은 막내아들 피양구이다. 그의 생모는 누구일까?
남아있는 사서의 기록으로는 훨씬 이후에 기록된 <청황실사보(淸皇室四譜)>에 나오는데, 피양구의 모친은 바로 푸차 군다이(富察.衮代)라는 것이다.
군다이는 누르하치의 첫부인이 사망한 후에 취한 계비(繼妃)이고, 여러 해동안 대푸진(大福晋)을 지낸다. 누르하치와는 감정이 깊었으며, 누르하치가 한때는 전쟁에 나갈 때도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 책의 기록대로라면, 피양구는 누르하치의 금존옥귀(金尊玉貴)의 적유자(嫡幼子)여야 한다.
사람들의 눈에 누르하치의 '적유자'인 도도에 대한 대우를 보자. 그는 7살때 화석액진(和碩額眞)에 봉해지고, 13살때 패륵(貝勒)에 봉해지고, 팔기의 하나인 상황기(鑲黃旗)의 기주(旗主)가 되고, 누르하치에게서 가장 많은 우록과 재산을 물려받는다. 형들이 질투할 정도로.
왜 피양구는 이렇게 존재감이 없을까?
피양구가 태어난 시간은 1620년으로 누르하치 천명5년이다. 우리는 이 해애 후금의 왕실에 놀랄만한 스캔들이 발생한 사실을 알고 있다.
천명5년, 누르하치의 이름없는 소푸진(小福晋)이 누르하치에게 고발하여 말하기를, 그의 계실인 대푸진(大福晋)이 누르하치와 첫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 다이샨(代善)과 사통했다는 것이다!
다이샨의 당시 신분은 누르하치가 직접 세운 후계자였다. 당시의 후금은 수계혼의 전통이 있으므로 누르하치는 일지감치 다이샨에게 당부하여 말하기를 그가 죽은 후에 다이샨에게 누르하치가 남긴 푸진과 동생들을 잘 보살펴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숨은 의미는 다이샨이 계모를 처로 취하는 것을 윤허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사람이 누르하치가 살아있을 때부터 사통을 시작하다니, 그건 누르하치로서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누르하치는 이 스캔들을 크게 떠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대푸진이 물건을 훔친 것을 빌미로 하여 대푸진을 버린다.
얼마 후에는 다이샨이 아들을 학대했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후계자의 지위를 박탈한다.
누르하치의 자손들은 이 사건을 가급적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 한문(漢文)으로 된 사료에서는 이 사건에 관한 여하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유독 깨끗이 삭제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만문(滿文) 노당(老檔, 문서자료)으로 거기에서 이 사건에 관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사료기재가 완전하지 않으며, 게다가 당시의 후금은 다처제도를 취하여 누르하치에게 대푸진이 한명만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누르하치의 그 대푸진이 누구인지에 관하여 역대이래로 논쟁이 있어왔다.
많은 학자들은 이 대푸진이 분명 군다이일 것이라고 본다. 즉 <청황실사보>에 기록된 피양구의 생모이다.
이렇게 보면, 피양구가 무시된 원인은 아주 분명해진다. 그가 태어난 해는 바로 모친이 계자(繼子)와 사통했다고 고발당한 그 해이다. 모친이 버려졌기 때문에, 그도 자연스럽게 적자의 정상적인 대우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모친 군다이는 누르하치를 배신하였기 때문에, 그의 친부가 도대체 누르하치인지 아니면 누르하치의 아들 다이샨인지도 불분명하게 되어버렸다.
이렇게 추측해보면 피양구가 왜 난감한 대우를 받았는지가 완벽하게 설명된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는 헛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군다이가 만력13년(1585년)에 전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데리고 누르하치에게 시집을 온다. 즉, 천명5년의 사통사건때 군다이는 이미 누르하치에게 시집온지 35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살은 넘었다.
50여세에 아들을 낳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확률은 아주 낮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료에 의하면 군다이는 천명5년 이월에 이미 사망하였다. 다만 피양구가 출생한 것은 천명5년의 십월이다. 만일 기재가 사실이라면 군다이는 피양구의 생모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피양구의 생모가 누구인지? 왜 누르하치의 16명의 아들, 8명의 딸 중에서 오직 그만이 생모가 누구인지를 기록해놓지 않은 것인지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2. 불분명한 사인(死因)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피양구의 동년, 청소년기에 대하여는 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의 형들은 기본적으로 십여세가 되면 전쟁터에 나가 전투를 했지만, 피양구는 일생동안 전쟁터에 나간 기록이 없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일생에 대하여 그 어떤 사적도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그의 이름을 제외하고, 그리고 그가 죄를 지어 홍타이시에게 처형당하고, 종실에서 제명되었다는 점만 제외하고.
청나라황실은 비록 내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피양구를 제외하면, 홍타이시의 재위기간동안 그 어느 형제도 죽인 적이 없다.
여러번 홍타이시의 역린을 건드리고, 홍타이시의 관내전략에 대한 구상을 망가뜨린 이패륵(二貝勒) 아민(阿敏)도 단지 평생 연금시켰을 뿐이다.
피양구가 홍타이시에게 처형을 당한 것을 보면, 분명히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작위도 없고, 명망도 없으며, 수하에 사람도 없으며, 무시할만한 어린동생인데, 도대체 무슨 중죄를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반란을 일으키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여건이 되지 않는다. 홍타이시를 암살하고 싶어도 도와줄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더욱 궤이한 점은 사서에 피양구가 도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홍타이시의 손자인 강희제(康熙帝)가 피양구를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일은 짐이 알고 있다. 다만 상세히는 모른다. 피양구는 태조의 아들로, 태종때 대죄를 지어 주살당한 사람이다."
즉, 강희시대에 피양구에 관한 기록은 이미 모조리 말소되어 있다는 것이다. 강희제조차도 피양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다만 만일 우리가 앞의 글에서 말한 바를 가지고 추측해보면, 피양구의 생모는 누르하치의 대푸진 군다이였다면, 아마도 홍타이시가 왜 피양구를 죽였는지 설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홍타이시는 군다이의 일맥에 대하여 뼛속까지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타이시가 피양구외에 다른 형제는 죽인 적이 없지만, 그는 누나를 죽인 적은 있다.
그것은 바로 군다이의 유일한 딸인 망구지(莽古濟) 공주이다.
천총9년(1635년)연말, 즉 칭제하기 전해에, 누군가 망구지가 일찌기 그녀의 두 동모형제인 망굴타이(莽古爾泰), 더거레이(德格類)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로 맹세했다고 고발했다.
홍타이시는 망구지를 극형에 처한다. 망구지는 청나라때 유일하게 권력투쟁에서 죽임을 당한 공주가 된다.
이때 망굴타이와 더거레이는 이미 군대내에서 병사했기 때문에, 작위를 삭탈하고, 자녀는 종실에서 제명당한다.
군다이의 3명의 자녀들이 실질적인 반란행위를 벌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처형당한 것을 보면, 홍타이시가 군다이의 일맥에 대해 얼마나 큰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만일 피양구가 군다이의 아들이라면, 그가 피살당한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당연히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모든 것은 피양구가 군다이의 아들이라는 기초 위에서만 성립되는 합리적 추측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사료를 보면, 피양구의 사인은 그녀의 생모가 누구인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3. 중시되지 못한 원인
그렇다면, 만일 피양구의 생모가 누르하치를 배신한 군다이가 아니라, 단지 누르하치의 별 볼일없어서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서비(庶妃)였다면, 그의 경력에 대해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이런 말이 있다. 소아자(小兒子, 막내아들), 대손자(大孫子, 장손)는 노인의 목숨줄(命根子)이라고.
우리는 역대황실의 유자를 보면 설사 서출이라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 특히 일단 막내아들이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게 되면, 부친을 이어 등극한 형은 더더욱 그를 아들처럼 잘 돌보아주었다.
청나라때만 하더라도, 옹정제와 건륭제는 모두 그들의 10살도 되지 않아 부친을 잃은 어린 동생들을 아주 잘 돌봐주었다.
홍타이시 본인도 마찬가지이다. 나이가 자신의 막내아들과 비슷한 동생 도도에 대하여 매우 총애했고, 도도가 무슨 말썽을 부려도 중하게 처벌하지 않았다.
피양구는 누르하치가 62세에 얻은 막내아들이다. 만일 생모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어찌 막내아들의 대우를 받지 못했을까?
여기서 얘기해야할 점은 후금과 청초의 "적서신교(嫡庶神敎)"현상이다.
후금에서 청초까지, 당시의 만주족은 아직 한화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처제도를 실행한다. 귀족들은 처가 한명만이 아니었다. 측푸진(側福晋)도 처이고 이들 처가 낳은 아들은 모두 적자(嫡子)였다.
전형적인 대표는 홍타이시가 칭제한 후 책립한 숭덕오궁후비(崇德五宮后妃)이다. 그녀들은 한어(漢語)로 표시할 때는 황후(皇后)와 비자(妃子)로 표시하지만, 만주어에서는 모두 푸진(福晋)이다. 단지 앞에 붙이는 말만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황후 제제(哲哲)는 국군푸진(國君福晋)이고, 관조궁신비(關雎宮宸妃)는 동대푸진(東大福晋)이다.
그녀들은 모두 홍타이시의 처이고, 낳은 아들은 모두 홍타이시의 적자이다.
이는 순치제가 왜 여러 형들이 있고, 황후의 소생이 아님에도 황위를 계승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왜냐하면 그는 숭덕오궁후비 소생의 적자들 중에서는 나이가 가장 많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인의 적자와 서자는 주로 계승권에서 구분된다. 그러나 후금과 청초에는 만주족이 관외에서 생활했고, 자원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주인들은 서자를 극도로 무시했다. 서자는 아들의 항렬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전형적인 대표는 순치제가 동악비(董鄂妃)가 낳은 황사자(皇四子)를 "짐의 첫아들(朕之第一子)"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순치제가 동악비를 너무 사랑해서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아니라, 그의 눈에 다른 아들들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동악비는 황귀비였고, 만주족의 관념으로는 처이다. 순치제의 다른 아들들은 모두 서비 소생이니, 당시 만주족의 관념에는 정통 아들이 아니었고, 황자들사이의 항열에도 끼어들지 못하는 것이다.
나중에 청나라황실이 한화하는 정도가 심해지면서, 이런 "적서신교"의 방식을 버리고, 적자와 서자를 모두 항열에 넣게 된다.
그래서, 만일 피양구의 생모가 누르하치의 대푸진 군다이가 아니라, 이름없는 서비였다면, 그가 어려서부터 받은 차가운 대우는 이치에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서비가 낳은 아들은 누르하치의 눈에 정통 아들이 아니다. 홍타이시등 푸진이 낳은 적자들의 눈에도 그는 정통의 형제가 아닌 것이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시의 서자들의 이력만 보아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적자들의 보좌역할이고, 공을 세우더라도 고위직인 왕작은 받을 수가 없었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시의 서자들 가운데 작위가 가장 높은 사람은 진국공(鎭國公)이다. 이는 청나라종실에서 제5급의 작위이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겨우 진국장군(鎭國將軍)인데 이는 1품무관의 하등 작위이다.
피양구가 만일 서비 소생이라면, 그는 서자로서 이렇게 극도로 적서진교의 환경 속에서 생활했을 것이고, 피살될 때도 아직 젊었고, 전쟁터에 나갈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주 정상적이라 할 것이다.
그에게 반드시 군다이의 아들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누르하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음모론같은 것도 필요없다.
그는 아마도 생모의 신분이 너무 낮아서, 존재감없이 살아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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